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객열전] 신데렐라가 된 '당구장 알바' 출신 한슬기

홍성완 기자 2023. 10. 6.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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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고로 일 병행하다 선수 생활 포기
버팀목인 남동생도 3부 리그서 활동 중
프로당구 선수 한슬기가 스포츠한국과의 인터뷰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혜영 기자 lhy@hankooki.com

[스포츠한국 홍성완 기자] 올해 LPBA는 실력을 갖춘 새내기 스타들이 진출해 주목을 끌고 있다. 아마추어 랭킹 1, 2위를 기록했던 한지은(에스와이)·장가연(휴온스) 선수가 대표적이다.

반면 프로당구 출범 시즌인 2019년에 데뷔한 한슬기(32·에스와이) 선수는 인지도가 낮은 무명 선수에 불과했다. 하지만 각고의 노력 끝에 올 시즌부터 두각을 나타내면서 강자로 떠올랐다.

한슬기가 신생팀 에스와이에 합류한 뒤 매서운 실력을 보여주자 그를 새내기 선수로 오해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한지은·장가연과 묶어 '슈퍼루키' 중 한 명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다.

당구장 아르바이트로 당구와 인연을 맺고 프로 진출 4년 만에 꿈에 그리던 팀 리그 소속 선수가 된 한슬기. 그래서일까. 소속 팀에 대한 그의 사랑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새로운 스타 탄생을 예고한 그를 경기도 고양시 일산 킨텍스(KINTEX) PBA 전용구장에서 만났다.

◆ 당구 매력에 빠진 중학생 소녀
    천안 지역 동호회에서 실력 다져

한슬기는 중학교 2학년 때 처음 당구를 접했다. 순수한 호기심에서 친구들과 당구를 배워볼 요량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당구에 완전히 매료됐다. 그래서 혼자 당구장을 들락거리다 결국 당구장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당구를 배우고 싶어서 당구장에서 알바를 시작했어요. 일하면서 손님들이 치는 걸 보면 좀 더 빨리 배울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 정도로 당구가 좋았어요. 이기든 지든 모든 결과가 스스로 설계를 해 풀어내는 과정이 매력적이었죠. 특히 그 과정을 통해 승리할 때 희열은 정말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어요."

기본기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던 한슬기는 당구 실력이 빠르게 늘지 않았다. 그러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남동생도 당구를 취미로 즐긴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됐다. 남매는 당구를 매개체로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며 빠른 성장의 기틀을 마련했다.

"저하고 동생하고 한 살 차이예요. 어느 날 제가 동생한테 '너 당구 칠 줄 알아?'라고 물어보니까 자기도 칠 줄 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4구 수지가 250점 정도 된다고 해서 놀랐어요. 특히 동생은 이미 3쿠션을 치고 있더라고요. 동생이 3쿠션을 배워보라고 해서 시작하게 된 거죠. 현재 챌린지리그에서 활약하고 있는 한규식 선수가 제 동생입니다. 결혼을 일찍 해서 아이를 키우느라 지금은 당구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지만 앞으로 분명히 더 잘할 거예요."

프로당구 선수 한슬기가 스포츠한국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혜영 기자 lhy@hankooki.com

그렇게 실력을 늘려가던 그는 선수층이 얇은 여자 당구계에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동생 덕분에 천안 지역 동호회에 가입한 것이다. 마침 그 동호회는 여성 회원들이 많은 편이어서 동호회 활동에 큰 도움이 됐다. 당구를 보다 체계적으로 배우고 연습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면서 본격적인 절차탁마의 과정이 시작됐다. 여러 당구장을 전전하면서 동생은 물론 회원들과 숱한 게임을 치르면서 실력을 쌓아 올렸다.

