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인의 탈출’…김순옥표 매운맛? ‘펜하’보다 죽을맛!
막장 드라마의 전설 김순옥 작가의 귀환
‘순옥적 허용’ 수위 더 높아져
*이 글은 <7인의 탈출> 주요 장면 정보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죽을 맛.” <7인의 탈출>(SBS) 제작 발표회에서 배우 엄기준은 드라마를 이렇게 정의한다. “매운맛, 마라 맛 그 이상”이라는 의미다. 과연 그랬다. 첫 회부터 여고생이 학교에서 출산하고, 교사가 거짓말로 제자를 위기에 빠뜨리고, 엄마가 친딸을 가혹하게 폭행하는 장면이 와르르 나오고, 은유로서의 ‘죽을 맛’이 아니라 실제 거의 모든 회차에서 사람이 죽는다(그리고 누군가는 부활한다). 그러다가 등장인물들이 가게 된 제주도 인근 섬에서 난데없이 오로라가 펼쳐지고, 유니콘이 하늘을 날아오르더니, 사람들이 진흙 괴물로 변한다. 평범한(?) 막장으로 시작했다가, 어느새 판타지로 흘러가는 듯하더니, 크리처물(사람을 잡아먹거나 살해하는 괴물이 등장하는 장르)이 되는 기괴한 드라마. <7인의 탈출>은 그렇게 시작됐다.
막장 → 판타지 → 크리처물까지?
사실 김순옥 작가의 작품을 보면서 “내가 지금 뭘 보는 거지?”라고 질문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아내의 유혹>(SBS·2008년)부터 심상치 않았다. 임신한 상태로 살해당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구은재(장서희)가 눈 옆에 점 하나만 찍고 민소희로 부활한 설정은 15년이 지난 요즘에도 회자될 정도로 막장 드라마의 전설이 됐다. <아내의 유혹>의 대성공은 새로운 막장 드라마 시대의 서막이기도 했다. 주로 출생의 비밀, 삼각관계, 불륜, 패륜 등 사회적 통념과 일반인의 상식 수준을 벗어나는 이야기를 막장 드라마라 불렀는데 이 드라마 이후 전개 속도가 빠르고, 악함에 망설임이 없으며, 악행과 복수의 수위도 높아진 막장 드라마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이후 <왔다! 장보리>(MBC·2014년), <내 딸, 금사월>(MBC·2015년), <언니는 살아있다>(SBS·2017년)가 연속으로 성공하며 김순옥 작가는 막장 드라마 영역의 대표 작가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물론 이때까지만 해도 막장 드라마는 아침 드라마, 일일 연속극, 주말 드라마 등 주로 중장년 이상의 시청자가 본다는 이미지가 강했다. 이런 경계가 무너진 것은 미니시리즈로 편성된 <황후의 품격>(SBS·2018년)부터다. 이른바 막장으로 분류되던 드라마가 젊은 시청자가 주로 보는 주중 미니시리즈로 제작됐다는 건 티브이(TV) 시청자의 노령화도 영향을 끼쳤겠지만, 그만큼 이런 이야기를 소비하는 시청자층이 넓어졌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방영 시간대의 변화도 의미 있었지만, <황후의 품격>부터는 막장의 내용이 달라진다. 이 드라마는 사람에게 시멘트를 부어 묻어버리려 하거나, 임신부 성폭행을 암시하는 등 이전 드라마와는 차원이 다른 높은 수위의 폭력과 비윤리적 설정으로 논란이 됐다. <황후의 품격>이 막장 드라마의 ‘끝판왕’인 줄 알았는데 2년 뒤인 2020년 <펜트하우스>(SBS)가 등장한다.
<황후의 품격>까지는 그래도 선량한 피해자가 악랄한 가해자를 응징해 악인들이 대가를 치르는 ‘권선징악’ 세계관이 반영됐는데, <펜트하우스>에서는 모두가 악하고 각자 자신의 욕망과 필요에 맞게 서로를 이용하다가 파국적 결말을 맞이한다. 즉, 선악 대립마저 무의미해진 ‘피카레스크’(도덕적 결함이 있는 악인들이 주요 인물로 설정된 문학 장르)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킹덤>(넷플릭스) 등 비슷한 시기에 방영된 다른 드라마에서는 좀비나 괴물로 인간과 사회를 은유할 때, <펜트하우스>는 인간이 가장 무섭다는 걸 에둘러 표현하지 않고 일차원적 직설화법으로 보여줬다.
