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산’에서 폐지 줍던 소년, 한국의 대표 발레리노로 [실패연대기]
동양인 최초 키로프 무대 선 ‘발레 스타’
국립발레단 떠나 관객 2명 두고 공연도
“발레는 내 종교… ‘환갑 무대’가 목표”
무지개는 하늘에만 뜨는 게 아니다. 무용수들이 내뿜는 땀방울과 조명이 만나는 찰나에도 무지개는 반짝 스친다. 무대에 서기 전 무용수들이 흘린 피와 땀, 눈물, 그들이 맛본 고통과 좌절, 행복과 보람의 결정체가 만들어낸 무지개. 그러니 얼마나 농도 짙은 무지개일까.
38년 차 발레리노 이원국(56). 그가 ‘무지개’를 본 건, 수석무용수로 섰던 국립발레단이나 유니버설발레단의 무대도, 러시아 최고의 발레 무대 마린스키 극장도 아니었다. 객석 규모 100석 남짓한 소극장이었다.
“무대에서 턴을 돌 때 순간 무지개가 싹 하고 지나가요. 그 무대에 서기까지 있었던 장면들도 필름처럼 흘러가죠.”
빠르면 대여섯 살부터 하는 발레를 그는 스무 살에야 시작했다. 육체의 성장은 멈췄고, 마음의 성장은 미뤄둔 그였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그는 가출을 ‘밥 먹듯’ 했다. 만화방 아르바이트, 공사판의 일용직 노동, 중국집 음식 배달, 해수욕장 호객 알바, 술집 웨이터… 지금은 다 기억도 나지 않는 일터를 전전했다.
어떻게 해도 갈증은 채워지지 않았다. ‘어른들이 말하는 것처럼 열심히 공부해 좋은 대학 가는 것 말고 다른 길은 없는 건가.’ 어느샌가 그는 자기 삶에 어떠한 기대도, 희망도 놓아버렸다. “그런데 인생이란 게 참 희한해요. 자포자기할 때 한편에선 새로운 희망도 꿈틀거리거든요. 탈출구도 함께 따라오는 거죠.”
그때 그의 인생에 던져진 게 발레였다. 그 스스로 다시 태어난 해라고 부르는 1986년 찾아온 삶의 이유였다. 연습할 때가 아닌 잘 때도, 길을 걸을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오로지 발레 생각뿐이었다. 발레의 대가들에게서 기술뿐 아니라 태도까지 집어삼켜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욕망으로 이글거리는 발레리노. 그리하여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까지 따라 한 그다. 37년간 매일 해온 연습인데 아직도 새로움을 발견하고 희열을 느낀다. 2년 전 발병한 식도암으로 장장 10시간이나 걸린 수술을 마치고 입원했을 때에도 설 수 있게 되자 '탄듀(무릎을 편 채 한쪽 발을 밀어내는 동작)'부터 했다.
-발레를 하는 데 가장 중요한 건 뭔가요.
“사랑. 사랑이죠.”
한 남자의 38년에 걸친 지독한 사랑 이야기. 그 러브스토리는 비 내리는 난지도의 ‘쓰레기 산’ 위에서 시작한다. 쓰레기 속에서 재활용이 가능한 폐지를 찾아 줍던 열아홉 살의 이원국 말이다. 쓰레기 산 위에서 본 석양과 함께 그가 보낸 오랜 방황의 해도 저물었다.
[실패 1막] 인생 자포자기한 시절
-난지도에서 폐지는 왜 주운 건가요.
“(본가가 있던) 부산에서 술집 웨이터를 하다가 서울까지 가서 이 일, 저 일을 하며 떠돌게 됐죠. 찾은 일자리가 화물트럭 운전사 조수였어요. 폐지를 수집해서 공장에 나르는 트럭이었죠. 내가 해야 할 일은 폐지를 모으는 일이었어요. 일주일에 서너 번은 폐지가 모자라 난지도에 가서 폐지를 주워야 했죠. 중국집 배달 알바보다 두 배쯤 되는 돈을 받았지만, 고되고 험했어요.”
