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진 달항아리서 분열된 한국 모습 봐… 이어 붙이니 ‘명품’ 되더군요”[M 인터뷰]
‘상처입은 달항아리’ 최고의 美
깨진 백자 1년동안 옻칠로 붙여
한국적인 ‘화합의 미’ 재발견
단색화 거장 이우환과 40년협업
취미 삼아 도자기 만들다가 사사
6월 스위스 ‘아트바젤’ 합동전시
18세기 조선 백자호 복원에 올인
현대적인 감각 더해 사이즈 키워
우리代에서 백자 완성하잔 마음
“한번 보세요. 깨지고 부서진 항아리를 다시 꿰매 살리니 가장 가치 있는 명품이 됐어요. 지금 우리 사회와 비슷해 보이지 않나요? 서로 갈라지고 찢어져 있지만 서로 보듬어주며 다시 화합할 수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거죠.”
도예가 박영숙(76)의 작업실은 요즘 영국이나 미국 등 유수의 미술관, 갤러리 관계자들이 발을 들이고 싶어 하는 곳이다. 단색화와 함께 해외에서 한국적 미학의 진수로 평가되는 ‘달항아리’를 비롯한 단아한 백자 작품들이 가득 숨겨져 있는 보고(寶庫)이기 때문이다.
최근 이곳으로 문화일보를 초대한 박영숙은 자신이 빚어낸 가장 아름다운 작품 중 하나로 ‘상처 입은 달항아리’를 골랐다. 1년간 깨진 도자기를 옻칠로 이어 붙여 복원한 작품이다. 새하얀 백자에 새겨진 붉은 선은 마치 가을밤 연약한 나뭇가지 위로 크게 떠오른 보름달을 보는 듯하고, 문득 봄이 찾아오면 새싹이 돋아날 것 같은 분위기도 자아낸다. 박영숙은 “이우환 선생과 함께 인정한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것”이라면서 “이 달항아리를 살려내는 과정에서 새로운 경지에 이르게 됐다”고 말했다.
40년 넘게 백자를 빚으며 달항아리라는 장르를 세상에 알린 도예가는 왜 으레 실패작이 되고 마는 깨진 항아리에서 새로운 경지를 봤을까. 가장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는 백자의 깨진 모습에 우리 사회의 단상이 비쳤기 때문일 것이다.
박영숙은 “우리 정신, 문화적 DNA가 담긴 작품이 바로 밝고 우아한 백자인데, 깨진 모습이 꼭 지금 우리 사회 같지 않으냐”며 “사회가 갈등으로 어려움을 겪는데 잘 복원하면 외려 더 큰 아름다움을 되찾을 수 있다는 의미를 발견하니 가치가 클 수밖에 없다”고 했다. 흡사 부부처럼 커다란 대접 2개를 위아래로 이어 붙여야 완성할 수 있는 달항아리를 또다시 이어 붙이며 한국적인 화합의 미를 발견한 것이다. 지난 4월 윤석열 대통령이 미국을 국빈 방문할 당시 조 바이든 대통령에게 야구공을 건네받고 달항아리를 선물한 것과 비슷한 맥락인 셈이다.
박영숙은 해외 유명 인사들이 사랑하는 작가다.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이자 단색화 거장 이우환(87)과 40년에 걸친 협업으로, 한국 예술의 가치를 끌어올렸다. 6월 스위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아트페어인 ‘아트 바젤’에서 국내 대표 갤러리인 갤러리현대가 15년 만에 초대받아 꾸린 메인 섹션 부스를 이우환·박영숙 2인전으로만 꾸린 이유다. 박영숙이 빚은 대형 백자 항아리와 백자 접시에 이우환 특유의 붓칠이 더해진 작품은 미니멀한 직선과 곡선의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박영숙은 이에 대해 “오로지 이우환과 박영숙의 40년이 담긴 작품들”이라며 “한국 하면 떠오르는 모습이다 보니 아트 바젤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것 같다”고 말했다.
백자를 빚는 데 모든 걸 바친 박영숙의 도예 인생은 4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이우환을 처음 만나고, 정신적 스승인 성철스님으로부터 가르침과 격려를 받았던 이때를 운명의 시기로 떠올린다. 경주에서 가구를 만들던 집의 딸로 꼬마 시절부터 도자에 익숙하긴 했지만, 불과 함께 도자를 제대로 빚은 건 이때가 처음이다.
박영숙은 “취미로 문화센터에서 배운 도자기를 남편이 운영하던 인사동 도자기 매장에 놨는데 그걸 본 이 선생이 지도해줄 테니 제대로 만들어보겠느냐고 권유해 가르침을 받게 됐다”면서 “정규교육도 받지 않고 유명 작가에게 사사하지도 않은 가정주부를 도예가로 만들어준다니 운명이 아니겠느냐”고 했다. 이어 “이후 일본에서 전람회도 열고 좋은 반응도 얻자 이 선생이 가마를 지키는 주인과 가마를 지배하는 작가 중에 무엇이 될 것인지 물었고, 작가 한번 제대로 해보겠다고 말했다”면서 “이때 성철스님도 해외에 나가 우리 도자기를 알리고 1등을 하라고 응원해줬고, 이 두 사람을 실망시키지 않으려 백자 제작에 노력했다”고 말했다.
작가의 삶을 택한 박영숙은 가마 앞에서 불과 싸우며 스스로를 몰아붙였다. 기본부터 할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완벽한 형태와 무게, 쓰임새를 갖춘 생활 자기부터 만들며 도자기를 굽고 또 구웠다. 그는 “생활 자기를 터득하지 않고 백자를 빚는다는 건 인정할 수 없다”면서 “이 선생도 생활 자기를 완벽하게 만들지 못하면 지도하지 않겠다고 해 어떤 것보다 튼튼한 생활 자기부터 만들어냈다”고 말했다.
