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픽처] 주윤발은 배우로도, 인간으로도 '큰 형님'이었다
[SBS 연예뉴스 | 우동(해운대)=김지혜 기자] "인생에는 두 번의 갑자(甲子)가 있는데, 하나의 갑자는 60년이에요. 두 번째 갑자에 들어선 저는 올해 7살입니다. 데뷔 50주년에 이렇게 큰 상을 받아서 기쁩니다"
지난 4일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서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을 받은 주윤발은 이튿날 열린 기자회견에서 이 같은 수상 소감을 전했다. 올해 나이 68세, 연기 경력 50년 차의 배우는 자신을 7살이라 말하며 인생도 연기도 한창임을 강조했다.
1980~90년대 홍콩 누아르 영화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주윤발이 15년 만에 한국을 찾았다. 지난해 홍콩 영화계의 또 다른 전설 양조위에게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을 안겼던 부산국제영화제는 올해 '큰 형님' 주윤발에게 같은 상의 영예를 안겼다.
지난 7월 건강 이상설이 돌기도 했던 주윤발은 68살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만큼 건강한 신체와 뜨거운 열정으로 국내 취재진 앞에 섰다. 자신의 대표작과 함께 신작을 올해 영화제에서 선보이는 주윤발은 "영화가 없으면 주윤발도 없다"는 말로 영화에 대한 깊은 애정을 드러냈다.
◆ 남자들의 인생 영화 '영웅본색'엔 '따거' 주윤발이 있었다
주윤발은 오우삼과 함께 홍콩 누아르의 상징으로 불리는 영화인이다. 두 사람이 의기투합한 영화 '영웅본색'(1986)과 '첩혈쌍웅'(1989)은 1980년대 국내 관객들의 필람무비로 자리매김했고, 중국어로 큰 형님을 뜻하는 '따거(大哥)는 주윤발을 지칭하는 하나의 수식어가 됐다.
'영웅본색'에서 선보인 트렌치 코트와 성냥개비를 입에 무는 동작은 TV와 광고, 뮤직비디오 등에서 여러 차례 패러디 되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는 기자들조차 본분을 잊은 채 주윤발에 대한 사적인 감정을 드러냈다. 저마다 '영웅본색'에 얽힌 추억을 소개했고, "따거(大哥)라고 한 번 불러봐도 되겠냐"며 대놓고 팬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주윤발은 "오랫동안 한국에서 사랑받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환한 미소를 보이며 "글쎄요. 한국 사람들이 왜 절 좋아할까요? 제가 한국 사람을 닮아서일까요?"라고 반문했다.
1955년 영국령 홍콩 라마섬에서 태어난 주윤발은 어려운 과정 형편으로 인해 중학교를 중퇴한 뒤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구두닦이, 웨이터, 우편배달부, 택시 운전사 등 여러 일을 하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던 그는 1972년 친구의 권유로 연극에 데뷔했고, TV에도 진출했다.
영화 데뷔작은 1976년에 출연한 '투태'다. 주윤발은 오우삼 감독과 만나면서 배우로서 만개했다. '영웅본색'(1986)과 '첩혈쌍웅'(1989)으로 아시아 전역에서 뜨거운 인기를 얻었고 이후 '정전자'(1989), '흑사회'(1989) '도성'(1990), '종횡사해'(1991) 등이 잇따라 히트하며 '홍콩 누아르'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대만 금마장 남우주연상 두 차례, 홍콩 금장상 남우주연상을 세 차례나 수상하며 중화권 최고의 배우로 인정받았다.
홍콩과 아시아 인기를 바탕으로 할리우드에서도 활동했다. 할리우드에 먼저 진출한 오우삼 감독의 러브콜로 그와 함께 '리플레이스먼트 킬러'라는 누아르 영화를 선보였다. 이후 '애나 앤드 킹', '커럽터' 등에 출연하며 할리우드 주류 입성을 노렸고, 대만 출신 이안 감독이 연출한 '와호장룡'(2000)에서 활약하며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수상에 크게 기여했다.
1997년 홍콩의 중국 반환 이후에는 자국 활동에 집중하며 '황후화'(2006), '조조-황제의 반란'(2012), '주윤발의 도성풍운'(2014), '몽키킹:손오공의 탄생'(2014), '무쌍'(2018) 등의 작품에 출연했다.
주윤발의 매력은 남성성과 소년미의 공존에 있다. 타고난 신체 조건 덕분에 액션 연기에도 능했지만 코미디에도 재능이 있는 다재다능한 배우다. 중년이 되면서는 액션 일변도의 작품이 아닌 드라마 장르와 정통 사극으로 연기 폭을 확장하며 한층 품위있는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이날 주윤발은 자신의 50년 연기 인생을 회고하며 대표작으로 '영웅본색', '첩혈쌍웅', '와호장룡'을 꼽았다.
◆ "영화가 없으면 주윤발도 없습니다"
홍콩 영화 전성기의 중심에 있던 주윤발은 예전 같지 않은 자국 영화계에 대해서는 아쉬움을,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해 온 한국 영화계에 대해서는 부러움의 마음을 드러내기도 했다.