-학교에 다녔어야 할 나이인데 여러 일을 했네요.
“만화방, 공사장, 술집, 해수욕장 호객 알바… 별별 일을 다 했죠. 밥만 먹여주면 일했으니까. 중2 때 처음 가출해서 친구 집에서 지내다 오고, 또 며칠씩 나갔다 오고 반복하다가 고등학교 올라가선 아예 자퇴를 하고 밖에서 지냈죠. 술집 웨이터도 나이 속이고 들어가서 한 거예요.”
-왜 그렇게 지낸 건가요.
“가끔 생각해보면 ‘내 인생이 이렇게 되려고 그랬나’ 싶기도 해요. 시작은 중1 때 담임교사에게 오해를 받고 공개적으로 따귀를 여러 대 맞은 사건이었지만 (그 선생님을) 미워해본 적은 없어요. 억울했지.”
담임교사는 당시 여성 미술교사에게 ‘저질 편지’를 보낸 범인이 그라고 단정 짓고 그런 폭력을 행사한 거였다. 그는 이유도 모른 채 맞았고, 이유를 알고 나서는 더 어이가 없었다. 결백을 증명할 길도, 기회도 없었다.
-그 사건이 발단이 돼 학교가 싫어졌나요.
“그 사건에서 비롯된 억울함과 내 안의 갈증이 사춘기와 겹치면서 복합적으로 작용했던 것 같아요. 그 시절엔 그저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에 가는 길만 주어졌잖아요. 그러잖아도 답답했는데, 그 사건으로 갑자기 주위에서 나를 달리 보기 시작하는 거예요. 이른바 ‘문제아’로. 그때는 ‘차라리 잘됐네’ 싶기도 했어요. 자포자기하는 심정이었으니까.”
-그렇게 떠돌기 시작해 난지도의 쓰레기 산 위까지 간 거군요.
“그 일을 두 달간 했어요. 하루는 비가 내렸어요. 땀에다 빗물까지 뒤범벅이었죠. 어느새 비가 그치고 한강 쪽으로 해가 지더라고요. 석양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어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런 자문을 했어요. ‘내가 왜 태어났지?’ 답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를 잃은 채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또 하나, ‘내가 해야 할 일이 이건 아닌 것 같다’.”
그는 일을 그만두고 선물을 사서 부산 집으로 내려갔다. 무뚝뚝하고 엄하기만 했던 아버지는 “잘 왔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태어나서 그가 처음 본 아버지의 눈물이었다.
-발레는 어떻게 하게 된 건가요.
“집으로 돌아간 뒤 여러 가지를 배웠어요. 붓글씨, 피아노, 보디빌딩, 수영. 다 작심삼일 수준이었는데 그나마 보디빌딩을 오래 했죠. 관장님이 재능이 있다면서 경기에 나가보라고도 했거든요. 당시 팔뚝 둘레가 43㎝였죠. 하지만 역시 보디빌딩도 제 길은 아니었어요. 그러다 어느 날 어머니가 ‘무용 한번 해볼래’라고 하신 거예요.”
-어머니에게 뭐라고 했나요.
“처음에는 길길이 뛰었죠. 무슨 남자가 무용을 하냐고. 그런데 두어 달 뒤에 또 말씀하시는 거예요. 이번엔 아예 ‘발레를 해보지 않겠느냐’고요. 어머니가 이렇게까지 권하는데 효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간 속만 썩였으니까. 그래서 딱 세 달만 하자는 마음으로 발레학원에 갔죠.”
부산의 정금화무용학원이었다. 학원 문을 열고 들어가니 연습실엔 온통 여학생뿐. 한창 보디빌딩을 하던 때라 근육질에 키 180㎝의 남자가 들어서니 튈 수밖에. 그렇게 발레를 배우기 시작했다.
-어땠나요.
