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객전도’ 국민연금…연기금은 가입자 돈인가 정부 돈인가? [국민연금]⑧

유원중 2023. 10. 6.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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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기획] 국민연금에 ‘국가’는 없다
[국민연금]① 국민연금 고갈 위기라면서…정부는 왜 쌈짓돈처럼 빼쓰나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7749434
[국민연금]② ‘국민연금 크레딧’은 빛 좋은 개살구? 정부가 미래에 떠넘긴 빚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7750345
[국민연금]③ “국민연금 100년 이상 끄떡없다”…‘3-1-1.5’ 개혁안, 내용은?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7751360
[국민연금]④ 공무원연금에는 국고 5조 원 투입…국민연금엔?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7757050
[국민연금]⑤ 국민연금 ‘소득재분배’는 공정한가요?…월급쟁이에 의존하는 연금복지
https://news.kbs.co.kr/ne…
국민연금 기금 적립금 983조 원 (23년 6월 기준)


국민연금 기금은 1988년 이후 지금까지 연금 가입자들의 보험료를 기반으로 조성된 돈이다. 무려 1,000조 원에 육박하고 있다. 삼성전자 시가총액의 2배가 넘는 대한민국의 최대 자산이다. 그만큼 기금의 중요성은 엄청나게 커졌는데 기금운용 체계는 그에 걸맞게 발전해 왔는가?

■ IMF와 국민연금…연금 따로 기금 따로?

보건복지부 장관이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장을 맡는 현재의 기금운용 체계는 IMF 사태로 만들어졌다. IMF 구제금융을 받을 당시 세계은행(World Bank)이 한국의 연금개혁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는 재정경제원(현재 기획재정부) 장관이 담당했고, 연기금 대부분을 정부 공공자금에 강제 예탁하도록 했었다. 국민연금 기금이 공공자금관리기금법에 포함됐기 때문인데, 정부가 시중보다 낮은 이자를 주면서 연금 가입자들이 낸 보험료를 공공사업에 가져다 썼던 것이다. 세계은행은 이 법을 문제 삼았고, 국민연금이 강제예탁제도에서 빠지면서 보건복지부 장관이 기금운용을 어떨결에 떠안게 된 셈이다.

1988년 시작한 국민연금은 2000년 초까지 조성한 연기금이 60조 원에 불과했고, 그중 약 72%인 43조 원을 공공자금에 예탁해 운용했으니, 사실상 기금운용이라고 하기 힘들 정도로 후진적인 시스템이었다. 세계은행의 요구로 기금운용 담당이 재경부에서 보건복지부로 바뀌었을 뿐, 이때 만든 후진적인 기금운용 체계가 연기금 1,000조 원 시대에도 거의 개선되지 않고 흘러온 것이다.

국민연금을 만든 이유인 연금제도는 현재 ‘국민연금 심의위원회’라는 조직이, 연기금은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가 담당하는데, 연금제도를 맡는 위원장은 보건복지부 차관이고, 제도를 뒷받침해야 할 기금운용은 장관이 맡는 상황이다. 제도를 떠받치기 위해 기금이 있는 게 아니라 마치 기금을 위해 기금 운용을 하는 것 같은, 즉 위 아래가 뒤바뀐 상황이 23년째 바뀌지 않고 그대로 인 것이다.

그러다 보니 심의위원회는 물가상승률을 참작해 연금급여를 정하는 매우 실무적인 일을 하는 데 그치고 있고, 연금제에 대한 거시적인 목표와 방향을 설정하지 못하고 있다. 반면 보건복지부 장관이 책임지는 기금운용은 전문성이 떨어져 사실상 국민연금공단의 기금운용본부가 주도하는 상황이라고 한다. 하부기관이 상부기관을 끌고 가는 이상한 모습이다.

■ 머리 없이 굴러간 세계 3대 연금의 운용 성과는?

국민연금 기금 운용의 철학은 늘 똑같았다. ‘기금을 안전하게 지키면서 최대의 수익을 올려라.’라는 것이다. 딱히 연금제도가 기금에 요구한 목표가 없다 보니 기금은 '안전한 수익'을 목표로 굴러 왔고, 국민연금은 이같은 철학을 엄청나게 잘 수행했다.

국민연금 투자수익률(샤프지수) 상위 0.06% /자료:국회 연금특위 김우창 카이스트 교수


위험 대비 성과를 측정하는 샤프 지수(Sharpe Ratio)라는 것이 있다. 투자펀드의 성과를 측정하는 가장 일반적인 도구인데, 2003년부터 2022년까지 미국의 6,499개, 모든 뮤추얼 펀드와 비교했을 때 국민연금의 샤프지수는 1.09로 전체에서 4등 수준을 기록했다. 국민연금 기금운용의 철학대로 위험 대비 수익률은 압도적으로 높았다.

