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미술관 5편]"아내는 나의 생명" 그리움을 예술로…천재 작가 이중섭

최이현 기자 2023. 10. 6.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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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뉴스12]

교과서 속 작품 이야기를 생생하게 다뤄보는, 교과서 미술관 다섯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천재 작가, 국민화가라는 수식어가 붙는 작가죠. 


이중섭 화백의 교과서 속 대표작과 그의 생애를 살펴봅니다. 


최이현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중학교 미술 교과서에 있는 이중섭 화백의 대표작 <흰 소>입니다.


작품 속 소는 역동적이면서도 힘 있고, 평온해 보이면서도 희망찹니다. 


인터뷰: 전은자 학예연구사 / 이중섭미술관

"이중섭 화가가 가족하고 떨어져 있었잖아요. 가족하고 만나려는 그런 희망을 가지고 했던 시기의 작품이기 때문에 어느 작품보다도 에너지가 풍부한 그래서 강한 힘이 느껴지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죠."


이중섭에게 소는 분신과도 같은 자화상이었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평생동안 자신의 희로애락을 담아, 묵직하고 둔중하게, 때론 광기까지 담아 소를 표현했습니다.


소에 대한 관찰도 남달랐는데, 1940년대 후반, 남의 집 소를 하루종일 보고 탐구하다가 소 주인에게 고발당했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천재 작가 이중섭은 평안남도에서 막내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이중섭이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건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고등보통학교의 인연 때문입니다.


'조선이 낳은 세계적 화가'라는 수식어가 붙는 임용련. 


미국 예일대를 나와 파리에서 활동하다, 3.1운동으로 망명한 임용련을 받아준 곳은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성지.


평안북도 오산고보였습니다. 


미술교사로 취직한 임용련과 재학생 이중섭.

"미래에 거장이 될 것"이라며 이중섭을 아꼈던, 임용련은 이중섭이 화가가 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이중섭이 연필화에 집중했던 것도 유화 작품에 '긁기' 기법을 도입한 것도 임용련의 영향이 컸습니다.


본격 미술을 향해 마음을 굳힌 이중섭은 일본 유학을 결심합니다.


무사시노 미술학교로 시작해 문화학원으로 적을 옮겼을 때, 이중섭 모든 그림의 모토이자, 시작과 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를 만납니다.


'남쪽에서 온 덕 많은 이'라는 뜻을 담아, 일본인 아내에게 이남덕이라는 이름도 지어줍니다. 


이 화백은 늘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주변에서 그림 소재를 찾았습니다.


전쟁 이후 제주도로 피난했을 땐 <서귀포의 환상>, <섶섬이 보이는 풍경> 등을 비롯해 게를 잡아먹고 지내던 가족의 일상을 그렸습니다.


인터뷰: 윤경희 서귀포공립미술관장

"이중섭 화백이 한국전쟁 당시에 가족과 함께 서귀포에 내려와서 이렇게 살았던 이런 곳이기 때문에 그 살았던 과정에 생활이 묻어나 있는 그런 미술관이기도 하고요. 부인 이남덕 여사가 그때의 시기를 이제 기억을 했을 때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아이들이 등장하는 그림엔 병으로 잃었던 첫째를 생각하며 아프지 말고 오래살라는 염원을 담은 '복숭아'를 자주 그려넣었습니다.


경제적 어려움과 시대적 상황 때문에,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떠나보낸 1950년대 초반엔, 가족에게 보내는 그림 편지와 엽서 작품들이 대거 탄생합니다.


기법적으로도 한국인만의 기법을 찾기 위해 애썼습니다.


인터뷰: 방초아 학예연구사 / 경기도미술관 

"종이와 연필이 없어도 껌 종이나 담뱃갑의 종이라든지 그런 은지에 날카로운 것으로 그림을 그렸었습니다. 그만큼 작가의 그림에 대한 열정을 대변해 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일시 체류증을 받아, 일본에서 가족들과 짧은 시간을 보내다 온 이중섭 화백. 


작가로 대성해서, 가족들과 다시 만나겠노라는 꿈을 안고 고국으로 돌아온 직후 그린 작품들이 현재, 알려진 이중섭 화백의 대표작들입니다.


"지금 우리 네 가족의 장래를 위해서 목돈을 마련하기 위한 제작에 여념이 없소."


하지만 1955년 미도파 화랑에서 열린 개인전은 흥행 속에서도 경제적 도움으로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가족을 다시 데려오겠다는 희망이 사그라들자, 그의 작품은 생명력을 잃었습니다.


그렇게 천재 작가는 1956년 9월, 무연고자로 마흔 살의 생을 마감했습니다.


가족에 대한 사랑과 처절한 그리움을 예술로 승화시킨 한국이 낳은 정직한 화공, 이중섭 화백.


그의 수많은 작품들이 국민들의 가슴에 남았습니다.


EBS 뉴스 최이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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