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혐의 검찰 소명 부족했다
범죄 피의자의 구속영장 발부 여부는 수사 과정에서 큰 주목을 받는다. 특히 정치인 등 거물급 인사가 피의자여서 여론의 관심이 집중된 사건에서는 더욱 그렇다. 현행 구속영장제도는 법원이 발부나 기각 가운데 하나만 결정해야 한다. 구속과 불구속의 차이는 극명하다. 피의자가 구속되면 변호인 접견 및 유리한 증거 수집 활동 등이 제한된다. 방어권 행사에 상당한 차질이 불가피한 것이다. 사회경제적 활동도 불가능하다.
구속된 피의자는 본안 재판이 시작되기 전부터 유죄인 것처럼 비치기도 한다. 이 때문에 피의자의 반박은 ‘변명’으로 치부되거나 아예 묻히는 사례가 많다. ‘무죄 추정’ 원칙이 무색해지는 셈이다. 수사기관이 영장 발부 여부를 수사 성패를 판가름하는 기준으로 여기며 영장 발부에 사활을 거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이런 이유 등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피의자의 구속영장 발부 여부가 유무죄를 뜻하는 건 아니다. 구속영장이 기각됐더라도 재판에서 유죄가 선고될 수 있다. 구속 상태로 기소됐으나 법원에서 최종 무죄 판결이 나올 때도 있다. 더욱이 한국 형사소송법은 ‘불구속 수사’를 원칙으로 규정한다.
그럼에도 특히 수사기관과 피의자의 입장이 팽팽히 맞서는 사건에서 법원의 영장실질심사(구속 전 피의자 심문) 결과는 각별한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검찰의 수사 내용과 피의자의 반박을 두고 제3자(법원)의 일차적 판단이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구속영장 단계에서도 이런 양상이 나타났다.
‘범죄 중대성’은 독자적 구속 사유 아냐
제1야당 대표가 구속영장 심사를 받은 건 초유의 일이다. 서울중앙지검 반부패수사1부는 지난 9월 18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구속영장을 법원에 청구했다. 영장 청구서에는 3개 사건과 관련한 혐의가 담겼다. 경기 성남 백현동 개발사업 과정에서 민간 사업자에게 특혜를 제공하면서 성남도시개발공사에 약 200억원의 손해를 끼친 혐의(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 북한에 지급할 방북비용 등 총 800만달러를 쌍방울그룹이 대납토록 한 혐의(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 등)가 있다. 또 ‘검사 사칭’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의 재판 과정에서 증인에게 거짓 증언을 하도록 한 혐의(위증교사)도 포함됐다.
검찰이 영장실질심사에 투입한 검사는 10여명에 이른다. 또 1500쪽 분량의 의견서를 법원에 제출했고, 500쪽 분량의 파워포인트(PPT) 자료까지 준비했다. 검찰은 사안의 중대성과 증거인멸 우려 등을 강조하며 구속 필요성을 주장했다.
우선 형사소송법 제70조와 제201조 등에 명시된 구속 사유를 보면, 기본적으로 ‘죄를 범했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 있어야 한다. 혐의가 최소한 ‘소명’돼야 한다는 얘기다. 소명은 본안 재판에서 유죄가 나올 정도의 ‘입증’보다 낮은 수준의 증명이다. 혐의 내용에 어느 정도 개연성은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1997년 영장실질심사제도 도입 이후 법원이 혐의 소명 여부와 관련해 어떤 판단을 내놓을지가 주요 관심사로 부각됐다. 혐의가 소명된다는 판단이 나오면, 검찰의 수사가 일견 정당하다는 평가를 받게 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혐의 소명조차 부족하다고 하면, ‘무리한 수사’ 혹은 ‘부실 수사’라는 비판이 일면서 피의자의 주장이 힘을 받는 양상이 펼쳐지게 된다.
