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한 명도 없는 K-팝그룹이 몰려온다

2023. 10. 6.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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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션브이·블랙스완·니쥬·VCHA
전원 외국인 구성 ‘K-팝 3.0’ 시대
K-팝 DNA 이식으로 시장 확장
“지속가능 성장에 중요한 분기점”
K-팝은 이제 더이상 ‘한국만의 문화’가 아니다. K-팝 3.0 시대에 초국적 그룹이 속속 등장하면서 K-팝 정체성 문제가 업계와 팬덤 사이에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 사진은 2019년 SM엔터테인먼트에서 K-팝 업계 최초로 ‘전원 외국인’ 멤버로 구성된 웨이션 브이(위쪽부터), 전원 일본인 멤버로 구성된 JYP엔터테인먼트 걸그룹 니쥬, 하이브의 글로벌 오디션 ‘더 데뷔:드림 아카데미’ [SM엔터·JYP엔터·하이브 제공]

2019년 웨이션브이(SM), 2020년 블랙스완(DR뮤직), 2020년 니쥬(JYP), 2023년 VCHA(JYP)....

한국인이 단 한 명도 없는 K-팝 그룹들이 밀려오고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 커진 K-팝의 영향력을 동력 삼아 ‘K-팝 방법론’을 이식한 새로운 형태의 그룹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명실상부 ‘K-팝 3.0’ 시대다.

K-팝은 H.O.T와 SES, 핑클 등 전원 한국인 멤버 그룹이 주도한 ‘K-팝 1.0’ 시대를 시작으로, 외국인 멤버들이 포함된 ‘K-팝 2.0’ 시대를 지나왔다. 지금은 K-팝 기획사의 프로듀싱 능력을 바탕으로 전원 외국인 그룹으로 구성된 ‘K-팝 3.0’ 시대가 도래했다. 내수시장의 한계에 직면한 업계의 자구책이자, 시대의 변화다.

윤등룡 DR뮤직 대표는 “K-팝의 전환점이 왔다”며 “현지에서 자란 다국적 멤버들을 K-팝 시스템으로 육성해 글로벌 그룹으로 데뷔시키는 것이 현재의 K-팝이 지속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현지화 전략이 낳은 ‘K-팝 3.0’ 시대=‘다국적 글로벌’ 그룹은 난데없이 등장한 ‘생태계 교란종’이 아니다. 이미 4년 전인 2019년 SM에서 K-팝 업계 최초로 ‘전원 외국인’ 멤버로 구성된 웨이션 브이를 데뷔시켰다. SM루키즈 출신으로 연습생 생활을 한 이들은 K-팝 시스템 안에서 철저하게 트레이닝 받았다. 웨이션 브이는 주요 활동 무대가 중국이긴 하지만, 한국에서도 탄탄한 팬덤을 갖추고 있고 글로벌 인지도도 높아지는 추세다.

SM 이후 소위 빅 4로 불리는 기획사들 역시 도전을 시작했다. ‘K-팝 3.0’ 시대의 화두를 올린 박진영 JYP 프로듀서는 일본에서 ‘니지 프로젝트’를 시작, 전원 일본인 멤버로 구성된 걸그룹 니쥬를 데뷔시켰다. 2020년 니쥬를 시작으로, 지금은 현재 A2K와 니지 프로젝트 보이 그룹까지 확장했다.

하이브는 후발주자이나 영향력은 상당하다. 최근 시작한 글로벌 오디션 ‘더 데뷔:드림 아카데미’엔 전 세계에서 12만명의 지원자가 몰렸다. 현재 두 번의 미션을 거친 참가자들이 한국에서의 오디션 일정을 이어가고 있다. 세계적인 ‘슈퍼스타’인 방탄소년단(BTS) 소속사라는 명패가 통한 셈이다.

중소기획사에서도 한국인이 없는 K-팝 그룹 제작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DR뮤직의 블랙스완은 벨기에, 브라질, 인도, 미국 멤버로만 구성돼있고, 필리핀 멤버로만 제작한 호라인즈, 뉴이드도 데뷔 전 프리 싱글로 팬들과 만났다.

‘K-팝 3.0’의 흐름은 고도화된 ‘현지화 전략’이다. 1세대 K-팝 그룹 시절부터 지난 25년간 수많은 글로벌 스타를 만들어온 K-팝의 ‘성공 방정식’을 일본, 중국을 넘어 미국까지 이식하는 ‘세계화’의 시도다.

정민재 대중음악평론가는 “K-팝 3.0은 내수 시장보다는 영미 중심의 글로벌 시장에서의 파이를 키워가려는 전략”이라며 “현지에서 친숙하게 받아들이는 인재를 개발해 장기적인 비전을 세울 수 있을 것”이라고 봤다. 국내 굴지의 대형 가요기획사 관계자는 “K-팝 시스템을 통한 외국인 그룹의 육성은 다양성과 스펙트럼이 넓어진다는 점에서 K-팝의 지속가능한 성장에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미 현지에서도 K-팝 시스템과 방법론에 대한 관심이 상당하다. ‘더 데뷔: 드림 아카데미’를 이끌고 있는 미트라 다랍 HxG(하이브 x 게펜 레코드) 대표는 “K-팝의 핵심 방법론을 미국으로 가지고 오고 싶었다”며 “LA에 T&D(Training&Development) 센터를 설립해 안무, 보컬 트레이닝, 작사, 작곡 스킬 뿐 아니라 참가자들의 정신 건강까지 모니터링 하는 육성 프로그램을 가동했다”고 말했다.

