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병주의역사저널] 계조당 복원과 경복궁 동궁의 역사
근대사 아픔 딛고 본모습 되찾아
지난달 20일 5년여 만의 복원 공사를 마친 경복궁 계조당(繼照堂)이 마침내 공개됐다. 계조당은 경복궁 동쪽에 자리 잡은 세자의 거처인 동궁(東宮) 권역의 일부분으로, 세종이 세자인 문종(1414∼1452, 재위 1450∼1452)에게 정사를 맡겼던 역사에서 시작한다.
1443년 5월 ‘세종실록’은 “왕세자가 조회받을 집을 건춘문 안에다 짓고, 이름을 ‘계조당’이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세종이 문종의 대리청정(代理聽政: 왕을 대신하여 세자가 정사를 봄)을 지시하면서 세웠음을 알 수가 있다. 1444년 1월부터는 세자가 조회에 참석하도록 했으며, 1448년 8월 의정부에 교지를 내려 세자의 조회나 서연을 할 때 남향(南向)을 할 것을 지시했다. 세자가 남향을 하도록 한 것은 세자의 위상을 왕과 같이하도록 한 조치였다.
‘세종실록’에는 문종이 세자의 신분으로 여러 차례 조참(朝參)을 받은 기록이 보여, 본격적으로 정무에 참여했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 “동궁에 있을 때 날마다 서연을 열어서 강론함에 게으르지 않았으며, 동작을 한결같이 법도에 따라 했다. 즐거움과 노함을 나타내지 않고 성색(聲色)을 가까이하지 않으며, 항상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수양했다”는 기록에서도 모범적인 세자 시절을 보냈던 문종의 모습을 읽어 볼 수가 있다. 그러나 계조당은 문종의 유언으로 단종 때 철거됐다. 문종은 세자가 신하들의 조회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역사 속으로 사라졌던 계조당은 1868년 고종 때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되살아나게 됐다. 1868년 7월12일 ‘승정원일기’에는 “어의본궁(於義本宮)이 이번 장마를 겪은 뒤 무너진 곳이 많다고 한다. 영건도감으로 하여금 계조당 터에다가 옮겨 짓고 비석을 세워 사적을 기록하게 하라”는 기록이 보여, 계조당 복원에 어의궁 건물을 활용하였음을 볼 수 있다. 계조당은 1891년 다시 고쳐 지었는데, 고종은 계조당을 개건(改建)하면서 “동궁(순종)이 후일에 모훈(謨訓: 좋은 가르침)을 준수하여 아름다운 법전을 갖게 되기를 나는 깊이 바라는 바이다”라고 하여, 문종이 세종의 가르침을 준수한 전통이 고종에서 순종으로 이어지기 바란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1910년 국권이 침탈되면서 계조당은 수난의 길을 겪게 된다. 일제는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홍보하기 위해 1915년에 박람회인 조선물산공진회 행사를 준비하였고, 이 과정에서 계조당을 완전히 파괴했다.
근대사의 아픔을 딛고 110여년 만에 되살아난 계조당 권역은 본당과 의례에 필요한 월대(月臺: 건물에 넓게 설치한 대) 등으로 구성됐다. 주변부 행랑과 담장, 봉의문 등도 복원되어 이제 경복궁의 동궁 영역은 원래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경복궁의 중심축인 근정전과 사정전, 강녕전에서는 조금 벗어나 있어서 자주 찾지 않았던 동궁 권역. 계조당 복원을 계기로 이곳을 찾아 조선 왕실 세자들의 모습을 기억해 보기를 바란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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