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리더의 책] 美 최고 지정학 전략가의 중동 분석 ‘룸오브타임’
자유무역과 국제협력의 시대가 끝나고, 국제 정치가 경제와 산업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시대가 왔다. 미국과 중국·러시아의 신냉전은 전세계를 무대로 벌어지고 있다. 기업 경영에서 정치 리스크가 상수가 된 셈이다.
미국을 대표하는 지정학 전략가 로버트 카플란의 신작 <룸오브타임(The Loom of Time)>은 미국의 현실주의 전략가들이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엿볼 수 있는 귀한 기회를 제공하는 책이다. 카플란은 1980년대 미국인들이 잘 알지 못하던 동유럽, 중동, 아프리카, 중앙아시아에 대해 현지인들과 부대끼면서 취재한 사실을 바탕으로 생생하면서도 통찰력 있는 기사로 명성을 떨친 언론인 출신 저술가다. 동시에 미국 국방부, CIA(중앙정보국) 등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자문을 해온 내부자 집단에 속해 있다. 카플란은 현실주의적 시각에 입각해 지역 안정을 위해 미국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줄곧 고수해오고 있기도 하다. 2000년대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의 ‘이념적 조언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번 책은 그리스, 튀르키예에서부터 시작해 아프가니스탄과 키르기스스탄까지 이어지는 ‘대중동(Greater Middle East)’을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가 현지에 방문해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나라별로 각국의 현실을 분석하는 방식이다. 대중동이라고 지칭하고 있지만 사실상 지정학의 창시자 해퍼드 매킨더가 유라시아 대륙 한복판을 ‘심장지대(Heartland)’라 지칭하며 강대국들의 각축장이 될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 영역과 겹친다. 중국 영토인 신장-위구르 자치구나 흑해 연안의 우크라이나, 조지아 등도 간접적으로 포함되는 셈이다. 카플란은 “제국은 죽었을지 모르지만 제국주의적 세계관(mindset)은 중국과 대중동 지역에서 불안정한 모습이지만 살아남아있다”고 지적한다.
제목은 ‘시간이라는 실로 옷감을 만드는 직기(베틀·織機)’라는 뜻이다. 영국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가 <역사의 연구>에서 괴테의 <파우스트>에 영감을 얻어 쓴 대목에서 따왔다. “인간의 역사에서 근본적인 리듬”을 만드는 이 직기는 “인간 사회가 만들어지고, 성장하고, 망가지고, 와해되는 과정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시간의 직기’라는 비유는 중동 사회는 역사와 문화, 그리고 뿌리 깊은 사회구조 속에서 이해가 가능하며 일시적인 정치적 현상으로는 그 특징을 잡아낼 수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일시적인 정치적인 사건으로 일희일비해서는 안 되고, 유라시아 지역의 본질이 바뀌지도 않을 것이라는 다분히 현실주의적이면서 지정학적 중요성을 강조하는 의미다.
카플란은 그리스, 튀르키예, 이집트, 에티오피아, 사우디아라비아,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 이란, 아프가니스탄 등의 현실을 이 같은 관점에서 생생히 드러낸다. 가령 튀르키예의 경우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과 정의개발당의 이슬람주의가 맹위를 떨치고 있지만 케말 아타튀르크의 세속주의가 너무 뿌리 박혀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동시에 오스만튀르크의 후신(後身)으로 인근 지역에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적극적인 행보와, 그에 반발하는 아랍 각국들의 대응은 정치 변동에도 불구하고 상수일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사우디아라비아를 다룬 장에서는 무하마드 빈 살만 왕세자의 개혁과 독재가 뗄레야 뗄 수 없는 한 몸과 같은 것임을 드러낸다. 수십 개 부족이 왕실을 중심으로 결합된 연합체 성격이 강한 나라에서 살만 국왕과 빈 살만 왕세자이 독주하는 나라로 바뀌는 과정은 사우디아라비아의 급격한 도시화 과정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는 얘기다. “토지와의 결합이 약하고 뿌리가 없는(landless and rootless)” 국민들이 늘어나는 상황은 정치 체제의 변화를 야기할 수 없다는 의미다. 여기서 ‘개혁’은 서구 민주주의 사회와 근접해간다는 것과 거리가 멀다는 게 카플란의 지적이다. “절대적인 통제권과 역동적이며 새로운 생각을 장려하는 기술관료제 사회를 동시에 추구”하는 데서 따르는 체제 내 긴장은 필연적이다.
이란의 경우 그는 고유한 페르시아 문화권의 아이덴티티를 강조한다. 이슬람 혁명의 성공은 이 유산의 성과를 적절히 이용한 덕분이지만, 이슬람과 페르시아 전통이 공존할 수 있는 여지가 소진되었다는 진단이다. 이란의 국내 정치 불안정은 앞으로 계속될 수밖에 없고, 그 여파가 다른 나라에 미칠 가능성도 높아지고 있다고 전망한다.
카플란은 대중동 일대의 불안정성은 역사적으로 오래된 기원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사실상 이 지역의 본질과도 같다는 의미다. 오스만튀르크가 해체된 뒤 대중동 지역의 안정을 가져온 정치질서가 무너졌고, 여러 나라들의 각축장이 될 수밖에 없다는 시각이다. 평화롭게 민주주의 국가로 이행하지 못할 것이라고 본다. ‘아랍의 봄’은 민중의 신뢰를 상실한 타락한 정권에 대한 반발에서 기인한 것으로, “조직, 정치적 경험, 이데올로기적 명확성, 테크노크라트적인 지식”이 해당 국가에 결여되어 있는 상황에서 민주주의가 돋아날 가능성은 낮았다는 것이다. 급격한 도시화와 IT 등 기술 발전으로 각국의 경제나 사회가 급격히 바뀌고 있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고 카플란은 역설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강력한 안정을 가져다줄 수 있는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시각은 자연스럽다.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와 리콴유 싱가포르 전 총리를 교차시키면서 그가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는 게 이를 잘 보여준다.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대중동 지역에 내재된 불안정성에 대한 강조는 미국의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나 다름없다.
그는 2016년 미 국방부 장기 기획 부서인 총괄평가국(Office of Net Assessment)에 제출한 글에서 대중동지역의 불안정이 심화될 것이며, 튀르키예·이란·중국 등이 지역 내 영향력 확대를 위해 각축전을 벌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러시아가 흑해 연안과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전쟁을 비롯한 다양한 영향력 확대 행위를 벌일 것이라고 보기도 했다. <타타르로 가는 길>, <지리의 복수> 등 이전 저작에서 일관되게 보이는 시각이기도 하다.
카플란의 주장은 앞으로 대중동지역과 그 주변이 미국과 중국 및 러시아, 그리고 튀르키예나 이란 등 지역 강국들이 경쟁적으로 힘을 투사하는 무대가 될 것임을 시사한다. 특히 중국이나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미국이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것도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 한국인 입장에서 보자면 대중동 지역이 꾸준하게 지정학적 화약고로 남아있을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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