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 아이돌, 콘서트는 기본…쇼호스트에 팬과 영상통화까지
지난달 23일 서울 마포구 서울월드컵경기장. 문화방송(MBC) 라디오 프로그램 ‘아이돌 라디오’의 오프라인 콘서트를 보려고 2만여 관객이 모였다. 여러 아이돌 그룹 사이로 낯선 모양새의 그룹이 등장했다. 5인조 가상 보이그룹 플레이브다. 웹툰에서 튀어나온 듯한 다섯 멤버들이 춤추고 노래하는 모습이 대형 전광판에 나오자 팬들은 응원봉을 흔들며 환호했다. 플레이브의 팬덤 ‘플리’다.
같은 날 인천 송도달빛축제공원. 메타버스를 주제로 한 음악 축제 ‘이세계 페스티벌’이 열렸다. 지올 팍, 로꼬, 멜로망스 등 가수와 다나카, 숲튽훈(김장훈의 부캐) 등 유튜버가 출연한 가운데 마지막 헤드라이너로 무대에 오른 주인공은 이세계아이돌(이세돌). 인터넷 방송 플랫폼 트위치의 유명 스트리머 ‘우왁굳’이 기획한 6인조 가상 걸그룹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튀어나온 듯한 소녀들의 무대에 관객들은 열광했다. 이 공연은 서울, 대구 등 전국 씨지브이(CGV) 7개 상영관에서도 전석 매진인 가운데 생중계됐다.
가상 아이돌 열풍이 뜨겁다.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한 가상 인간이나 만화 캐릭터 같은 멤버들로 결성된 그룹이 실제 아이돌 못잖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전에도 가상 인간 가수가 없진 않았다. 국내에선 1998년 사이버 가수 아담이 시초다. 하지만 흥행에 실패하면서 제작사는 파산했다. 이후에도 몇몇 시도가 있었으나 잠깐의 화제에 그쳤다. 그러다 최근 들어 급격히 발달한 기술과 케이(K)팝 팬덤 문화가 맞물리면서 비약적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이런 움직임은 2021년 국내 최초의 가상 아이돌 그룹 이터니티가 데뷔하면서 가시화됐다. 인공지능 그래픽 회사 펄스나인이 만든 11인조 가상 걸그룹이다. 대중이 선호하는 외모의 가상 인간에다 실제 사람의 노래와 춤을 추출해 조합했다. 처음에는 별 반응이 없었다가 기술 수준이 올라가면서 호응이 커졌다. 외신들도 관심을 보였다. 멤버 제인은 홈쇼핑 쇼호스트로 출연하고, 에스비에스(SBS) ‘모닝와이드’에서 다섯달간 뉴스 브리핑 꼭지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터니티는 오는 14~15일 경기 광명 아이벡스 스튜디오에서 데뷔 2년 만에 첫 단독 콘서트를 한다. 가상 아이돌 단독 공연은 이번이 처음이다. 허인경 펄스나인 실장은 “새달 발표할 첫 정규 앨범 곡들을 공연에서 미리 선보일 예정이다. 이달 말에는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영국 런던에서 여는 신기술 융합 콘텐츠 전시에도 참여한다”고 귀띔했다.
올해 초 데뷔한 4인조 가상 걸그룹 메이브는 게임회사 넷마블 계열사 메타버스엔터테인먼트와 카카오엔터테인먼트가 합작했다. 막강한 기술과 자본, 엔터산업 노하우를 바탕으로 탄생한 메이브의 데뷔곡 ‘판도라’ 뮤직비디오는 유튜브에 공개한 지 8개월여 만에 조회수 2600만건을 넘겼다. 지상파 음악방송에도 출연했다. 류정혜 메타버스엔터테인먼트 부사장은 “지금 전세계적으로 인기인 케이팝과 첨단 기술을 결합해보자는 취지로 메이브를 만들었다. 가상 아이돌은 7년마다 재계약으로 맘 졸일 필요도 없고, 떴다고 해서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는다는 게 큰 장점”이라고 설명했다.
올해 3월 데뷔한 플레이브는 게임엔진 전문가가 모인 스타트업 블래스트가 제작했다. 플레이브가 지난 8월 발표한 첫 미니앨범은 초동(첫주 판매량) 20만장을 돌파했다. 초동은 팬덤 규모를 알 수 있는 가늠자로, 20만장이면 웬만한 신인 아이돌을 능가하는 수치다. 플레이브는 지상파 음악방송은 물론 ‘아이돌 라디오’ 콘서트에도 출연했다. 이 콘서트를 제작한 남태정 문화방송 라디오 콘텐츠제작센터장은 “플레이브 무대 반응이 가장 좋았다. 플레이브 팬들은 전날부터 공연장에 와서 줄을 섰다. 실제 아이돌을 대하듯 진심으로 좋아하는 마음이 느껴졌다”고 전했다.
플레이브 팬덤이 탄탄한 데는 실제 아이돌처럼 팬들과 소통한다는 점도 작용했다. 플레이브 뒤에는 각 멤버와 1 대 1로 연결된 실제 사람이 있다. 이들이 말하거나 움직이면 실시간으로 2D 캐릭터로 변환된다. 그래서 팬과의 영상통화도 가능하다. 팬들은 뒤에 실제 사람이 있는 걸 알면서도 정체를 궁금해하지 않고 캐릭터 자체를 좋아한다. 인기 캐릭터 펭수 안에 누가 있는지 궁금해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른 가상 아이돌도 팬과의 소통 강화에 나섰다. 류정혜 부사장은 “메이브 각 멤버도 팬들과 1 대 1 소통을 할 수 있도록 ‘페르소나 에이아이(AI)’를 만드는 실험에 나섰다. 6개월 안에 기초적인 수준의 소통이라도 시작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가상 인간은 나이 들지 않고 일정한 외모를 유지하며 사생활 논란에서도 자유롭다. 그래서 아이돌뿐 아니라 영상 매체, 광고 등에서도 맹활약할 것으로 예상된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이머전리서치는 2020년 14조원 규모인 가상 인간 시장이 2030년에는 700조원 규모에 이를 것으로 예측했다. 남태정 센터장은 “요즘 젊은 세대는 가상 아이돌에 거부감보다 친숙함을 나타내는 경향이 훨씬 강하다. 앞으로 가상 인간 콘텐츠 시장은 더욱 확대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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