그러나 같은 기간 국민연금의 수익률은 국민연금이 5.9%지만 요즘 주목을 받고 있는 캐나다연금은 8.5%를 기록했다. 특히 지난 10년간 연평균 수익률은 국민연금이 5.3%로 캐나다연금 10.7%의 절반에 그쳤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국민연금은 30년 이상 장기투자를 하고 있고 적립금이 계속 커지고 있기 때문에 지금보다 더 모험적인 투자(전략적 자산배분)를 하면 높은 수익률을 올릴 가능성이 컸지만, 매우 보수적인 ‘안전빵’ 투자를 한 결과다. 정부가 기금운용 책임을 갖고 있는데 한 해라도 기금 손실이 나면 국회나 언론 등으로부터 책임추궁에 시달려야 하는 상황. 정부 입장에선 모험을 걸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장기투자에 대한 확실한 목표와 전문성이 떨어진 결과라고 볼 수밖에 없다.

■ 정부 주도의 기금운용, 성과는 낮고 부작용은 심각

한국 주식시장에서 시가총액의 약 8%를 가지고 있는 국민연금,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가 금융권과 경영계, 투자자들의 초미의 관심사가 된 지 오래다. 그러나 정부가 주도한 기금운용은 그동안 지나치게 보수적으로 운용해 성과를 높이지 못했는데 가끔씩 국민연금에 씻기 힘든 상처를 입혔다.

지난 2015년 국민연금은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을 찬성함으로써 스스로 수천억 원의 손실을 봤다. 국민들의 신뢰는 땅으로 떨어졌다. 대통령과 국내 최대기업의 오너가 구속됐고, 정권의 입김을 받아 합병 찬성을 지시한 당시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과 홍완선 기금운용본부장 역시 구속을 피하지 못했다.

삼성물산 합병 사건으로 재판에 출석하고 있는 전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과 홍완선 기금운용본부장


가입자인 국민이 낸 보험료를 마치 정부 돈처럼 쓰려는 습성이 지금은 사라졌을까? 삼성물산 합병의 문제가 터진 이후 정부는 기금운용위원회는 산하에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라는 기구를 신설하고, 국민연금의 의결권을 투명하게 행사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보건복지부는 올해 가입자 대표만으로 구성돼있던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에 정부 선발 위원을 넣었다. 이어 KT 대표와 한전 사장 선임 과정에서 보여준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여전히 정부의 입김을 강하게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기금운용위원회에는 보건복지부 장관을 비롯해 당연직 정부 위원이 6명이나 참여하고 있어, 사실상 정부가 캐스팅보트를 쥐고 운영되고 있다. 삼성물산 합병 때처럼 정부의 산하기관에 불과한 기금운용본부도 충분한 독립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드러났다.

■ 실력 없다고 꼬리가 몸통을 흔드나?

최근 재정계산위원회가 제시한 국민연금 개혁 방안 중에 기금운용 체계에 대한 변화를 시사한 대목이 있다. 기금의 수익률을 약 1% 끌어올릴 필요가 있고, 기금운용에 대한 전문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면서 몇 가지 방안을 제시하고 있는데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은 기금운용위원회의 권한을 줄이고, 기금운용본부가 전략적 자산배분 등 기금운용의 권한을 더 가져가는 안이 포함돼 있다.

연기금의 최고의사결정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가 경영계와 노조 단체, 시민단체 등 각종 연금가입자 단체를 대표하는 위원들이 참여하다 보니 금융투자의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명분을 들었다. 그러나 가입자의 돈을 운용하는 기금운용위원회의 전문성이 떨어진다고 가입자 대표들의 권한을 줄이고 실무기관인 기금운용본부의 권한을 키운다는 것은 매우 어색하다.

캐나다연금의 사례처럼 기금운용수익률을 올리려면 자산 배분을 더 공격적으로 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몇 년에 한 번씩 큰 손실이 나는 것을 인정하고 견뎌야 한다. 그런데 연기금의 주인인 가입자 대표들의 동의도 없이 기금운용본부가 스스로 기금을 운용하겠다는 건 상식적이지 않다. 과거 정부가 기금운용본부를 통해 부당한 개입을 해온 부작용을 막을 대책도 부족하다.


기금운용위원회의 전문성이 부족하면 전문성을 높이면 된다. 1,000조 원이나 되는 연기금의 투자 실패를 몇 년 일하고 그만두는 기금운용본부장이나 기금운용 담당자들에게 책임을 물을 일은 아니다. 이런 변화는 결국 투자 실패의 책임은 실무기관에 넘기고, 사실상 정부가 연기금 투자를 계속 통제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오히려 기금운용위원회에 당연직 위원으로 차관급 관료가 5명이나 포함된 것도 전문성 약화의 원인이다. 정책 방향이 정해지면 같은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는 정부 관료가 기금운용위원회에서 6장의 의결권을 갖고 있다 보니 기금운용이 정부 주도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차라리 이 자리에 기금운용의 최고 전문가를 앉히는 게 낫다는 주장이 나온다.

기금 규모로 이제 세계 3대 연금이 된 국민연금. 연기금 60조 원일 때 만든 기금운용 체계를 1,000조 원이 돼서도 그대로 가져가는 것은 후진적이다. 법에 국민연금에 대한 지급보장을 명시하자는 목소리를 애써 외면하고 있는 정부와 공무원연금 가입자인 정부 관료들이 연기금을 좌지우지하는 현행 기금운용 체계의 진짜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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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원중 기자 (iou@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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