“처음엔 ‘나 죽었다고 생각하고 세 달만 버티자’ 싶었어요. 수업이 저녁 7시였는데, 무용학원으로 들어가는 걸 누가 볼까 봐 얼른 들어갔다가 수업 끝나자마자 바로 나왔죠. 세 달쯤 됐을 때 그만두려는데 선생님이 공연 무대에 서보라는 거예요. ‘바보 온달’이라는 창작발레공연이 있는데 발레리노가 필요해 모으고 있다면서. 그만두겠다는 말은 하지도 못하고 선생님이 가보라는 곳으로 갔어요. 가니까 우리 학원에는 없던 남자 무용수들이 열댓 명쯤 있는 거예요. 턴이나 공중 2회전을 하는 무용수도 있고요. 거기서 신무섭(국립발레단 부예술감독)을 만났죠. 나보다 세 살 어렸지만, 발레는 3개월 먼저 시작한 친구예요.”
신무섭 국립발레단 부예술감독은 그와 발레로 맺어진 형제 같은 사이다. 그는 신 부감독을 “섭아”, 신 부감독은 그를 “형”이라고 부른다.
-발레리노들을 보니 어땠나요.
“그들이 하는 흥미로운 동작을 보니까 나도 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제가 무섭이한테 그랬죠. ‘너 나 발레 좀 가르쳐줘. 나는 너한테 인생을 가르쳐줄게.’ 하하.”
-발레가 좀 다르게 느껴지던가요.
“무섭이를 만나고부터 달라졌죠. 무섭이네 집에 가면 그 시절 한국에선 구하기 힘든 외국 발레 비디오 테이프(VHS 테이프)가 많았어요. 둘이 그걸 보면서 함께 동작 연구도 하고, 연습도 했죠. 그러면서 점점 발레에 흥미가 생긴 거예요. 평생 처음으로 성취감도 느끼고 칭찬도 받았죠. 몇 개월 만에 실력이 꽤 늘었어요.”
그는 자퇴했던 부산 동명공고에 복학해 졸업장을 받고, 대학 발레 콩쿠르에도 나가 3등을 했다. 초등학교 때 성적이 올랐다고 받은 ‘진보상’ 이래 처음 받은 상장이었다. 1986년 6월 발레를 시작했는데 이듬해 겨울 그는 KBS 콩쿠르에서 대상을 거머쥔다. 2년 뒤엔 중앙대에 입학했고, 대학 2학년 때 동아 콩쿠르에서 대상을 타면서 군 면제 혜택까지 받았다.
운도 따랐다. 1991년엔 부산 동래봉생병원 의료원장 출신으로 국회의장을 지낸 정의화 전 의원의 도움을 받아 뉴욕 유학길에도 올랐다. 정 전 의장은 “그의 잠재력을 인정했기에 당시로선 부산에서 처음으로 ‘후원 디너파티’를 열어 유학비를 마련했다”며 “봉생문화재단 최초의 예술인 유학 지원 사례”라고 설명했다.
-엄청난 성장이네요.
“그러고 나니 ‘발레가 내 길인가 보다’ 싶더라고요. 발레에 물이 오른 거죠.”
-늦게 시작해서 더 힘들었을 것 같은데요.
“예를 들면 스트레칭이 잘 안 돼서 울면서 했죠. 집에 가면 다리를 쫙 벌리고선 남동생더러 왼쪽 다리, 누나한텐 오른쪽을 밟고 있으라고 해요. 어머니는 내 팔을 잡고요. 20, 30분쯤 지나면 너무 아파서 눈물이 나요. 내가 울면 그걸 보고 동생, 누나, 어머니까지 온 식구가 울면서 잡고 있는 거예요. 하하.”
-그러면서도 견뎠군요.
