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스 형에게 길을 묻다[살며 생각하며]

2023. 10. 6.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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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섭 작곡가, 방송인·문학박사
정말 요즘 세상 왜 이래요
부모가 부모답지 못하고…
경찰이 경찰답지 못하고…
직무서 자신답게 행동하고
상대방 권한 침범 않는다면
公序良俗 반듯하게 ‘뿌리’

나훈아가 부른 노래 ‘테스형’의 노랫말 중에서 ‘아,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하는 구절이, 아무리 들어도 이 시대를 꿰뚫어보는 통렬함이 느껴져 수십 번을 반복해 듣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생전 처음 보는 낯선 길을 걷다가 큰 느티나무 밑에서 혼자 장기를 두고 있는 노인을 만났다. 앗! 이 분이 누구신가?

“소크라테스 선생님 아니세요?” “맞소만, 요즘은 다들 테스 형이라 부르지. 장기 둘 줄 아시오?” “예, 조금….” “그럼, 앉으시오.”

그런데 상(象)과 마(馬)를 쓰는 행마 솜씨에서 대단한 내공이 느껴졌다. 게다가 차(車)와 포(包)까지 움직이면, 저 필살기에 누구든 한순간 날아가겠구나 싶었다.

“테스 형, 정말 대단하세요. 거의 신공(神功) 수준입니다.” “장기에 집중하시오.” “이야∼∼, 상으로 이런 공격도 되네.” “거 참, 말 많은 작곡가로군. 당신같이 말 많은 사람은 나중에 꼭 딴소리하는 법이니, 내 미리 말해 두지만 일수불퇴(一手不退)요!” 테스 형은 냉정했다. ‘쩝∼, 더럽게 꼬장꼬장하네….’ 투덜거리며 포를 날려 그 상을 잡아 버렸다.

그러곤 쾌재를 부르는데. “큰일은 당신이 났지! 방탄(防彈)해야 할 포를 기껏 상 하나 잡겠다고 진지를 버리고 이쪽으로 옮겨 버렸으니, 선생은 스스로 성문을 연 것이오.” “테스 형이 상으로 저의 궁(宮)을 위협하니, 나쁜 공격을 받으면 포든 졸(卒)이든 당연히 방탄에 나서야 하는 것 아닌가요?” “공격에 나쁜 공격, 좋은 공격이 어딨소? 좋은 전쟁 없듯이 남을 해치는 공격은 모두 나쁜 것이오.”

“말씀대로 정말 요즘 세상 왜 이래요?” “예로부터 난세(亂世)는, 답지 못한 것 때문에 초래되는 법이오. 부모가 부모답지 못하고 자식이 자식답지 못하며, 주인이 주인답지 못하고 일꾼이 일꾼답지 못하며, 선생이 선생답지 못하고 학부모가 학부모답지 못하며, 군인이 군인답지 못하고 경찰이 경찰답지 못하며, 관리가 관리답지 못하고 성직자가 성직자답지 못한 걸 두고 내가 뭐라 했소?” “너 자신을 알라!” “그렇소! 사실이 아닌 것과 근거가 없는 말로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을 혹세무민(惑世誣民)이라고 하오. 정치판도 그렇소. 거짓말이든 협박이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을 손에 쥐는 게 바로 정치라고 마키아벨리는 말했소.”

“그렇지만 정치는 정의롭게 해야 되잖아요?” “정의? 참 순진하기도 하오. 정의는 강한 사람의 이익일 뿐이란 말 못 들어 봤소?” “트라….” “맞소! 트라시마코스가 말했소. 당파싸움도, 각목 휘두르는 종교계의 싸움도, 같은 사건을 놓고 서로 다른 말 하는 언론끼리의 싸움도, 각종 조합이나 단체끼리의 싸움도 모두 그들끼리의 이익을 위한 대결이오.” “아, 결국은 모두가 답지 못하단 말이군요.”

“내가 살던 아테네에 모든 사물을 왼쪽으로만 보는 광어와 오른쪽으로만 보는 도다리가 살았소. 이들은 허구한 날 제가 옳다며 싸웠지. 이들의 목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왼쪽과 오른쪽을 다 볼 수 있는 숭어는 오히려 숨을 죽인 채 입을 닫고 살아야 했소.” “지금 우리 동네가 그래요. 게다가 요즘은 집회시위와 파업, 학교 폭력과 교사들의 극단적 선택, 살해와 테러 예고, 마약, 가짜 뉴스 등….”

“그 모든 것이 국민과 상대의 입장을 돌보지 않는, 답지 않은 것에서 시작되오.”

“짝짝짝!! 정말 테스 형이십니다. 저마다 자신이 맡은 직무에서 답게 행동하고 상대방의 권한을 침범하지 않는다면 세상에 공서양속(公序良俗)이 반듯하게 뿌리를 내릴 텐데, 왜 그게 안 되냐구요?” “국민이 국민답지 못하기 때문이오.” “예?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신지?” “당신 동네에 나훈아라는 가수가 명언을 했더구먼. 국민이 똑똑하면 위정자(僞政者)가 나올 수 없다.” “아, ‘2020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에서 한 말 말씀인가요?”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오는 것이라, 최종 권력자인 국민이 오직 국익과 복리 증진을 위해 열정적으로 일할 사람을 뽑아야 하는데, 지연·학연·혈연 따위에 얽매여 능력도 안 되는 싸움꾼이나 도둑을 뽑는다면, 결국 나라 망치고 나아가 자기 재산도 다 털리게 되는 법이오. 나라에 충성하고 국민에게 봉사해야 할 정치인이 답지 않게 행동해도 국회에서 버젓이 활개 치는 건, 모두 국민이 국민답지 않기 때문이오. 누굴 탓하겠소?”

“듣고 보니 저도 지연·학연·혈연에 코뚜레가 꿰여 있었네요. 이제부터라도 혹세무민하는 사이비 정치인, 가짜뉴스 퍼뜨리는 사이비 언론, 약한 사람들을 대변하는 것처럼 속여 특권 누리는 사이비 조합, 말로만 시민 대표한다는 사이비 단체들…. 하여간 답지 않은, 이런 사람들 눈 부릅뜨고 살펴봐야겠습니다.” 그때 테스 형이 벼락같이 소리쳤다. “장 받아라!” “앗, 얘기 중에 비겁하게 장을 치면 어떡해요? 한 수만 물러 줘요….” “내 진작에 일수불퇴라 하지 않았소? 장 받으라니까!”

그러는 새 따르릉 전화벨이 요란해 꿈에서 깼다. “여보세요?” 저쪽에서 격앙돼 앙칼진 목소리가 고막을 찢는다. “이봐요 작곡가 양반! 사이비 어쩌고저쩌고 함부로 입 놀리지 말고 작곡가면 작곡가답게 곡이나 열심히 쓰시오!” 하더니 전화기를 내팽개치듯 끊어 버렸다.

이호섭 작곡가, 방송인·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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