하이브에서 방탄소년단의 기획을 맡아 글로벌 성공을 거둔 뒤, 미국 대형 음반사로 옮긴 니콜 킴 컬럼비아 레코드 A&R 부사장은 “방탄소년단(BTS), 블랙핑크 등이 등장한 이후 K-팝 시스템에 대해 많은 음반사들이 주목하고 있다”며 “다만 아직은 시도 단계라 결과를 예측할 수 없어 반신반의하고 있다”고 봤다.

▶한국인 없는 K-팝 그룹...정체성 논란도=K-팝 3.0 시대에 접어들며 ‘초국적’ 그룹이 등장하자 ‘K-팝 정체성’ 문제는 업계와 팬덤 사이의 논쟁으로 번지는 양상이다. 가장 보수적인 쪽은 K-팝 골수팬이다. 오랜 시간 K-팝을 좋아하며 성장한 국내 팬덤은 ‘K-팝의 고유성’을 고수하려는 특성을 보인다. 노래, 퍼포먼스, 스타일, 뮤직비디오에 이르기까지 흠결 없는 완벽주의로 무장한 K-팝 시스템은 이들 팬덤이 가장 높이 평가하는 타 장르와의 차별점이다.

대형 가요기획사 관계자는 “K-팝 팬덤은 K-팝 아티스트와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 자신들이 생각하는 고유 영역에 이질적인 요소가 들어오거나, 흉내내기 식으로 K-팝 업계에 진입하려는 타국적 아티스트에 대해 엄격한 잣대로 평가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업계 전문가들도 초국적 K-팝 그룹의 ‘성공 가능성’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다. 유튜브를 통해 공개한 JYP와 하이브의 글로벌 오디션은 회당 수백 만 뷰를 기록했지만, 이러한 관심이 팬덤으로 이어질 지는 미지수라는 게 대체적인 반응이다. 정민재 평론가는 “일본, 중국을 비롯한 동양인 멤버는 낯설지 않을 수 있지만, 흑인 백인 등 인종과 생김새가 다른 그룹이 당장 대중에게 파고들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미 데뷔한 다국적 그룹들에 대해서도 “이들이 어떻게 K-팝 그룹이냐”는 지적이 많은 게 현실이다. 다만 해외 팬덤의 시선은 다르다. 다국적 그룹은 모국에서의 탄탄한 팬덤을 확보하며 K-팝을 확장한다. 김진우 써클차트 수석 연구위원은 “K-팝 입문반의 해외팬은 K-팝과 다국적 K-팝 그룹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고, 다 같은 K-팝 그룹으로 인식해 온도차가 있다”고 말했다.

이에 업계에선 K-팝의 확장이 시작된 만큼, 향후엔 K-팝을 만든 시스템과 장르적 특성만 남게 될 것으로 보고 있다. 한 대형 기획사 관계자는 “그룹 내에 한국인이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이제는 누가 만드냐가 중요한 시대가 됐다”며 “20여년 간 K-팝 터전에서 성장한 창작자들이 크리에이티브 능력을 발현해 만든 ‘메이드 인 코리아’ 그룹이라야 존재를 입증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K-팝 4.0’도 코앞으로=K-팝 3.0 시대를 넘어 어느덧 4.0 시대까지 턱 밑으로 다가왔다. 인도네시아 스타비, 일본의 XG처럼 K-팝 프로듀싱과 시스템 등 기술력을 전수 받은 현지 아이돌 그룹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 걸그룹 XG의 소속사 엑스갤럭시는 K-팝 프로듀서인 재이콥스와 일본 연예기획사 에이벡스 그룹이 협업한 신생 기획사다.

특히 스타비의 출현은 국내에서도 꽤나 충격적이었다. 2019년 데뷔한 스타비는 지난달 K-팝과 인니팝을 결합한 신곡 ‘뱅(BANG)’을 발표, 국내에서 데뷔 무대를 가진 바 있다. ‘K-팝 고급반’ 팬덤이 자리한 인니에서 K-팝 그룹을 똑같이 닮은 현지 그룹이 나오자 K-팝 시스템의 ‘노하우 유출’에 대한 우려가 커지기도 했다.

김 연구위원은 “인도네시아는 대대로 K-팝이 강세인 시장이었으나, K-팝 피지컬 앨범 점유율이 지난해엔 4위에서 9위로 떨어졌다”며 “자국의 음악 수준이 올라 온데다 생김새와 스타일까지 K-팝 그룹과 빼닮은 스타비와 같은 현지 그룹까지 나오자 K-팝 점유율이 떨어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사실 이같은 현상은 K-팝의 성장과 진화를 위해 ‘K’를 떼고 팝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업계의 의지가 영향을 미쳤다. 그 과정에서 ‘전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방법론’으로 평가받은 K-팝 시스템이 낱낱이 공개됐고, 노하우 유출 역시 막을 수 없게 됐다.

출혈 경쟁을 감수하면서도 ‘K-팝 시스템’ 수출을 통한 현지화 전략에 주력하는 것은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위기와도 궤를 같이 한다. K-팝의 ‘글로벌 진출’은 단지 소비 시장의 확장에만 집중한 전략은 아니다.

정 평론가는 “출생률과 인구 감소로 인해 내수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시점이 왔고, 제작적 측면에서도 K-팝 그룹을 꿈꾸는 10대들, 특히 남자 아이들이 없어 이르면 10년 안에 보이그룹 제작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며 “이런 상황에서 합리적인 대안이 K-팝 3.0이 될 것”이라고 봤다. 고승희 기자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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