“스트레칭이 돼야 내가 원하는 우아한 라인을 만들 수 있으니 버티는 거죠. 몸이 유연해진다고 해서 하루에 두 번씩 사과식초도 마셨어요. 그런가 하면 양발에 2㎏짜리 모래주머니를 차고 자기도 했죠. 자면서 무의식 중에도 내 근육이 반응하도록 훈련을 하려고요. 여름에는 모래주머니 찬 곳에 진물이 차올라 터지고 난리도 아니었죠. 그래도 행복했어요. 무섭이랑 외국의 발레 비디오를 늘어질 때까지 돌려보면서 연구하고 연습실에서 하고, 방 안에서 해보고, 길거리에서 해보면서 하루 종일 발레만 생각했죠. 발레가 일상이었어요.”
-그 정도면 발레에 미친 수준이네요.
“미친 거죠. 하하. 영화 ‘백야’에서 발레리노 미하일 바리시니코프가 열한 바퀴 턴을 하는 걸 보고 무섭이와 그걸 해보려고 돌고 또 돌고 하기도 했죠. 하도 연습하니까 열여섯 바퀴를 돌 수 있게 되더라고요. 우리의 최고 기록이었어요. 비공식 타이 기록. 우리는 그걸 평생 자랑거리로 삼았죠. 그런 시절이었어요.”
신무섭 부감독은 “나도 피아노를 하다 전공을 바꿔 열일곱 살에 발레를 시작했는데 나보다 더 늦은 스무 살에 시작한 (이원국) 형을 보면서 위안이 되기도 했다”며 그 시절을 떠올렸다. “발레리노 중에선 그보다 더 늦게 시작하는 사람도 더러 있다. 그러나 99.9%는 한계를 느껴 도중에 그만둔다”는 설명과 함께. 그러니 발레리노 이원국은 그 극한 가능성을 뚫고 여기까지 온 무용수인 것이다. 그 비결은 노력. 남들을 뛰어넘는 노력이다. 신 부감독은 “이원국이란 사람은 발레밖에 모르는 사람이다. 정상에 오르면 어느 정도 긴장을 풀어도 되는데 그런 법을 모른다. 그에겐 계속 목마름이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실패 2막] 기고만장할 때 찾아온다
-그 시절 발레는 자신에게 무엇이었나요.
“나의 모든 것. 그저 내가 발레를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했어요. 자신감도 생겼고요. 연습에서 비롯된 거죠. 연습을 많이 하면 된다는 말을 믿었어요. 당시엔 우리나라 발레 무대를 통틀어 나 정도면 그래도 수준이 높구나 싶기도 했고요. 그런데 러시아 발레를 보고는 내가 형편없다는 걸 알았죠.”
-언제 처음 느꼈나요.
“일본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선배가 가져온 러시아 발레 영상 테이프를 보고서요. 당시 국내엔 미국이나 유럽 발레 정도만 겨우 알려졌고, 러시아 정보는 거의 없었거든요. 러시아 발레 하면 바리시니코프 한 사람만 생각했죠. 그런데 그 테이프를 보니 그런 사람이 러시아엔 수백 명이 있더라고요. 충격을 받았죠. 그들의 발레를 따라 하고 싶어서 잠이 안 왔어요. 그들의 발레엔 테크닉을 넘어선 무언가가 있었어요. ‘이게 바로 예술이란 건가’ 싶었죠. 그 영상을 분석하고, 따라 하기 시작했어요.”
-러시아 발레를 보고 엄청난 자극을 받은 거네요.
“신세계였죠. 너무나 러시아로 가고 싶었어요, 너무나. 할 수만 있다면 악마한테 영혼을 팔아서라도 다시 태어나 아홉 살부터 발레학교에 들어가고 싶은 거예요. 루이 14세가 만든 파리 발레학교, 러시아 바가노바 혹은 볼쇼이 발레학교. 난 그런 발레학교를 다니지 못했으니까요. 그 절실함은 눈물로도 다 표현하지 못해요. 러시아의 어떤 발레리노는 '를르베(발뒤꿈치를 드는 동작)'를 하루에 1,000개를 했다는 얘기를 듣고는 나도 따라 했죠. 그러고 나면 며칠 제대로 걷지도 못해요.”
