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를 빛낸 伊 지식인들의 분투기

김용출 2023. 10. 6.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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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정치학 통찰 담아낸 마키아벨리
세계시민의 삶 추구한 페트라르카 등
예술가 중심 아닌 지성인 관점서 구성
말과 글을 통해 고세계 부활시키려 한
르네상스 본질에 초점 맞춰 교훈 모색

불안 속에서 피어난 지성의 향연/임병철/여문책/2만2000원

“페트라르카는 단테에게 의도적인 냉담이나 무관심 이상을 표현하지 않았다. 단테가 ‘선술집이나 저잣거리의 무지한 이들’에게나 어울릴 법한 저속한 언어를 구사한 통속 작가에 지나지 않고, 그렇기에 그의 책들은 한낱 ‘생선 가게의 포장지’로나 쓰일 수 있을 뿐이라고 냉소할 정도였다.”

라틴어로 쓰인 고전의 가치에 주목한 첫 번째 르네상스인 페트라르카는, 중세 세계관의 문학적 결정판으로 평가되던 단테의 ‘신곡’을 냉소했고 저속한 언어를 구사했던 단테를 비아냥거렸다. “라틴 전통에 기초한 새로운 문화의 선도자를 자임하던 페트라르카에게는 다른 무엇보다 단테가 고전에 무지한 구시대의 열등한 인물로 받아들여졌다는 점은 분명하다.”
고전을 통해서 미래를 열려 한 르네상스기 이탈리아 지식인들의 백가쟁명식 지적 쟁투기를 담아낸 책이 나왔다. 사진은 이 시기를 대표하는 마키아벨리, 페트라르카, 카스틸리오네, 피코의 모습(왼쪽부터). 출판사 제공
페트라르카는 그리하여 현실 정치에 뛰어든 능동적 시민의 전형이었던 단테와 달리, 마치 세파에 초연한 듯 아비뇽, 밀라노 등의 여러 도시를 오가며 ‘세계시민의 삶’을 추구한 방랑 지식인으로 살아갔다. 고독 속으로 침잠해 고전을 읽으면서 인간의 도덕성이 나락으로 떨어진 시대를 규탄하고 새 시대를 꿈꾸며. 역사가 야코프 부르크하르트가 ‘근대 유럽의 첫 아이’로 불렀던 르네상스인의 탄생이었다.

흑사병이 창궐하면서 기로에 놓이게 된 인간의 실존, 교황권과 황제권으로 대변되는 보편적 권력 질서의 붕괴와 정치사회적 혼란, 15세기 중반 콘스탄티노플의 함락과 기독교 세계의 도저한 불안…. 14세기 중반부터 15세기에 이르기까지 이탈리아를 비롯해 유럽 전역에 불어닥친 혼란과 불안은 바로 르네상스의 묘판이 됐다. 르네상스는 불안 속에서 처연히 피어난 꽃이었고, 라틴 고전을 통해서 미래를 설계한 ‘역설의 문화운동’이었다.

르네상스 연구자이자 한국교원대 역사학과 교수인 저자는 책에서 르네상스를 빛낸 이탈리아 지식인들의 백가쟁명식 지적 쟁투기를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풍성하게 담아냈다. 책을 읽고 나면 르네상스의 모습과 풍경이 막연히 근대의 서막을 연 한 시대가 아닌, 풍성하고 손에 잡힐 듯 입체감 있게 그려지는 것을 느낄지도.

책은 딱딱한 논문 형식이나 학술서 형식이 아닌, 르네상스의 아버지로 불리는 페트라르카부터 시작해 ‘연기자 같은 인간’이라는 관념을 빚어낸 ‘궁정인’ 카스틸리오네까지 이탈리아 르네상스 지식인 열전 형식으로 서술된다. 아울러 기존 미켈란젤로나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예술가 중심이 아니라 ‘말과 글을 통해 고세계를 부활시키려 한 지적 운동’인 르네상스의 본질에 초점을 맞춰서 지성인 중심으로 구성했다는 점도 눈에 띈다.