◆ 냉정한 '현실의 벽' 앞에 굴복
    큐 놓고 친언니와 천안서 장사

한슬기는 천안 지역에서 열리는 동호인 대회를 휩쓸기 시작했다. 개인 대회 우승까지 거머쥐면서 그녀는 좀 더 높은 꿈을 꾸기 시작한다. 본격적인 선수의 길을 밟기로 한 것이다. 자연스럽게 대한당구연맹 선수로 등록하고 본격적인 도전에 나섰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연맹 대회 상금만으로는 도저히 생활이 되질 않았다. 약 2~3년 동안 일과 선수 생활을 병행하다 보니 힘에 부치기 시작했다. 당구에만 집중하질 못하니 성적도 따라오지 않았다.

"20대 때 고민이 많았죠. 시합을 나가 입상을 해도 1등이 아니면 차비와 숙박비가 상금보다 더 많이 들어가는 상황이었어요. 지금은 저를 응원해 주시지만 당시만 해도 부모님이 제가 당구 선수를 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겨 집에 손을 벌릴 상황도 아니어서 닥치는 대로 이것저것 일을 할 수밖에요. 그러면 성적은 또 떨어지니 정말 견디기 힘들더라고요."

결국 그는 현실의 벽 앞에 굴복했다. 당구가 좋아서 선수를 꿈꿨고 오직 당구를 치기 위해 일을 병행했지만, 어느 순간 모든 것을 접어야 할 때임을 직감했다.

"어릴 때는 어떻게 그렇게까지 당구를 좋아했는지 저조차도 놀랄 정도였어요. 그랬기에 당구를 포기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정말 슬펐어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서 당구를 친 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죠."

한슬기는 당구를 포기하고 새로운 인생을 개척했다. 친언니와 함께 천안 집 앞에서 작은 가게를 시작했다. 그렇게 장사에 몰두하던 어느 날 프로당구가 출범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쉬움은 남았지만, 다시 당구를 시작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장사를 시작한 지 2년 후에 PBA가 생긴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때 잠시 '아! 좀 더 빨리 PBA가 생겼더라면…. 좀 더 버틸 걸 그랬나'라는 마음이 들었다가도 장사가 그럭저럭 잘 되는 편이어서 그냥 아쉬운 마음만 삼켰죠."

◆ 3년 공백기 무색...오픈대회 우승
    에스와이 지명받고 스타 발돋움

하지만 당구와의 인연은 쉽게 끊어지지 않았다. 당구로 맺어진 지인들이 계속 한슬기의 주변을 맴돌았다. 완전히 큐를 놓은 채 마음을 비운 상태가 되레 당구의 인연을 앞당기는 촉매제가 됐다.

"어느 날 갑자기 당구장 사장님 등 지인분들이 연락이 와서 '당구 치러 놀러 와'라고 연락이 오기 시작했어요. 가게를 열자 그분들이 매출도 올려주시고 하셨거든요. 그래서 보답도 할 겸 몇 번 당구장에 갔어요. 그런데 거의 3년 동안 쉬어서 공이 잘 안 맞을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너무 잘 맞는 거예요. 그러니까 재미가 확 붙기 시작하면서 헤어 나올 수가 없더라고요."

프로당구 선수 한슬기가 스포츠한국과의 인터뷰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혜영 기자 lhy@hankooki.com

그렇다고 선수로 복귀할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취미라고 여기면서 자주 당구장을 찾았을 뿐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연맹 선수와 동호인이 출전하는 오픈대회에 별생각 없이 참가했다가 덜컥 우승을 차지했다.

2019년 4월 '제1회 천안시장기 3쿠션오픈대회'였다. 이 대회 우승을 계기로 그는 선수 복귀를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사실 제가 우승했을 때 뒷말이 많았어요. 핸디가 높은데 점수를 낮춰서 참가했다는 오해였던 거죠. 오랜 공백기를 거쳤는데도 공이 너무 잘 맞아서 저도 당황스러웠어요. 그 대회 이후 핸디가 계속 올라가더라고요. 그래서 LPBA에 도전할 마음을 먹었죠."

하지만 프로의 세계는 녹록지 않았다. 첫 선발전 탈락 후 다행히 기회를 얻어 와일드카드로 LPBA에 출전할 수 있었다. 이후 선발전에 합격하면서 대회에 꾸준히 참가했지만, 눈에 띄는 성적이 나오질 않았다.

