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격랑 뒤 물거품 된 개인들[책과 삶]
쿄코와 쿄지
한정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482쪽 | 1만7000원
호주인 데이비드 셰이퍼는 소수 언어를 연구하는 학생이다. 단일어를 사용하는 국가들에 대해 조사하다 한국을 찾았다. 한국에선 ‘빨강’이나 ‘동무’ 같은 단어가 과거와는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었다. 셰이퍼는 어학원에서 영어 강사로 일하다 김옥희를 만났다. 김옥희의 동생은 죽었다. 하지만 김옥희는 동생을 과거형 시제로 말하지 않는다. “나에게는 동생이 있습니다.” 웅성대던 학생들은 누군가 “그날 도청 앞에서 네 동생을 본 사람이 있어”라고 외치자 일제히 침묵한다. 셰이퍼는 그 침묵이 당혹스럽다.
소설가 한정현의 등단작인 ‘아돌프와 알베르트의 언어’의 내용이다. 이 작품을 포함해 단편소설 열 편을 한정현이 <쿄코와 쿄지>에 묶어 냈다. 첫 번째 소설집에 실리지 않았던 등단작이 여기 두 번째에 실렸다.
한정현의 소설 주인공은 여성, 성소수자, 이주노동자이다. 이들은 한국전쟁, 제주 4·3 사건, 광주민주화운동, 부마민주항쟁,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 용산참사 등 한국 현대사의 비극적 사건들과 관련됐다. 한국의 거대한 역사가 개인 각자의 작은 역사 속에 들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역사에 , 국가에 지워진 개인들을 추모하는 시도로 보이기도 한다.
사상적 대결이 끝나지 않은 한국 사회에서 현대사를 소재로 삼은 소설 쓰기는 정치적으로 전투적인 길을 택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한정현의 태도는 차분하다. 역사·국가·사회의 금기 앞에서 침묵하는 한국인의 모습을 스스로 직면하기를 권하는 쪽이다. 그는 ‘작가의 말’에 이렇게 적었다. “적어도 역사를 사랑하는 입장에서 역사가에 대해 생각해보면 … 가치판단을 하는 자가 아니라 응시하는 자, 라는 말에 적극 동조한다. 그러니까, 응시. 침묵으로의 언어 찾기.”
허진무 기자 imagin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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