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250년 전 그려진 《산해관도》, 10년 전 중국의 산해관 복원 때 결정적 역할
명지-LG한국학자료관, 중국 정부가 중요 문화유산인 산해관 복원 난항 겪자 《산해관도》 사진 전송
(시사저널=오종탁 기자)
'K역사'의 보물창고, 명지-LG한국학자료관 최초 공개
한국 문화 위상 다지기 30년…1950년 이전 만들어진 한국학 자료 2만여 점 소장
'中 관문' 산해관도, 1936 올림픽 백서, 이토 히로부미·이완용 시첩 등 귀중본 상당수
우리나라가 지금처럼 전 세계의 주목을 받은 적이 있었을까. 한국 영화와 드라마, 음악 등 'K컬처'로 시작해 다른 분야까지 거세게 퍼져 나가는 한류 열풍은 한국인들마저 어안이 벙벙하게 한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이 때문에 역사, 사회, 문화, 정치, 경제, 지리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며 한국을 파악하는 한국학 연구를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우리 고유의 정체성을 해외에 체계적으로 전달해 국가 경쟁력을 높이고 고부가가치도 창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학 연구 강화에 대한 시민의식을 환기하기 위해 명지-LG한국학자료관(구 명지대-LG연암문고)이 설립 30여 년 만에 최초로 시설 내부와 주요 소장 자료를 대외에 온전히 공개했다. 명지-LG한국학자료관은 1995년 만들어진 후 묵묵히 한국학 연구의 핵심 밑천을 제공해 왔다. 1950년 이전에 발간된 한국학 관련 학술 자료 2만여 점이 여기에서 숨 쉬고 있다. 서양(1만여 권)과 일본·중국(4000여 권)에서 쓰인 책이 자료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고지도, 이미지·영상 기록 등도 다수 소장했다. '1950년 이전 자료'라는 기준을 정한 건 1950년 이후 등장한 서양발(發) 한국학 자료가 대부분 6·25 전쟁을 다룬 내용이어서다.
1995년 설립 이후 언론에 전면 공개는 처음
9월19일 오후 찾은 서울 서대문구의 명지대 인문캠퍼스 도서관은 학생들로 북적였다. 하지만 일반 학부·대학원생은 도서관 2층에 있는 명지-LG한국학자료관에 출입할 수 없다. 자료관은 까다로운 심사를 거쳐 선별된 연구자에 한해 자료 열람을 허가하고 있다. 도서관 관계자의 안내를 받아 자료관에 들어서자마자 탄성이 절로 나왔다. 고풍스러움과 세련미가 조화를 이루는 널찍한 공간에서 고서들이 숙성된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문득 다른 차원의 세계로 넘어온 듯한 착각이 일었다.
LG그룹의 지원을 받아 명지-LG한국학자료관을 세우고 자료 수집을 진두지휘한 유영구 한국관계고서찾기운동본부 운영위원장(전 명지학원 이사장)은 "자료관에 소장된 한국학 자료 중에는 다른 기관에 존재하지 않는 유일본이 많고, 일부는 이제껏 학계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라면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높아 미국 하버드대 하버드-옌징(燕京)도서관(아시아 관련 자료 소장 도서관)에서 협업을 제안해온 적도 있다"고 말했다. 김영석 명지대 도서관장 겸 명지-LG한국학자료관장은 "국내에서 한국학에 관한 전문 도서관을 운영하는 대학은 명지대가 유일하다"며 "세계가 (1950년 이전의) 한국을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역사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서양 고서를 대거 보유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큰 의의를 지닌다"고 강조했다.