책에는 인간의 관점에서 변주된 새로운 창조 신화를 내놓으며 르네상스 인간학 혹은 철학적 인간학의 뼈대를 세운 피코나, 현대 정치학의 통찰을 담은 ‘군주론’을 쓴 비운의 정치사상가 마키아벨리 등 우리에게 익숙한 르네상스 지식인들만 있는 게 아니다. 우리에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르네상스 시대를 빛냈던 많은 지식인을 소환한다. ‘피렌체 시민사’를 써서 공화국의 역사를 예찬하고 공동체에 대한 시민의 기여와 덕성을 강조한 ‘피렌체의 리비우스’ 브루니, 로마의 옛 모습을 복원하고 기록하는 데 일생을 바친 비온도, 키케로주의자로서 고전에 기초한 청소년 교육을 강조한 베르제리오, 120여권을 저술하면서 15세기의 마키아벨리로 이름을 날린 데쳄브리오, 피렌체의 상인으로 ‘신이야말로 인간의 형상’이라고 주장한 마네티, 법률가의 위선을 벗겨낸 현실주의 정치인 스칼라….
임병철/여문책/2만2000원
이들 르네상스 지식인들은 과학적 형이상학적 앎의 문제에 천착하기보다는 인간의 삶과 사회 자체를 변화시켜서 시민들을 올바른 삶으로 이끌고자 했다. 즉 인간과 사회를 인간답게 개선하려는 것이 그들의 지향점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인간과 사회를 개선하기 위해 나름의 해결책을 제시했다. 사회와 공동체에 대한 다양한 정치사상적 논의, 인간 존재에 대한 본원적 질문, 역사의식의 성장이라는 세 방향으로. 르네상스인들은 저마다 말하는 인간 ‘호모 나란스’가 돼 인간의 삶과 공동체에 대해 다양하고 도전적인 담론을 쏟아냈다.

이들 르네상스 지식인의 이야기나 사고, 주장 가운데 지금 시대에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것들이 적지 않다. 예를 들면 르네상스가 꽃피는 데 가교 역할을 했던 살루타티는 패자인 키케로와 승자인 카이사르에 대한 기존 인식을 뒤집고 키케로야말로 공화국의 진정한 수호자이고 카이사르는 공화국의 반역자라며 인식의 대선회를 이끌어냈다.

“빛바랜 키케로의 편지들을 읽으면서 살루타티가 스토아주의 철학자가 아니라 정치가이자 시민으로서 낸 키케로의 목소리에 감화되었고, 결국 그 고대인이 대변하는 시민적 삶을 예찬하면서 카이사르를 공화국에 범죄를 저지른 독재자라고 비난하게 되었던 것이다.”

책에서 그려지는 르네상스의 모습은 무지몽매한 암흑의 중세를 끝내고 계몽의 빛을 비춘 출발점으로서 가장 역동적으로 화려한 시기로만 이해되지 않는다. 오히려 한편으론 모순적이고, 다른 한편으론 복잡다기한 사고실험의 흔적들이 쉽게 목격된다. 저자가 “긴장과 갈등”, “통일되지 못한 사고의 혼란”이야말로 르네상스답게 만드는 문화적 징후라고 주장한 이유다.

그런데 르네상스가 현대적 의미의 인문주의가 아니라면 르네상스와 르네상스인들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다시 말해 우리는 르네상스와 르네상스인들에게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 르네상스인들은 더 나은 삶을 꿈꾸며 인간과 사회의 개선이라는 주제를 사유의 화두로 던졌다. 이것이 그들이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탄 난쟁이가 될 수 있었던 이유다. 그럼으로써 설령 고대의 거인들에게 기대고 있었지만 난쟁이 르네상스인들은 그들의 어깨 위에서 그들보다 더 멀리, 더 많이 볼 수 있었다.”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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