심훈·임화, 종로를 조선의 심장·청년 아지트로 칭송했다
[근대 문화의 기록장 ‘종로 모던’] ‘조선 8경’과 종로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 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할 양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심훈, ‘그날이 오면’ 부분
조국 광복의 ‘그날’이 오기만 한다면 “종로 인경”(보신각종)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다가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恨)이 남으오리까”라고 노래했던 심훈은 특히 ‘유창상점 3층 『종로』’를 ‘반도 8경’ 중 한 곳으로 꼽았다. 유창상회(裕昌商會)는 김재덕(金載德)이 운영하는 금은 세공공장이자 귀금속 상점으로서 종로2가 101번지, 보신각 바로 옆에 있었다.
당시 청년회 전국에 2000개 달해
시인이자 영화배우이던 임화는 ‘반도 8경’으로 ‘부산 잔교’, ‘경성역두’, ‘신의주 세관’ 그리고 ‘종로 네거리’를 꼽았다. 대부분의 응답자들이 과거 조선과 민족의 표상에 주목한 데 비해 임화는 ‘지금 여기’, 근대성이 충만한 장소에 주목하고 있다.
임화가 ‘반도 8경’으로 꼽은 곳의 공통점은 관문이자 두 힘이 첨예하게 갈등하는 경계(境界) 지점이다. ‘부산 잔교’는 일본 제국이 식민 지배를 관철하는 통로이자 한국인들이 배움이나 일자리를 찾아서 고향을 떠나는 출발점이었다. ‘신의주 세관’은 대륙과 한반도의 국경, 일본 제국의 검문이 삼엄한 접점이다. 자본과 권력과 정보와 사상이 집중된 서울, 그 관문이 또한 서울역 곧 ‘경성역두’이다. 그 서울의 중심에 종로가 있는데, 임화는 독특하게 ‘종로’라고 하지 않고 ‘종로 네거리’라고 특정했다. 서로 다른 힘들이 첨예하게 대치하는 경계 지점, 관문으로서 ‘종로 네거리’를 꼽았던 것이다.
임화는 자기 운명의 전환점이나 결단의 순간에 스스로를 ‘종로 네거리’에 세우고 향방을 가늠하는 시 3편을 발표한 바 있다. ‘네거리의 순이’(1929), ‘다시 네거리에서’(1935) ‘1945년, 또다시 네거리에서’(1947)가 그것이다. 그는 ‘종로의 시인’이었다.
오오 그리운 내 고향의 거리여!
여기는 종로 네거리.
나는 왔다 멀리 낙산(駱山) 밑 오막살이를 나와
-임화, ‘다시 네거리에서’ 부분
눈바람 찬 불쌍한 도시 종로 복판에
순이야!
(중략)
근로하는 청년, 용감한 사나이의 연인아…
생각해 보아라, 오늘은 네 귀중한
청년인 용감한 사나이가
젊은 날을 싸움에 보내던 그 손으로
지금은 젊은 피로 벽돌담에다 달력을
그리겠구나!
(중략)
자 좋다, 바로 종로 네거리가 아니냐!
어서 너와 나는 번개같이 손을 잡고 또 다음 일 계획하러 또 남은 동무와 함께 검은 골목으로 들어가자
네 사나이를 찾고 또 근로하는 모-든 여자의 연인인 용감한 청년을 찾으러…
그리하여 끝나지 않는 새로운 용의(用意)와 계획으로 젊은 날을 보내라
-임화,‘네거리의 순이’(『조선지광』1929.1.) 부분
임화가 생각한 ‘종로 네거리’는 ‘청년’이 고투하는 장소였다. ‘청년’이라는 시어가 7번, ‘젊은’이란 시어가 7번이나 등장한다. “눈바람 찬 불쌍한 도시 종로 복판”의 주체는 ‘청년’이다.
종로 네거리는 청년이 만들고, 청년을 만들고, 청년이 주체가 되는, 청년들의 거리라는 것이 임화의 사상이다.
노동·여성운동 조직도 종로에
조선의 중심이 종로 네거리라는 의식은 바로 이렇게 생성되는 것이며, 조선의 미래는 종로 네거리에서 청년들이 열어나갈 것이라는 주제를 설파하고 있다. 감옥에 가둘지라도 청년은 굴하지 않는다. “젊은 피”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힘이다. “검은 골목으로 들어가자”라는 것은 종로의 골목이 “끝나지 않는 새로운 용의와 계획”이 꿈틀대는 아지트이기 때문이다. ‘종로 네거리’는 임화가 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한 인큐베이터이자 기획하고 운동하는 아지트이고 이들 네트워크의 중심이었다.
‘청년’은 루소가 『에밀』(1762)에서 소년기와 성인기 사이에 청년기를 설정하고 다음 사회를 준비하는 주체로 등장하였다. 1880년대에 일본에서 근대적 인간형으로 ‘세에넨’(靑年)이란 말이 사용되었고, 한국에서는 1905년을 전후하여 ‘청년’이란 말이 급속도로 쓰이기 시작했다. 『청년에게 고함』이라는 책이 필독서가 되었다.
3·1운동 이후 개조와 계몽의 열기 속에서 ‘청년’은 민족과 사회 그리고 진보의 동력으로 주목받았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청년회(靑年會)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서 전국적으로 2천 개에 달했다. 마침내 전국 차원의 조선청년회연합회가 1920년 말 결성되었다. 청년들은 집합적 결속력을 조직화하고 자기들의 이상을 미디어로 발신하며 사회의 중심세력으로 떠올랐다. 조선청년회연합회는 세종로 네거리 광화문통 209번지에 사무실을 두고 『아성(我聲)』, 즉 ‘우리의 소리’라는 기관지를 출간했다. ‘아성(我聲)’=‘우리의 소리’는 곧 ‘조선청년회연합회의 함성’이었던 것이다. 열화와 같은 청년운동은 문화·사회·노동·여성·언론운동을 견인하였다. 1923년을 전후하여 조선청년회연합회가 광화문통에서 종로 견지동 80번지로 이전하면서 청년의 아지트가 종로 네거리로 옮겨졌다. YMCA회관도 ‘청년회관’이라고 불렸다.
동아일보(종로구 화동 138), 조선일보(관철동 249→견지동 111→태평통), 중앙일보(견지동 60), 조선중앙일보(견지동 111) 등 언론기관도 종로에서 출발했다. 동아일보는 창간에 즈음하여 “국가와 사회의 진보적 세력을 대표하는 자는 청년”(1920.5.26.)이라고 선언하였다. 신흥청년동맹(관수동 92번지), 조선불교청년총동맹(수송동 44번지), 조선노동공제회(종로 2정목 67번지), 노동연맹회(견지동 88번지), 신사상연구회(낙원동 173), 여성운동 조직이었던 근우회도 공평동 43번지에 자리 잡았다. 또 보성·중동·숙명·동덕 등 학교가 우정국로 주변에 있었고 경기·서울·휘문·덕성·정신·진명 등도 종로에 있었다. 학생들은 종로에서 청년으로 성장했던 것이다. 1920년대 종로 네거리 일대, 특히 우정국로 주변은 조선의 민족·문화·사회·사상 운동의 메카였고 그 주체는 청년들이었다.
종로구청·종로문화재단·중앙SUNDAY 공동기획
정우택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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