中, 산해관 기록 없어 복원 어려움…《산해관도》로 해소
"본격적으로 서양 고서들을 소개하기 전에 보여드릴 게 있습니다." 유영구 위원장이 명지-LG한국학자료관 한편에 놓인 넓은 탁자로 향했다. 탁자 위에는 하얀색 포장재로 싸인 소장 자료가 놓여 있었다. 유 위원장이 장갑을 끼고 포장재를 벗겨내자 2020년 12월 보물 제2084호로 지정된 《경진년 연행도첩(庚辰年 燕行圖帖)》(1761년 제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경진년 연행도첩》은 경진년인 1760년 11월2일 한양에서 청나라 베이징(北京)으로 출발해 이듬해인 1761년 4월6일 한양으로 돌아온 동지사행(冬至使行)의 결과를 영조(1694∼1776)가 열람할 수 있도록 제작한 화첩이다.
이 화첩은 드라마틱한 삶을 살다간 소현세자(1612~1645)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는 데서도 화제를 모으기에 충분하다. 소현세자는 지난해 11월 개봉한 영화 《올빼미》에 이어 최근 글로벌 인기몰이 중인 MBC 드라마 《연인》에서 중심인물로 다뤄지며 대중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다. 《경진년 연행도첩》에는 사행단을 이끈 홍계희(1703∼1771)가 쓴 발문이 포함됐는데, 영조가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후 효종, 1619~1659) 형제가 8년간 볼모로 잡혀 있었던 청나라의 심양관 터를 자세히 살피라는 명을 내렸다는 내용이었다. 심양관 옛터(《심관구지도》)와 중국으로 가는 관문인 산해관 일대(《산해관도》 내·외)를 그린 그림, 건물 안 위패 위치를 글자로 나타낸 배반도(排班圖), 영조의 어필(御筆) 등도 화첩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문화재청은 《경진년 연행도첩》의 보물 지정 이유에 대해 "제작 목적과 시기가 분명하고 화첩 구성이 사행의 일체를 이해할 수 있게 의도된 데다 입체감이 두드러진 18세기 중반 궁중 회화의 면모를 살필 수 있어 미술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하다"며 "당시 시대상과 정치, 외교, 문화 등의 양상을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시각 자료"라고 평가했다. 실제로 《심관구지도》와 《산해관도》의 그림체는 종이를 뚫고 나올 듯 생생하고 정교하다. 명도와 채도가 높은 옥색 등 품격 있는 채색도 돋보인다. 1996년 《경진년 연행도첩》을 입수한 명지-LG한국학자료관은 이 자료를 바탕으로 10여 년 전 산해관 복원을 추진하던 중국 정부에 자문해 주기도 했다. 유영구 위원장은 "중국 정부가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우리나라의 국보에 해당)인 산해관을 복원하려고 애썼으나 원래 상태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한동안 난항을 겪었다"면서 "그 소식을 듣고 우리 자료관이 소장한 《산해관도》를 사진에 담아 보내줬고, 그제야 복원이 신속하고 순조롭게 이뤄질 수 있었다"고 전했다. 중국 역사에서 사라진 퍼즐 조각을 250여 년 전 정확히 그려진 우리 그림이 대체해준 셈이다.
서양인 선교사 샬과 프로이스 눈에 비친 조선
명지-LG한국학자료관이 소장한 독일인 가톨릭 선교사 겸 천문학자 아담 샬(1591~1666)의 《중국선교의 역사》(1665년 출간)는 소현세자에 대한 후대의 인식을 뒤바꿔 놓은 기록이다. 특히 소현세자를 '만개하지 못한 채 져버린 개화 사상가'로 읽는 문화 콘텐츠들에 영감의 원천이 됐다. 아담 샬은 청나라에서 소현세자와 만난 경험을 《중국선교의 역사》에 담았다. 책에서 아담 샬은 소현세자가 자신을 자주 찾아왔고, 때때로 역법을 관장하는 신하들을 대동했다고 밝혔다. 이는 소현세자가 유럽의 천문학을 배워 조국에 전파하기 위함이었다고 아담 샬은 설명했다. 아담 샬은 소현세자가 기독교 신앙을 가지도록 전도에도 힘썼다고 했다. 책에 따르면 소현세자는 결국 천문학과 기독교 모두에 심취하게 됐다. 그러고는 본국으로 돌아간 지 고작 두 달 만에 비극적이고 석연찮은 죽음을 맞는다. 소현세자가 청나라에서 서양인 선교사를 만났고, 그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심양일기》 등 정사(正史)에선 전혀 찾아볼 수 없다.