인간이 가장 무서운 ‘펜하’, 인간이 괴물인 ‘7탈출’
이런 막장 드라마에서도 선한 것(사회적 의미)을 발견할 수 있을까? 비록 자극적이고 비윤리적인 설정이 난무하지만, 막장 드라마도 여느 드라마처럼 의도했든 아니든 ‘사회의 거울’로서 동시대를 비추는 기능을 한다.
<황후의 품격>은 대한민국이 입헌군주제라는 가정 아래 어느 날 갑자기 대한제국의 황후가 되어 궁에 입성한 오써니(장나라)가 황실에서 벌어지는 각종 음모와 암투, 불륜과 배신 등을 경험하며 각성해 황실 체제를 무너뜨린다는 이야기다. (제작진이 밝힌 바에 따르면) 이 드라마는 악의 근원인 태후 강씨(신은경)의 몰락을 보여줌과 동시에 “온갖 비리와 비밀이 숨겨진 구중궁궐로 시집왔다가, 궁을 제 손으로 때려 부수고, 자신의 인생과 사랑을 용감하게 되찾는” 황후 써니를 통해 2017년 ‘국정농단’으로 분노와 상실감에 빠진 사회가 요구하는 리더상을 제시하고자 했다.
<펜트하우스>는 또 어떤가. “교육이 부동산 광풍에 놀아난 꼴입니다”라는 대사가 압축한 것처럼 교육과 부동산이라는, 한국 사회에서 가장 뜨거운 주제를 통해 인간이 가진 원초적 상승 욕망, 견고해진 계급사회, 사유화한 공권력을 향한 불신, 학교폭력, 교육(입시) 비리, 부동산과 개발 등으로 얼룩진 한국 사회의 문제를 집약해 보여줬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에게 도착한 <7인의 탈출>은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그저 ‘괴물’로 상상하며 서로를 죽여야 생존할 수 있는 각자도생 사회를 보여준다. 드라마는 LH미디어 대표 금라희(황정음)가 드라마 제작비를 확보하기 위해 자신이 버린 딸 방다미(정라엘)를 양부모로부터 데려오며 시작된다. 라희는 막대한 자산가 아들과의 사이에서 다미를 낳고 버렸다. 이후 드라마는 딸을 이용하며 학대하는 엄마 라희, 자기 잘못을 다미에게 뒤집어씌우는 연예인 지망생 한모네(이유비), 자기 잘못이 드러날까봐 진실을 감추며 왜곡하는 교사 고명지(조윤희), 다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가짜뉴스를 창조한 연예기획사 체리엔터테인먼트 대표 양진모(윤종훈), 그 가짜뉴스의 확성기 구실을 한 인터넷방송 ‘주홍글씨’ 진행자 주용주(김기두), 비리와 악행을 두려워하지 않는 경찰 남철우(조재윤), 다미를 모네로 착각해 의도치 않게 위험에 빠뜨린 민도혁(이준) 등 일명 ‘방울이 사건’에 연루된 7명의 악인을 통해 인간의 이기심과 욕망이 만든 거짓말과 가짜뉴스가 불러온 파국을 그린다. ‘방울이 사건’은 극중 방울모자를 쓴 학생이 학교에서 아이를 출산했다는 내용을 담은 ‘가짜뉴스’다.
특히 다미가 실종된 뒤 승승장구하던 악인들을 대상으로 한 피의 복수가 시작되는 5·6회는 이 드라마의 압축판과 같다. 모바일 메신저 ‘티키타카’ 대표 매튜 리(엄기준·딸의 복수를 위해 전신 성형을 한 다미의 양부 이휘소)는 7명의 악인을 비롯해 가짜뉴스를 적극 유포한 시민을 포함한 33명을 섬으로 모아 다량의 마약을 먹게 한다. 마약으로 환각 상태에 빠진 이들 앞에는 오로라가 펼쳐지고, 유니콘이 날아다니고, 화려한 꽃이 핀 환상의 세계가 펼쳐지지만, 이 세계는 곧 지옥으로 변한다.