그는 인터뷰에서 수많은 발레의 스승을 언급했다. 꼭 수업을 받아야 스승은 아니었다. 발레의 대가가 걸어가는 뒷모습, 계단을 오르는 모양새, 그의 유머러스한 태도···. 그 모든 게 그에게는 발레였다. 그 태도의 응축과 기술이 어우러져 발레라는 예술의 경지에 다다르는 것이라고 믿어서다. 발레학교에 다니지 못했으니 스스로 그렇게 교본을 만들어 연마한 것이다. “20년 전 선생님이 말한 근육의 움직임을 요즘 연습을 하며 깨닫기도 해요. 그런가 하면 선생님이 지나가면서 ‘이렇게’라며 한 번 해준 동작, 그 동작의 의미가 뭘까 십수 년을 생각하기도 했어요. 그러다 어느 순간 ‘아, 그 의미가 이거였구나’ 깨닫기도 하죠. 그 스승들의 가르침을 꿈에도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발레학교에 다니지 못한 갈증을 그는 스스로 그렇게 그만의 발레학교를 만들어 해소했다.
-무대에서 실수한 적도 있나요.
“있죠. 한참 잘난 척할 때죠. (웃음) 1992년 임성남 선생님(전 국립발레단장) 30주년 기념공연 무대였어요. 작품이 ‘돈키호테’였어요. 그러잖아도 최고의 테크닉만 요하는 작품인데, 제가 더 어렵게 구성을 했죠. 러시아 무용수를 흉내 내서 짠 거예요. 공연을 3일에 걸쳐서 하는데 첫째 날 아주 잘했어요. 기고만장했죠. 공연을 하루 하면 리허설을 두 번 하거든요. 그런데 둘째 날은 공연이 두 번 있었어요. 리허설을 두 번 하고 오후 3시 공연을 한 뒤, 저녁 공연을 하려는데 힘이 빠진 거죠.”
-넘어졌나요?
“바닥에 손만 안 짚었지 차라리 넘어지는 게 나을 법한 수준이었죠. 솔로를 할 때도 털털거리고, 턴을 할 때도 흔들, 공중 2회전이 잘 안 돼 넘어질 뻔하고요. 메인 공연이라 우리나라 무용계의 주요 인사는 다 왔는데 말이죠. 쥐구멍이라도 찾아 숨고 싶었어요. 공연 마치고 샤워실에서 벽을 치면서 울었죠.”
-그때 느낀 게 뭔가요.
“까불지 말자. 힘 안배를 제대로 못한 거잖아요. 그리고 더 열심히 하자.”
‘이쇼 라스’는 그가 2014년 낸 에세이집 제목이다. 러시아어로 ‘다시 한번’이라는 뜻. 그의 발레 정신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발레를 하면서 그간 ‘이쇼 라스’를 얼마나 많이 외쳤을까요.
“입에 달고 살았죠. ‘이쇼 라스’를 알게 된 건 1993년 유니버설발레단에 있을 때 러시아 키로프(현 마린스키)발레단 최고의 코치인 갈리나 케키쉐바 선생님이 오셨을 때죠. 문훈숙 유니버설발레단 단장이 전 세계의 내로라하는 선생은 다 데려왔거든요. 케키쉐바 선생님한테 트레이닝을 받을 때 선생님이 늘 ‘이쇼 라스’ ‘이쇼 라스’ 했거든요. 왜 다시 해야 하는지 설명도 안 해요.”
-하다 보면 이유를 알게 되나요.
“수없이 반복해서 하다 보면 깨닫게 돼요. ‘이쇼 라스’를 거듭하다가 잘했을 때는 ‘하라쇼(좋아)'라고 하시거든요. ‘이쇼 라스’를 끊임없이 받아들이고 이겨내다 보면 되는 거예요. 물론 그걸 이겨내지 못하거나 짜증 내는 사람도 있었죠. 나한텐 그런데 그 말이 곧 신이 하는 말씀이나 같았어요. 지금도 제자들을 가르칠 때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이쇼 라스’예요.”