포르투갈인 가톨릭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1532~1597)가 일본에서 활동하며 펴낸 《감바쿠도노의 죽음》도 임진왜란(1592~1598)을 좀 더 객관적이고 입체적으로 해석할 수 있게 해줬다. 이 책이 쓰인 때는 임진왜란기 한가운데인 1595년이다. 그로부터 3년 후 나온 이탈리아어 번역본이 명지-LG한국학자료관에 보관돼 있다. 《감바쿠도노의 죽음》에서 루이스 프로이스는 '꼬라이'(조선)에서의 전쟁이 소강상태에 있음을 언급하면서 일본 권력 핵심부에서 벌어지는 일을 상세히 기술했다.
감바쿠(간파쿠)도노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1536~1598)의 조카이자 양자 겸 상속자였던 도요토미 히데쓰구(1568~1595)를 지칭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50대에 얻은 첫아들이 2년 남짓 살다가 1591년 죽자 누나의 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쓰구를 덴노(天皇)의 고문 격인 간파쿠(關白)직에 취임시켜 일본 국내를 지배하게 하고, 자신은 다이코(太閤)가 되어 조선 침략을 진두지휘한다. 그러나 2년 후 둘째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1593~1615)가 태어나자마자 상황이 급변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쿠데타 음모를 씌워 도요토미 히데쓰구를 유배 보내고 1595년에는 할복자살을 명령했다. 루이스 프로이스가 도요토미 히데쓰구 사망 사건을 책으로 다루며 진정으로 조명하고자 한 것은 비정함과 야만성을 기반으로 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치적 야욕이다. 사리사욕으로 가득 찬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시작된 임진왜란에 명분이 있을 리 만무하다는 '서브 텍스트'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운 우리 선조들 모습과 오버랩되며 처연한 감정이 들게 한다.
루이스 프로이스는 다른 저서 《일본사》(1593년편)를 통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어떻게 조선 정복을 결심하게 됐는지와 부산성 전투부터 평양 입성까지의 임진왜란 진행 상황을 상세히 기술했다. 그는 '내륙에서는 꼬라이 병사들이 패배를 거듭하지만, 바다에선 수군이 견고하고 불을 뿜는 전함(거북선)을 갖고서 일본 수군을 격파하고 있다'고 적었다. '조선 사람들은 피부가 희고 활기차며 대식가이고 힘이 아주 좋다. 그들이 만든 공작품은 정교하고 아름다워서 그들이 솜씨가 좋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조선이 중국에 공물을 바치고 있음에도 중국인들은 조선인들을 두려워한다'는 기록은 조선이란 나라와 우리 민족의 특질을 새로운 관점에서 곱씹게 한다.
돋보기로 확인한 손기정·남승룡 시상식 현장
예스러운 고서들을 살펴보다가 색다른 자료가 눈에 들어왔다. 파랑·노랑·검정·초록·빨강 동그라미. 그랬다, 올림픽 관련 자료였다. 《1936 베를린 올림픽 백서》는 제목 그대로 1936년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올림픽이 끝난 후 관련 기록과 사진을 정리한 보고서다. 나치스의 우월성을 세계에 널리 선전하기 위해 철저히 올림픽을 준비하고 운영했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1889~1945)는 백서도 완벽에 가깝게 작성토록 했다.
기록을 훑다가 드디어 '마라톤라우프(Marathonlauf·마라톤 달리기)'란 단어를 발견했다. 올림픽의 꽃이라 불리는 마라톤에서 우리나라의 손기정 선수(1912~2002)가 2시간29분19초라는 세계신기록으로 우승했고, 역시 우리 선수인 남승룡(1912~2001)도 3위(2시간31분42초)로 메달권에 당당히 올랐음이 분명히 명시됐다. 일제강점기였기에 손기정과 남승룡은 일본 국적으로 대회에 출전할 수밖에 없었다.
