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체가 남긴 시그널…죽음에도 공식 있다
갓난아기부터 노인 최후까지
인생단계별 죽음의 풍경 탐구
바뀐 윤리관에 성도착 사망 늘고
20·30대 죽는 이유 13%가 음주
시신에 사회 모습 그대로 담겨
텐트 속엔 죽은 소녀가 잠에 빠진 듯 누워 있었다. 소녀 옆에 놓인 숯이 담긴 쟁반, 성행위 징표는 없었다. 16세 소녀의 사인은 일산화탄소 중독. 소녀와 동행했던 17세 소년은 텐트 안에 없었다.
신작 '죽음을 해부하는 의사'의 저자는 저 소녀의 마지막 순간을 '해부'하기 시작한다. 영국 법의학자인 저자가 스무 건이 넘는 범죄와 살인현장의 시체에서 죽음과 삶을 사유한 책이다. 그는 쓴다. '주검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죽음은 삶의 인과(因果)로 연결된 무엇이다.'
다시, 소녀의 텐트로 가보자. 경찰차, 추적견, 과학수사팀, 기자들이 몰려온 텐트 밖이 어지럽다. 사실 처음에 경찰은 소년이 소녀를 살해한 뒤 도주했다고 의심했다. 타들어가는 숯에서 발생한 일산화탄소가 소녀의 후두부로 들어가면서 죽음이 완성됐을 것이다.
캠핑장 뒤 숲에서 소년이 추락사한 채 발견되자, 경찰은 '살인 후 자살'이란 가설을 세운다. 혼자 그곳까지 가서 떨어져 죽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소년과 소녀는 애인 사이였다. 친구들에게 탐문한 결과 두 10대는 임신을 의심했다. 이제 소녀와 소년의 주검이 가설의 진의를 확인시켜줄 유일한 단서다.
소녀의 자궁, 소년의 전립선을 저자는 세포 하나까지 꿰뚫어본다. 소녀의 자궁엔 임신 징후가 없었고, 소년의 요도에서 정자는 나오지 않았다. 즉, 임신은 없었고 그날 성행위도 없었다는 얘기다. 그런데 새로 나온 흥미로운 사실. 소년의 일산화탄소 수치가 29%로 나왔다. 포화도는 소녀보다 낮았지만 함께 일산화탄소에 노출됐다는 의미였다. 산소가 부족해진 소년은 절벽으로 가 공기를 들이마셨고, 어떤 이유로 떨어져 죽었다는 신빙성 높은 가설이 세워진다. 저자는 두 10대의 죽음에서 매캐한 누명을 한 꺼풀씩 벗겨낸다.
시선을 돌려 또 다른 범죄 현장. 부검실 시체 안치대 시트 안에 칼에 여러 번 찔린 40대 여성이 누워 있었다. 배우자의 불륜을 확신한 남편은 새벽 6시에 아내를 깨웠다. 소매 안에서 부엌칼을 꺼내 자신의 배에 댄 남편은 "당신 없이 살 순 없다"고 아내에게 애원했다. 아내가 그 순간에도 "내 탓 하지 마!"라고 소리치자 남편은 아내의 배에 칼을 '1회' 집어넣는다. 그리고 자신의 배도 찌른 뒤 기억을 잃었다. 깨어나 보니 아내만 사망했다.
단 한 번 찔렀다고 항변하는 남편의 기억과 달리 아내 몸엔 목에 하나, 가슴에 셋, 다리에 둘, 팔은 일곱 군데가 찔려 있었다. 저자는 죽음 앞에서 그들이 한때 서로를 아꼈을 '처음'을 생각한다. 이런 결혼생활의 끝을 남편은 상상이나 했을까. 저자는 험난한 중년의 결혼생활이 심심치 않게 살해 욕망으로 이어진다고 써내려간다.
대체의학에 빠진 부모가 낳은 갓난아기의 죽음, 한쪽 노인이 배우자에게 의존하다 죽은 사례까지 저자는 사유한다. 인생의 단계별로 전시된 죽음의 풍경이다. 저자에 따르면, 죽음에는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공식이 있다. 세상엔 부모가 동시에 죽는 일은 드물지만 생각만큼 드물지도 않다. 윤리·종교적 문제에서 자유로워진 사람이 많아지면서 성도착(페티시)에 의한 죽음도 흔해졌다. 20·30대 죽음 중 13.5%의 원인은 술 때문이다. 부검대 위의 시신들은 결국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책은 셰익스피어의 문장을 가져와 삶과 죽음을 사유한다. 셰익스피어 작품 '뜻대로 하세요' 2막 7장을 보면 세상은 하나의 무대요, 남녀는 배우다. 연극이 그렇듯이 무대 위 배우는 등장도 하고 퇴장도 한다. 유모 품에 안겨 삶을 시작해 달팽이처럼 마지못해 학교에 갔다가 용광로처럼 한숨을 내쉬며 애인을 찬미하고, 걸핏하면 싸우고 물거품 같은 명성도 좇다가 결국 슬리퍼를 질질 끄는 빼빼 마른 노인이 된다.
인간은 그 과정에서, 수많은 죽음을 마주한다. 말을 잃은 고인들의 시신 앞에 선 저자는 이처럼 죽음이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는 명징한 사실을 들려준다. 또 부산하고 소란스러운 날들 속에서도 늘 마지막 순간을 기억하자고 말한다. 책을 읽다 보면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사색하게 된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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