그는 1995년 6월 5일 그토록 동경하던 러시아 키로프발레단의 무대에 초대 수석무용수로 서게 된다. 동양인 최초였다. 발레를 시작한 지 10년 만에 발레의 중심이자 최고의 무대에서 비상한 것이다.
-마린스키 극장 무대는 어땠나요.
“어메이징!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황홀함과 흥분, 두려움이 일었어요. 러시아 발레 무대는 객석 쪽으로 약간 기울어 있어요. 동전을 굴리면 굴러갈 정도로. 그때 처음 알았어요. 그 점이 무척 흥미로웠죠. 새로운 도전이니까요. 그럼 점프도 달리 해야 해요. 러시아 무대를 준비하면서 언덕길을 뛰어오르고 뛰어내려오면서 점프 연습을 했어요. ‘핵폭탄’이라고 불린 나만의 점프 기술도 처음 선보였죠. 정통 공중회전에 몸을 비트는 테크닉을 더한 새로운 기술이에요. 키로프 단원들의 반응은 반으로 나뉘었어요. 최고라는 반응과 ‘이건 발레가 아니다’라는 반응으로.”
관객은 어땠을까. 환호성과 함께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날 공연에서 그는 일곱 번의 커튼콜을 받았다.
[실패 3막] ‘나이 든’ 발레리노
-발레가 주는 행복도 연차에 따라 변화했을 것 같아요.
“발레가 행복만 주는 건 아니구나, 행복이 아닌 다른 감정으로도 나를 깨닫게 하는구나, 이게 예술이구나. 이런 걸 깨달았어요. 발레는 엄청난 고통도 줬으니까요. 내가 감당하기 힘든 고통.”
-그게 언제였나요.
“국립발레단의 현역 무용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할 때였죠. 나는 퇴임할 준비가 안 됐는데, 내 몸은 아직 건강한데, 주위의 반응은 그렇지 않았죠. ‘그만할 때가 되지 않았냐’고 말하는 듯한 분위기를 감지했어요. (국립발레단에서) 처음에는 선배들하고 경쟁해 뭣 모르고 치고 올라가 주인공을 차지하고, 그다음은 동료들하고 경쟁해 주역을 따야 했죠. 그다음은 후배들, 그다음은 제자들과의 경쟁이었어요. 그게 발레가 주는 고통이었죠.”
-어느 정도로 힘들었나요.
“뭐가 정답인지 몰라 방황했어요. 발레를 하는 동안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는데, 술을 입에 대기도 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연습으로 하루를 시작했는데 빠지기도 하고요. 내가 쌓아온 모든 것이 무너지기 시작하더라고요. 내가 생각하는 예술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는데, 여기서 그만둬야 하나. 제자들과 캐스팅 싸움을 하는 것도 괴로웠고요. 나를 발레리노가 아니라 ‘나이 든 발레리노’로 보는 시선을 견디기 힘들었죠. 내 결론은 ‘국립발레단을 그만두더라도 발레는 그만두지 않겠다’였어요.”
그는 2004년 국립발레단을 떠나 그해 12월 이름을 걸고 ‘이원국발레단’을 만들었다. 전혀 다른 무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많은 게 달라졌을 텐데요.
“당시엔 개인 발레단이 드물었어요. 그러니 만들 때도 정보가 거의 없이 그냥 만들기만 했죠. 저는 그저 발레단을 만들어서 공연을 하면 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공연을 한 번 하려면 대관, 조명, 음향, 분장, 의상, 홍보까지 내가 다 해야 했던 거죠. 대관까지는 겨우 했는데, 표가 안 팔리는 거예요. 하하. 홍보를 하는 방법을 몰랐으니까.”
-창단 공연은 그래서 잘 했나요.
“저는 그전까지 제 팬들이 많은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니더라고요. ‘국립발레단 이원국’의 팬이었지 ‘발레리노 이원국’의 팬이 아니었던 거예요. 저는 제가 발레단을 만들어서 창단 공연을 하면 다들 찾아서 표를 사가지고 올 줄 기대했던 거죠. 하하. 서울 양재동 교육문화회관을 빌려서 공연했는데 관객이 몇십 명 정도 온 것 같아요. 관객이라기보다는 주위에 아는 사람들이었죠. 어마어마한 충격이었어요.”