이 백서에 포함된 밀착인화 사진과 이를 보기 위한 돋보기는 나치스의 철두철미함을 방증한다. 밀착인화는 필름을 확대하지 않고 인화지에 밀착해 원래의 크기 그대로 인화하는 기법이다. 당시 기술로는 보고서 지면에 사진을 삽입하기 어려워 이런 수단을 쓴 것이라고 명지-LG한국학자료관 측은 설명했다. 돋보기로 마라톤 종목 시상식 사진을 들여다봤다. 순식간에 87년 전 역사의 현장으로 빨려 들어갔다. 베를린 올림픽 스타디움에 운집한 11만 관중이 우레와 같은 함성을 쏟아낸다. 찬사와 대비되는 슬픔이 본능적으로 느껴진다. 손기정과 남승룡, 나라 잃은 두 청년의 표정은 참담함 그 자체다. 손기정은 로부르참나무 묘목을 가슴 앞으로 두고 남승룡은 바지를 명치까지 끌어올리는 등 일장기 가리기에도 필사적이다. 우승자가 아니라서 평생 이름 없는 영웅으로 살아야 했던 남승룡은 금메달을 딴 손기정을 내내 부러워했다. 메달 색깔 때문이 아니었다. 우승 부상인 묘목으로 일장기를 더 잘 가릴 수 있어서였다.
모습 드러낸 《함녕전 시첩》…고종의 진심은?
'그때, 나라가 넘어가지 않았더라면' 하는 안타까움은 《함녕전 시첩》을 보고 더욱 짙어졌다. 《함녕전 시첩》은 한일합병 1년여 전인 1909년 7월9일 대한제국 고종황제(1852~1919)가 덕수궁 함녕전에서 일본으로 돌아가는 초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1841~1909)의 송별 연회를 베푼 자리에서 이토 히로부미, 궁내부대신 비서관 모리 오노리, 후임 통감 소네 아라스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등이 1구씩 지은 칠언절구와 후에 내부대신 박제순, 법부대신 고영희, 농상공부대신 조중응, 궁내부대신 민병석 등 이완용에 필적하는 친일파들이 쓴 시를 붙여 만든 것이다. 시첩의 길이는 7m에 이른다. 작은 오동나무 상자에서 두루마리 형태의 시첩을 꺼내 펼쳐 나가자 처연한 그날의 풍경이 간접적으로 느껴졌다.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이토 히로부미가 "마침내 단비 내려 만인을 적시니(甘雨初來霑萬人·감우초래점만인)"라 시작하고 뒤이어 모리 오노리가 "함녕전 위 이슬빛이 새롭네(咸寧殿上露華新·함녕전상로화신)", 소네 아라스케가 "부상(일본)과 근역(조선)을 어찌 다르다 하리오(扶桑槿域何論態·부상근역하론태)", 이완용이 "두 땅이 한 집안이 되니 온 천하가 봄이로다(양지일가천하춘·兩地一家天下春)"라고 썼다. 일제는 1935년 덕수궁 정관헌 옆 뜰에 네 사람의 시를 새긴 비석을 세웠다. 앞서 시첩은 1913년 이왕직(일제강점기 조선 왕실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던 기구) 차관 고미야 미호마스 손에 들어갔다. 일제가 데라우치 마사타케 당시 총독이 쓴 발문과 고종황제의 글을 추가해 고미야 미호마스에게 하사한 것으로 보인다.