혐의가 소명된다는 것을 전제로 ‘증거인멸 염려’나 ‘도망 염려’ 등의 요건도 충족돼야 구속영장이 발부된다. 검찰이 이번에 주장한 ‘범죄의 중대성’은 독자적인 구속 사유는 아니다. 증거인멸 염려 등 구속 요건을 판단할 때 ‘고려해야 할 요소’ 중 하나에 해당한다. 보통 범죄의 중대성은 증거인멸이나 도주의 우려와 연결된다. 범죄가 중대하면 높은 형량이 선고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피의자가 중형 선고를 피하기 위해 증거인멸 등을 행할 수 있다고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검찰 “사법에 정치적 고려”
법원은 그러나 이 대표의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유창훈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지난 9월 27일 “피의자의 방어권 보장 필요성 정도와 증거인멸 염려의 정도 등을 종합하면, 불구속 수사 원칙을 배제할 정도로 구속의 사유와 필요성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이유를 밝혔다. 핵심 쟁점인 ‘혐의 소명’과 ‘증거인멸 염려’ 모두 이 대표를 구속하기엔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백현동 개발사업과 대북송금 등 2개 사건은 혐의 소명 단계부터 막혔다. 유창훈 부장판사는 백현동 개발사업 사건을 두고 “피의자가 관여했다고 볼 만한 상당한 의심이 들기는 한다”라면서도 “사실관계 내지 법리적 측면에서 반박하는 피의자의 방어권이 배척될 정도에 이른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특히 이 대표가 관여했다는 ‘직접 증거’가 부족하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대북송금 사건을 놓고는 “피의자의 인식이나 공모 여부, 관여 정도 등에 관해 다툼의 여지가 있다고 보인다”고 했다.
위증교사 사건은 혐의가 소명된다고 봤다. 구속의 전제 요건은 인정된 것이다. 그러나 검찰이 현재까지 확보한 인적·물적 자료에 비춰 보면 이 대표가 증거를 인멸할 우려는 없다고 판단했다. 검찰이 이미 충분한 자료와 진술 등을 확보했기 때문에 이 대표가 인멸할 증거 자체가 별로 없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백현동 개발사업의 증거인멸 우려 부분도 같은 취지로 증거인멸 우려가 없다고 봤다.
대북송금 사건의 핵심 관련자인 이화영 전 경기도 평화부지사(구속 기소)가 진술을 번복한 것을 두고 이 대표의 주변 인물이 부적절하게 개입한 정황은 있다고 봤다. 앞서 지난 6월 이 전 부지사는 이 대표에게 대북송금을 보고했다는 취지로 검찰에 진술했으나, 이후 언론에 공개한 자술서에서 그런 사실이 없다고 입장을 바꿨다. 유 부장판사는 다만 이 대표가 진술 번복에 직접 개입했다고 단정할 만한 자료가 부족하다고 했다. 아울러 이 대표가 다른 사건으로 기소돼 재판에 출석하고 있는 점, 정당의 현직 대표로서 공적 감시와 비판의 대상인 점 등을 감안할 때 증거인멸의 염려가 없다고 결론냈다.
검찰은 구속영장이 기각되자 “납득하기 어렵고 매우 유감”이라고 반발했다. 검찰 관계자는 “단지 정당 대표라는 신분 때문에 증거인멸이 없다고 적시하는 건 사법에 정치적 고려가 있던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다”라며 법원이 정치적 판단을 내렸다는 주장을 우회적으로 나타내기도 했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과 이원석 검찰총장까지 나서 “이 대표에게 죄가 없다는 내용이 아니다” 등의 발언을 내놓았다.
검찰은 이 대표의 구속영장을 재청구할지, 불구속으로 기소할지 등을 검토 중이다. 다만 구속영장을 재청구했다가 다시 기각되면 지금보다 더 큰 역풍을 맞을 수 있다. 이에 따라 불구속 기소하는 방안에 무게가 실린다.
이 대표는 이밖에도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과 대장동·위례 개발 비리, 성남FC 후원금 사건으로 기소돼 재판을 받는 중이다. 향후 추가로 기소가 되면 매주 2~3차례 재판에 출석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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