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의 ‘여성적 오염’ 시각을 해체하다[책과 삶]
“할머니의 따스함은 헛소리”…‘편협한 모성’ 비판
어머니의 기원
시리 허스트베트 지음·김선형 옮김 | 뮤진트리 | 480쪽 | 2만3000원
“당신의 첫 번째 소설 두 권은 딱 남편분의 작품 같습니다.” “작가님이 정신분석을 폴 오스터에게서 배웠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신경과학에 대한 작가님의 지식은 남편분에게서 나왔나요?”
미국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 시리 허스트베트가 여러 국가를 방문했을 때 기자들에게 들은 말이다. 허스트베트는 종합병원에서 레지던트를 대상으로 ‘내러티브 정신의학’을 강의할 정도로 신경학·정신의학·정신분석학에 조예가 깊은데도 이런 말을 들었다.
한 러시아 이론가는 미하일 바흐친에 관한 오스터의 지식을 허스트베트와 나누고 싶어 했다. 오스터는 바흐친을 읽은 적이 없다. 허스트베트가 회견이나 세미나, 독자 모임에 가면 늘 따라붙는 존재가 오스터였다. 허스트베트가 ‘제2의 버지니아 울프’ 같은 찬사를 들으며 부커상 후보에 오르고, 국제 가바론 인문학상을 받은 작가라는 점은 잊히거나 무시되기 일쑤였다.
허스트베트가 뉴욕 컬럼비아 대학 영문과 대학원에서 공부할 때도 여러 일이 벌어진다. 그가 “강렬한 감정을 통해 기억에 화인처럼 새겨진다”는 뜻에서 ‘뇌 문신’이라고 표현한 일들이다.
“대학원에서 뭐 하고 있는 거예요? 그레이스 켈리처럼 생긴 사람이.” 허스트베트는 “전혀 그레이스 켈리처럼 생기지 않았지만, 그 논평 한 마디 때문에 그 말을 한 당사자인 ‘H. 교수’와 함께 연구하고 싶다는 내 희망은 완전히 끝장이 났다”고 말한다. 이 교수는 영문과에 몇 없던 여교수였고 페미니스트였다. 허스트베트는 여러 해가 흐른 후 그 교수가 영문과에서 부당한 취급을 받았다고 느꼈고 불행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대학원 때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상징적 폭력”이라 일컬은 일도 겪는다. 철학과가 주관하는 칸트 세미나에 허락을 받고 참가했다. “순수이성이라는 난해한 영역으로 들어가도 될 만큼 똑똑하다고 자부”했지만 소용없었다. 나이 지긋한 백인 남자 하나에 젊은 남자 아홉이 허스트베트의 등장과 논평을 냉대하고 무시했다. 이들은 허스트베트에게 손도 대지 않았다. 강의실 밖으로 밀어내지도 않았다. “사회 질서와 기존의 위계를 정당화하는 무력의 과시”인 ‘상징적 폭력’을 가했을 뿐이다. 허스트베트는 그때 “오염하는 침공자 취급을 받게 되자 나 자신이 나쁘고 더럽게 느껴졌다”고 말한다.
에세이집 여러 편에서 ‘오염’ ‘오물’ ‘혼종’을 ‘무균’ ‘순수’ ‘정돈’과 대비하며 페미니즘 시각에서 분석한다. ‘어머니로부터 멀리 떨어진 항균의 용기 속에 격리된 태아’라는 환상과 결합한 지식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태아는 남성일 수도 있고, 남성과 여성이 혼합된다는 생각을 하면 오염된 범주라는 꺼림칙한 느낌이 따라온다. 서구문화는 여성적 오염에서 도망치는 유구한 전통이 있다. 깨끗한 분리에는 혼합을 막으려는 보호 충동이 깊이 새겨져 있는데, 이 충동을 이해하는 작업은 꼭 필요하다.”
“유대인은 감염성 질병의 표상이다” “엄청나게 감염성 강한 질병이 국경을 넘어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 미국은 멕시코, 아니 사실 세계 여러 지역의 폐기물 처리장이 되었다.” 각각 괴벨스와 트럼프가 한 말이다.
허스트베트는 정돈의 부산물, 즉 먼지, 오물, 점액 같은 요소들이 타액, 눈물, 배설물, 자른 손톱일 수도 있지만, 또한 이방인, 마녀, 이민자, 유대인일 수도 있다고 본다. 트럼프 같은 이들의 말에서 “무균 상태는 완벽한 순수함, 침범 불가능한 국가”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순수주의자와 강경론자들은 경직된 분류에 열광하며 틈새, 누수, 구멍, 혼합, 혼종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한다.”
책은 20편의 에세이를 실었다. 원제는 ‘어머니들, 아버지들, 또 다른 사람들’이다. 한국어판 제목 ‘어머니의 기원’은 허스트베트의 어머니와 할머니, 모성에 관한 에세이들에 주목해 단 제목인 듯하다.
허스트베트는 모성 문제를 두고 가족사와 문화 비평을 결합한다. 허스트베트는 “자기희생적이고 참을성 있는 집안의 여왕, 아이들의 도덕적 교육을 책임지는 어머니의 상은 18세기에 탄생했다”고 말한다. 이런 어머니상은 지금도 이어진다.
허스트베트는 “할머니는 따뜻한 포옹이고 달콤한 추억이다” 같은 말을 허튼소리로 여긴다. “할머니의 온기, 선의, 희생, 마음 아픈 고생에 대한 진부한 관념과 이야기들은 얼마나 편리한가. 후대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고 그 정반대의 위협들을 흩어버리기 위해 말해지고 또 말해지는 이야기들.”
“나의 어머니는 이른바 ‘어머니’가 아니다”라고도 했다. “남녀의 위계질서에 갇힌 사람도 아니고, 위대한 어머니나 동정녀 마리아나 대자연이나 육아 잡지에 실리는 부드러운 광고에 등장하는 어머니상의 컬트도 아니다. 게다가 어머니의 관념들은 선악의 대비가 노골적인 엄격한 도덕주의로 어머니 노릇을 침범한다. 아버지 노릇은 거의 건드리지 않으면서 말이다.” 어머니는 노르웨이에서 반나치 시위를 벌이다 붙잡힌 뒤 벌금형 대심 감옥행을 선택한 이다.
허스트베트는 자기 딸과의 경험도 “나만의 것이다. 보편적인 모성을 상징하거나 대신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어쩌면 이것이 문제의 핵심일지 모른다. 모성은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도 여전히 지독한 감상적 헛소리들에 파묻혀 있고 어떻게 행동하고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한다고 지시하는 징벌적 규율들이 너무 많아서 오늘날에도 문화적 구속복으로 남아 있다”고 했다. 이 구속복, 즉 ‘모성’은 “야성적이라고 인지되는 어머니들을 벌주는 도덕적 무기”로 사용된다. 허스트베트는 “우리 문화에서 자식들에게 정신없이 사랑을 퍼주지 않고 자아실현을 위해 나서는 어머니보다 더 언어도단이거나 중범죄는 없다”고도 말한다.
허스트베트는 모성을 “좁고 단순하지 않고, 방대하고 복잡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그는 초인적으로 보일 만큼 놀라운 회복력을 보여준 사람들을 예로 들며 이렇게 말했다. “주인들에게 강간당한 노예 여성들의 몸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얼마나 많았는지만 기억해도 족하다. 그 상상은 강력하다. 그 어머니들을 상상해보라. 나는 모성을 이해하려면 모든 경험을 포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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