고종황제가 1909년 함녕전 연회에서 내린 운(韻)인 '인(人)' '신(新)' '춘(春)'은 당나라 시인 두목의 시 《제도화부인묘》에서 차운(다른 이의 시운을 빌림)한 것으로 해석된다. 도화부인은 춘추전국시대 식나라의 왕비 도화부인이 정복자인 초나라 문왕에게 끌려가 애첩이 된 비극을 다룬 시다. 고종황제가 4년 후 시첩에 관한 글까지 남겼다는 사실은 명지-LG한국학자료관이 처음 밝혀냈다. 임금이 이름은 쓰지 않고 인장만 찍어놓아서다. 고종황제는 "춘무 공작(이토 히로부미)의 유묵을 소궁 차관(고미야 미호마스)에게 내리어 동감의 뜻을 표한다"고 적었다. 글 속 '동감지의(同感之意)'라는 표현은 그가 띄웠던 운(인, 신, 춘) 못지않게 알쏭달쏭하다. 한일합병 전후 고종황제의 알 수 없는 속마음처럼 말이다.
한편 명지-LG한국학자료관은 한반도가 그려진 고지도도 지속적으로 수집하고 있다. 고지도에는 제작 시기의 세계관이 담겨 있어 당시 세계가 한국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알기에 용이하기 때문이다. 유영구 위원장은 "조선 말기에 서양에서 제작된 세계지도에서 한반도를 찾아보면 세부 지명 표기가 중국식, 일본식, 서양식 등으로 제각각이다. 우리가 국경을 닫고 외부 세계에 무지한 와중에 서양 강대국들은 한반도에 대해 인지하면서 눈독을 들였다는 것을 알려준다"며 "일반 지도가 (지리를 알기 위해) '보는' 지도라면 고지도는 역사적 맥락과 교훈을 ‛읽어내야 하는' 지도다. 고문서와 함께 고지도 수집과 분석에도 박차를 가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 "이제 충분한 사료 바탕으로 '우리'에 대해 공부할 때"
명지-LG한국학자료관 만들고 이끌어온 유영구 위원장
명지대는 광복 50주년을 1년 앞둔 1994년 한국학 관련 학술 자료 찾기 운동을 시작했다. 이른바 한국관계고서찾기운동이다. 운동본부가 꾸려졌고, 유영구 당시 명지학원 이사장이 운영위원장을 맡아 지금까지 직을 유지하고 있다. 유 위원장은 "(29년 전 운동을 시작할 때) 국민소득이 1만 달러에 육박하고 경제 규모는 세계 16위 수준으로 올라선 우리나라가 그 위상에 걸맞은 문화적 역량도 갖춰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한국관계고서찾기운동에 나서게 된 취지를 설명했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한국학 자료를 매입하기 위해선 후원이 절실했다. 유 위원장은 전문가들로 구성된 운영위원들과 함께 300여 쪽 분량의 계획서를 만들어 1995년 친분이 두텁던 구본무 LG그룹 회장을 찾아갔다. 구 회장은 흔쾌히 취지에 동감했고, 그렇게 명지대-LG연암문고가 탄생했다. 연암문고는 LG 창업주 구인회 회장의 호(연암)에서 따왔다. 이어 2019년 명지-LG한국학자료관으로 명칭이 변경됐다.
자료관 설립 초기에 내부를 채우기 위해 유 위원장과 운영위원들은 전 세계 고서점을 샅샅이 뒤졌다. 밑바닥에서부터 고서점들과 인연을 맺고 신뢰를 쌓아온 끝에 어느 순간부터는 좋은 자료가 나오면 그쪽에서 먼저 연락할 정도가 됐다. 외부, 특히 서양의 시각에서 중립적이고 객관적으로 한국 역사를 판단할 수 있는 방대한 소장 자료는 명지-LG한국학자료관을 여타 한국학 관련 시설과 확연히 구분 짓게 하는 특징이다.
국제적으로는 물론 국내에서도 수시로 벌어지는 수준 낮은 역사 논쟁 대신 팩트를 기반으로 한 연구가 활발히 이뤄지도록 독려하는 게 유 위원장과 명지-LG한국학자료관의 지향점이다. 유 위원장은 "과거에는 (한국학) 자료가 없어서 공부를 못 한다는 얘기가 있었지만, 지금은 자료가 이렇게 많이 모였지 않나"라며 "자료를 두루 면밀히 살펴보고 치열하게 공부해 우리 역사를 제대로 아는 바탕 위에서 미래를 쌓아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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