주윤발은 "1997년(홍콩의 중국 반환) 이후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시나리오도 사전에 허락을 받아야 하고 정부의 지침을 따르지 않으면 제작비를 마련하기도 힘들다. 많은 영화인이 애를 쓰고 있지만 검열이 너무 많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반면 한국 영화의 부상에 대해서는 반기며 "나는 지역마다 어떤 운이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 영화가 부상하고 배우들이 할리우드까지 진출할 수 있다는 건 굉장히 기쁜 일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이어 "어느 업계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정체를 느낄 때 다른 지역이 더 먼 데까지 끌고 갈 수 있다는 건 굉장히 좋은 일이다. 한국 영화계가 이렇게 크게 부상할 수 있어서 굉장히 고무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한국 영화 부상의 원동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는 "창작에 대한 자유도가 높다고 생각한다. 가끔 보면 '어? 이런 소재까지 다룰 수 있다고?'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창작의 자유가 고픈 자국 상황과 비교해 부러움을 드러낸 말이기도 했다.
홍콩과 중국을 오가며 50여 년간 최고의 위치를 지켜온 주윤발은 연기에 대한 변함없는 열정을 피력했다. 주윤발은 "나는 홍콩 작은 바다 마을에 태어나 10살에 도시에 나갔고 18살에 연기를 시작했다. 공부를 많이 못 한 나에게 영화가 많은 걸 가르쳐줬고, 어떤 것에도 비할 수 없는 행복을 줬다. 매 영화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살았다고 볼 수 있다. 영화가 없었으면 주윤발도 없다"라고 말하며 웃어보였다.
"향후 어떤 영화와 어떤 역할을 하고 싶나"라는 질문에는 "어떤 제약도 제한은 없다. 어떤 도전이든 할 준비가 돼있다. 늘 그렇듯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주윤발은 이번 영화제에서 대표작 '영웅본색', '와호장룡'과 함께 신작 '원 모어 찬스'를 선보인다. 5년 만에 내놓는 신작으로 그의 코미디 연기를 볼 수 있는 영화다. 주윤발은 "이런 장르의 연기를 안 한 지 오래되어서 저도 기대가 크다. 무엇보다 한국 팬들이 많이 좋아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기대감을 드러냈다.
◆ 8천 억대 기부, 아내 공으로…"빈 손으로 왔으니 빈 손으로"
주윤발은 중국과 할리우드를 넘나든 열정 넘치는 연기 활동뿐만 아니라 검소한 생활과 다양한 기부 활동으로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기도 했다. 특히 2018년 8000억 원이 넘는 재산을 기부하기로 선언해 팬들을 놀라게 했다.
이와 관련한 질문이 나오자 주윤발은 "내가 한 게 아니라 제 아내가 한 거다. 사실 난 하고 싶지 않았다. 힘들게 번 돈이다.(웃음) 나도 이제 용돈을 받으며 살고 있다"고 겸손한 답변을 남겼다.
그러면서도 "어차피 세상에 태어날 때 아무것도 안 가지고 왔기에 갈 때도 아무것도 안 가지고 가도 상관없다고 한다. 난 흰쌀밥 두 그릇이면 된다. 어차피 아침은 안 먹으니까. 아니 지금은 당뇨가 있어서 한 그릇만 먹어도 된다"고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를 실천하게 된 성숙한 마음가짐을 보여줬다.
주윤발의 재산은 약 1조 원 대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는 아내에게 월 1000달러(한화로 대략 14만 5~6천 원) 남짓한 용돈을 받으며, 지하철 이동을 즐기는 것으로 유명하다. 자신이 유일하게 '플렉스' 하는 것은 "카메라 렌즈 구입"이라며 최근에 산 3000달러짜리 중고 렌즈 자랑을 늘어 놀기도 했다.
◆ "나이 듦, 죽음 두렵지 않아"…달관의 경지에 도달한 전설
주윤발은 이날 지난 7월 온라인을 떠들썩하게 했던 자신의 와병설 및 사망설에 대해서도 해명했다. 그는 관련 질문에 "아프다는 게 아니라 아예 죽었다고 가짜 뉴스가 떴더라. 매일매일 일어나는 일이라 신경 쓰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이어 "사람이 어느 정도 나이 들면 가장 중요한게 취미를 찾고 건강을 챙기는 거다. 다음 달에 홍콩에서 하프마라톤 대회에 참가한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도 러닝을 했다. 첫 갑자엔 배우로 살았는데 두 번째 갑자는 마라토너로 살 수도 있다"고 달리기에 빠진 근황을 공개했다.
50년 간 활동하며 스타성을 지켜오고 있는 비결도 궁금했다. 그는 "당신은 기자고, 나는 배우지만 이 자리를 벗어나면 나도 일반인이다. 특별한 시선을 가지고 저를 슈퍼스타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과 다르지 않다"라고 소박한 답변을 내놓았다.
배우 주윤발의 연기 인생과 더불어 인간 주윤발의 삶은 '형님'의 성숙함이 엿보였다. 또한 달관에 경지에 이른 듯한 내면은 진심을 담은 언변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배우는 '외모의 변화', '나이 듦'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직업이다. 그러나 주윤발은 연연하지 않았다.
"태어남이 있으면 죽음도 있는 법이다. 주름 생기는 걸 크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감독님이 제게 노인 역할을 주면 기꺼이 참여할 것이다. 늙어가는 건 무서운 게 아니다. 그게 인생이다. 인생에 죽음이 없다면 이상하지 않나"
ebada@sbs.co.kr
<사진 = 백승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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