"아직 4강 이상 올라간 입상 기록이 없어요. 8강이 최고 성적인데 그것도 너무 힘들게 올라갔어요. 그래서 정말 고민이 많았거든요. 특히 서바이벌 경기에 적응하지 못해 다시 연맹으로 돌아갈 생각까지 할 정도였죠."

심각한 슬럼프가 계속 이어지면서 마음고생이 심해졌다. 그런데 해법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서 찾았다. 남동생이 해결책을 제시한 것이다.

"저를 안타깝게 지켜보던 동생이 '누나가 실력이 줄어들지 않았을 테니 다시 큐를 바꿔 봐'라고 하더라고요. 1년 전부터 후원을 받아 새 큐를 사용하던 중이었거든요. 그래서 예전에 쓰던 큐로 바꿨더니 거짓말처럼 공이 잘 맞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8강까지 올라갔죠."

처음으로 후원을 받다 보니 심리적으로 부담감이 컸던 탓이 아닌가 싶었다. 성적이 부진해지자 마침 큐 제작사의 후원도 끊어진 상황이어서 예전 큐를 사용하는 데 부담이 없었고 결국 큐 교체가 '신의 한 수'가 된 것이다.

프로당구 선수 한슬기가 스포츠한국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혜영 기자 lhy@hankooki.com

슬럼프를 극복한 한슬기는 지난 1월 NH농협카드 LPBA 챔피언십 16강전에서 우승 후보 김민아(NH농협카드) 선수를 꺾는 이변을 일으키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 여세를 몰아 에스와이 그룹이 창단한 '바자르' 팀 소속으로 지명을 받았다.

에스와이는 올해 2차 팀 리그에서 창단 3개월 만에 우승을 차지하며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한슬기는 주로 남녀 복식 경기에서 이영훈 선수와 환상의 호흡을 보여주며 역할을 충실히 이행했다.

"처음에 팀에 들어올 때 너무 좋았어요.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더라고요. 저 때문에 괜히 손해를 끼칠까 봐 부담스러웠던 거죠. 또 사람들하고 성격이 안 맞을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막상 팀에 들어오니까 단장님, 팀장님, 구단주님 등이 다들 너무 잘해 주셨어요. 맛있는 것도 많이 사 주시고 연패할 때도 우승값 치르는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부담을 주지 않았죠. 정말 감사할 뿐입니다."

동갑내기 친구 이영훈이 복식 파트너라는 점도 한슬기에게는 호재로 작용했다. 팀 리그를 처음 치르는 그로서는 친구 이영훈 덕분에 그나마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다.

"영훈이가 여러 가지로 많이 도와줬고 캡틴(황득희)의 세심한 배려 덕분에 자신감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다니엘 산체스를 통해서는 기술적인 부분 외에도 당구를 대하는 자세나 마음가짐 등 정신적인 부분을 많이 배우고 있고요. 분위기 메이커인 인수(박인수) 오빠, 동생들이지만 항상 먼저 챙겨주고 제가 많이 의지하는 지은(한지은)이와 우경이(이우경)에게도 고맙다는 말 전하고 싶습니다."

한슬기는 과거 당구로 인연을 맺었던 동호회와 지인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과 미안한 심정도 토로했다. 성숙하지 못했던 자신의 부족한 점이 혹여 상처를 준 것은 아닌지 후회가 된다고 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천안에서 저와 당구를 같이 치시던 분들이 많이 응원해 주시는데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리고 한편으로 너무 죄송한 마음도 들어요. 제가 한때 정말 까칠했었거든요. 철없는 마음에 여러분한테 불편하게 했던 것 같아요. 처음 연맹에 등록하고 선수 생활을 시작하면서 마음가짐을 다르게 먹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때 동호회 회원들에게 너무 죄송했다고 꼭 전하고 싶어요." 

프로당구 선수 한슬기가 스포츠한국과의 인터뷰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혜영 기자 lhy@hankooki.com

 

스포츠한국 홍성완 기자 seongwan626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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