그 이후엔 정부나 민간의 지원 제도를 찾아 도움을 받기도 했다.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무용수들에게 줄 개런티를 너무 많이 책정해 오히려 ‘마이너스 공연’을 한 적도 많았다. 2008년 ‘월요 발레 이야기’(이하 ‘월요발레’)를 시작하면서 제 길을 찾아들었다. 이원국발레단 창단 4년 만이었다.
-소극장에서 ‘월요발레’를 한 계기가 있나요.
“아는 기획자와 얘기를 하다 나온 아이디어였어요. 월요일은 대개 뮤지컬이나 연극 공연이 없잖아요. 쉬는 날 무대를 빌리면 대관료가 싸니까 그날 발레 공연을 해보자는 거였죠. 첫 ‘월요발레’를 연 곳이 대학로의 창조소극장이었어요. 창조소극장에서 뮤지컬 ‘넌센스’ 공연을 할 때였죠. 넌센스 무대 장치를 그대로 두고 발레 공연을 했어요.”
-어땠나요.
“기뻤죠. ‘캬! 결국 하는구나’ 싶었어요. 단원들에게는 미안하기도 했어요. 살롱 발레처럼 우아한 극장이 아닌 소극장 무대에 세우는 게. 비라도 오는 날이면 의상에다 우산까지 들고 지하철을 타고 다녔고요. 그때 제 소원이 멋진 버스를 하나 사서 공연을 다니는 거였어요.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단원들 생각에 눈물이 날 것 같아요.”
-소극장 무대의 매력은 뭔가요.
“넋을 잃고 공연에 몰입하는 관객을 볼 때죠. 기립 박수가 나오지 않는 날이 없었어요. 10분 동안 박수가 터져 나오곤 했죠. 열한 번이나 보러 온 관객도 있었어요. 열한 번째 온 날 저한테 조용히 말하시더라고요.”
-가장 적게는 몇 명까지 앞에 두고 공연했나요.
“두 명. 성균소극장에서 공연을 할 때였어요. 태풍 예보가 뜨고 이미 비가 내릴 때였죠. 단원들은 ‘오늘은 공연 안 했으면’ 하더라고요. 공연 표는 예매와 현장 구매로 나뉘었는데 예매 표가 없는 건 미리 확인을 했죠. 하지만 현장 구매가 있을 수 있잖아요. 일단 단원들을 데리고 공연장에 갔어요. 공연 시간이 다 돼갈 무렵 뚜벅뚜벅 계단 내려오는 소리가 나더라고요. 그러더니 또 한 분이 들어와요. 물어 보니 한 분은 (경기 고양시) 일산, 다른 한 분은 (경기 성남시) 분당에서 왔대요. 이 비를 뚫고. 공연을 어떻게 안 하나요.”
-그날 공연은 어땠나요.
“주요 발레 작품의 핵심 대목을 뽑아서 공연했어요. 혼신의 힘을 다해서 했죠. 기립 박수를 받았어요. 기쁘고 행복했죠. ‘이게 나구나. 나라는 사람은 이런 사람이구나’ 싶었어요. 두 명의 관객 앞에서도 춤을 출 수 있는 사람. 또 다른 나를 발견한 날이었죠.”
그 유명한 러시아의 키로프발레단과 루마니아 국립발레단 무대에도, 관객 2명이 있는 소극장 무대에도 서본 발레리노가 또 있을까.
-발레로 또 다른 행복을 느꼈겠네요.
“저는 요즘도 혼자 연습하면서도 감사하고 기뻐요. ‘이걸 제자들에게 어떻게 알려주지’ 싶죠. 하긴 누가 알려준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스스로 깨달아야지. 발레가 주는 행복이 단순하지 않아요. 오묘하고 섬뜩한 기분이 드는 행복, 오싹할 정도로 차가운 행복, 뜨거운 행복, 따갑고 끔찍한 행복도 있죠. 이걸 어떻게 말로 표현할까요.”