화려하지만 독을 품은 꽃에 화상 입고 죽거나, 흡혈박쥐와 멧돼지의 습격을 받고 죽는 사람들이 생기자 섬에 갇힌 이들은 각자도생하기 위해 서로를 공격하며 죽이기 시작한다. “우린 사람을 죽인 게 아니라, 스스로를 지켰을 뿐이야. 헛것이든 아니든! 싸울 수밖에 없었다고!”라고 항변하는 라희의 말처럼 이들의 눈에 보인 것은 사람이 아니다. 그저 무사히 늪지대를 건너기 위해 짓밟아야 하는 징검다리, 물리쳐야 하는 진흙 괴물일 뿐이다.
‘가짜뉴스’에 물든 탈진실 사회 배경
섬에 모인 33명이 가짜뉴스를 추종하며 누군가의 인생을 망가뜨리는 ‘추종자’라면, 권력과 재산을 이용해 게임처럼 가짜뉴스를 활용하는 K(6회가 방영된 현재 아직 정체가 밝혀지지 않았다)는 이 잔혹한 세계의 ‘설계자’를 상징한다. 비록 피해자이자 악인 7명을 단죄하는 선한 인물이지만 매튜 리도 가짜뉴스 유포의 통로가 되는 모바일 메신저 회사 대표라는 점에서 ‘설계자’에 가깝다. 그리고 33명에 들지는 않았으나 가짜뉴스를 소비한 군중은 ‘방조자’다. 이 드라마는 설계자와 추종자, 그리고 방조자 모두가 공범임을 일깨우며 진실보다는 가짜뉴스를 추종하고, 상대를 악(괴물)으로 상정해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탈진실 사회를 압축해 보여준다.
드라마는 내용 면에서뿐 아니라, 그 내용을 재현하는 방식을 통해서도 변화하는 사회상을 드러낸다. <아내의 유혹>에서 <황후의 품격>까지는 사적 복수를 통해 악행과 진실이 밝혀져 악인들이 합당한 대가를 치르는 것으로 마무리됐으나, <펜트하우스>부터는 악인들끼리 극단적 대립을 통한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이런 변화는 정의가 상실된 사회에서 분노를 축적하다가 극단적 형태로 표출하는 최근 몇 년간의 사회적 흐름과 궤를 같이한다. 즉, 드라마 속 악인들의 창궐은 극단적 사회적 스트레스와 절망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7인의 탈출>이 보여준 '죽을 맛'의 세계도 현재 사회의 거울과 같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재현이 과연 합당한가? 라는 질문을 해볼 필요가 있다.
이 드라마의 진짜 문제는 ‘순옥적 허용’으로 대표되는 무개연성과 잔혹성에 있지 않다. 인간의 욕망과 가짜뉴스에 물든 탈진실 사회를 보여주기 위해 꼭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어야 했을까? 청소년이나 여성을 향한 폭력이 여과 없이 재생되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런 찜찜한 질문들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채 악인들의 목소리와 잔혹성의 수위만 높아지는 게 문제다. 심지어 악인에게도 서사를 부여했던 작가는 이번 작품에서는 그마저 생략한다. 이 드라마가 비판하려 한 ‘누구 하나 도덕적 책임을 이야기하지 않는 각자도생의 세계’는 오히려 드라마의 정체성이 됐다. 괴물을 드러내기 위해 스스로 괴물이 된 탓에 그 괴물들만 압도적으로 보일 뿐이다.
왜 지상파 채널인 SBS일까
또한 이 드라마가 넷플릭스를 비롯한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플랫폼이 아닌,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지상파 채널 SBS에서 방영된다는 점도 우려할 만한 일이다. 인간 사회를 이해하게 하는 ‘서사’보다는 자극적인 ‘화면’을 경쟁적으로 전시하는 대중문화 콘텐츠의 경향은 이제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된 것일까? 이런 일차원적 직설화법의 세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김순옥 작가는 인간과 사회를 어떻게 이해하는 것일까? 재미와 의미가 발견되기보다는 불쾌하고 걱정스러운 질문만 맴돈다.
오수경 자유기고가·<드라마의 말들> 저자
Copyright © 한겨레2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