완숙한 기술과 감각을 갖추게 된 그는 백자의 길에 들어서며 달항아리의 원형인 18세기 조선 백자호를 답습하는 대신 한 걸음 나아가 현대적 감각을 더해 스케일이 크고 매끈한 백자를 만들었다. 박영숙은 “도자는 만들면 부피가 줄어드는 만큼 원래 사이즈보다 더 커다랗고 품위 있어 보이게 하는 게 기술”이라며 “단순히 옛 백자를 카피하는 게 아니라 시대에 맞게 만드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박영숙은 “이 선생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맥이 끊긴 도자를 부활시키는 작업을 한 것”이라며 “기왕 할 거라면 세계 미술사에 남는 걸 만들어보자는 마음이었다”고 말했다. 조선 도공들의 예술혼을 계승하되 현대적으로 발전시키자는 것이다.
그는 “한 가마 앞에서 한 사람이 수십 년간 해내야 나오는 백자는 오로지 나의 기술로 누구에게 전수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라며 “바람처럼 지나가 버리는 게 예술이란 생각에서 이 선생에게 우리 대에 제대로 백자를 완성하고 끝마치자고 하면서 여기까지 온 것”이라고 했다.
박영숙과 이우환이 이렇게 새롭게 해석한 조선 백자대호는 영국 대영박물관이 소장하고, 영국 왕실이 온갖 걸작들을 모아 놓은 빅토리아·앨버트 박물관 최고의 컬렉션으로 꼽힐 만큼 명품이 됐다.
박영숙은 최근 달항아리를 벗어난 새로운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삶과 신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온갖 과일과 새를 붙여 만든 4단 항아리 ‘천상에 바치는 과일’이다. 고향인 경주 고령토 폐광촌에서 모은 흙으로 만든, 얼마 남지 않은 물감을 아낌없이 사용해 감칠맛 나는 과일을 만들어냈다. 그는 “코로나19, 전쟁 등으로 팍팍해진 세상에서 과일을 먹으며 행복해지는 소망을 담아 만들고 있다”면서 “그간 일군 도예 철학과 기술력을 집약한 작품으로 해외 미술관에서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조선 백자에 현대적 감각 더해 ‘달항아리’로 재해석… 해외서도 ‘붐’ 일으켜
1999년 엘리자베스 여왕 내한때
인사동 아틀리에 방문해 화제도
박영숙은 18세기 조선백자에 현대적 감각을 더해 ‘달항아리’로 재탄생시킨 한국 도예 대가로, 현대 도예 수준을 한층 끌어올린 작가로 평가받는다. 경주 출신으로 정규 미술교육을 받거나 전문 도예가에게 사사한 적은 없지만, 넉넉하고 품위 있는 전통 백자를 세련되게 재해석한 작품을 선보여 주목받았다.
달항아리라는 용어는 한국 미술 거장인 김환기와 최순우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18세기 중반 조선에서 만들어진 백자대호(白磁大壺)를 일컫는 말로 썼다고 하는데, 2000년 한국실을 개관한 대영박물관에서 주요 유물로 ‘Moon Jar’(달항아리)라고 이름 붙인 조선백자를 선보이며 해외에 알려졌다. 박영숙은 1980년대 이우환의 권유로 도예에 입문한 이후 1983년 미국 뉴욕에서 백자전을 시작으로 1990년대 일본 도쿄(東京)와 대만 타이베이(臺北)에서 전시를 열며 해외 미술계에 달항아리 유행을 일으킨 작가로 꼽힌다. 1999년 내한한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인사동에 위치한 박영숙의 아틀리에를 직접 방문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영국의 빅토리아·앨버트 박물관은 2009년 영국 저명인사 5명에게 박물관 최고의 컬렉션을 골라 달라는 부탁을 했는데, 이 중 한 명으로 영화 ‘007 시리즈’에서 ‘M 국장’으로 유명한 주디 덴치가 “만약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싶은 단 하나를 고르라면 바로 달항아리”라며 박물관이 소장한 박영숙의 백자를 최고 걸작으로 극찬했다. 주디 덴치는 “이 달항아리를 보면 세상의 모든 근심과 걱정이 사라진다”고 평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영숙은 어린 시절부터 도자기에 대한 안목이 남달랐다. 경주에서 나고 자란 박영숙은 학생 시절부터 오래된 신라 토기 등 골동품을 찾았다. 최순우, 조자룡 선생 등 저명한 학자들이 그의 손님이었다. 박영숙은 “주말이면 선생님들이 내가 모은 물건들을 보여 달라며 새마을호를 타고 경주에 왔다”면서 “나중에 서울에서 보고 나서야 유명한 학자들인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어린 시절 아버지가 나전칠기 공장을 했고, 불국사를 놀이터 삼아 놀면서 다보탑을 빙빙 돌았던 기억이 있다”면서 “이런 경험에서 도자에 대한 영감을 얻은 것 같다”고 말했다. 박영숙의 백자는 기존 조선 시대 달항아리보다 더 매끈하고 규모가 큰 게 특징이다. 이우환의 선이 어우러지면 더 진가를 발휘한다. 다만 최근 만드는 백자엔 달항아리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 박영숙은 “달항아리는 둥실 뜬 것처럼 보인다는 뜻에서 지은 이름으로 조선 백자호라 불러야 맞다”면서 “지금 제작하는 작품들은 두 개의 접시를 위아래로 붙이는 건 동일하지만 형태가 다르다”고 했다.
유승목 기자 mok@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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