[커튼콜] 깨달음은 젊음을 능가한다
-2년 전 예상치 못한 질병이 찾아왔죠. 식도암이라는 검진 결과를 들었을 때 어땠나요.
“정기 건강검진을 하다가 큰 병원에 가보라기에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갔어요. 그런데 식도암이라고 하더라고요. 다행히 전이가 안 됐지만, 식도는 자르지 않으면 안 된다고요. 식도를 다 잘라내고 위를 끌어 올려 붙인 상태예요. 10시간 동안 수술을 받았죠. 식도 끝에 있는 괄약근이 없으니 음식을 많이 먹으면 그대로 올라와요. 잠을 잘 때도 비스듬히 몸을 세워서 자야 하죠. 그래서 등도 굽고 뒷목의 뼈도 튀어나왔어요. 그래도 내가 발레를 한 사람이라 (자세가 바르니) 극복하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그는 올해부터는 다시 무대에 서고 있다. 4월 광명문화재단이 주최한 최태지 전 국립발레단장과 함께 하는 ‘발레 스타워즈’, 8월엔 용인문화재단의 ‘힐링 발레 콘서트’에서 ‘해적’ 3인무 무대에 섰다. ‘발레 스타워즈’ 공연 때는 아내인 발레리나 이영진씨와 아홉 살짜리 아들까지 온 가족이 처음으로 무대에 서서 탭댄스 공연을 하기도 했다.
-수술 후 다시 선 무대는 어떻던가요.
“감회가 새로웠어요. ‘할 수 있구나. 드디어 하는 구나’ 싶어서. 나를 기억해주는 오랜 팬도 만났고요. 최태지 단장의 공연에서 얻은 아이디어인데 만 60세가 되면 ‘환갑 공연’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발레에서 가장 중요한 건 뭐라고 생각하나요.
“사랑이죠, 사랑. 발레는 사랑을 표현하는 예술이에요. 관객을 사랑하는 만큼 자기도 사랑해야 하고요.”
-나이 들어 하는 발레는 뭐가 다른가요.
“젊은 무용수는 배운 대로 해요. 나이 든 무용수는 느낀 대로 하죠. 배운 걸 토대로 깨달음을 얻어서 하는 거예요. 나이가 들면 깨달을 수는 있지만 젊음은 없죠. 그래서 서러워요. 하지만 그 깨달음이 젊음을 능가할 때가 있어요. 저는 그걸 보이고 싶어요.”
-인생에서 겪은 실패의 경험들로 볼 때 ‘실패’란 뭔가요.
“실패 역시 삶의 필요한 순간이다. 실패를 줄여갈 수는 있지만 실패가 없을 수는 없어요. 그러니 실패야말로 모든 것의 근원일 수 있죠.”
-그걸 통해 얻은 ‘삶의 도’가 있다면요.
“이쇼 라스! 포기하지 말자는 거죠.”
-38년 전 난지도의 쓰레기 산 위에서 했던 ‘나는 왜 태어났을까’라는 질문에 답은 찾았나요.
“발레를 하기 위해서 태어났죠. 내가 할 수 있는 건 발레뿐이에요. 그 답을 써가면서 지금까지 온 거예요.”
그의 사랑 고백이 참으로 애절했다.
편집자주
역사가 승자의 서사이듯, 우리의 이력서도 성공만을 적습니다. 그러나 성공이라는 열매를 하나 맺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이 실패합니까. ‘삶도-시즌2’는 실패를 기록해 보려고 합니다. 실패의 정의를 새로이 써보자는 의도입니다. 우리는 모두 실패합니다. 지금도 무수히 실패하는 중입니다. 나의 실패와 당신의 실패는, 그래서 별것 아니면서도 특별합니다. 그 실패의 시간들을 엮는 ‘실패연대기’입니다.
용인= 김지은 선임기자 lun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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