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싶은 길] 화엄사 암자 순례길
(구례=연합뉴스) 현경숙 기자 = 지리산, 설악산, 덕유산 주 능선은 '3대 산악 종주' 코스로 통한다. 지리산 화엄사나 성삼재에서 시작해 천왕봉을 지나 산청 중산리나 대원사 계곡으로 하산하거나, 아니면 함양 백무동으로 내려오는 종주는 걷기와 산을 좋아하는 여행자들의 '로망'일 것이다.
지리산 종주 코스 중 가장 어려운 코스로 화엄사-대원사, 화엄사-중산리 코스가 꼽힌다. 화엄사 코스가 어려운 것은 성삼재에서 시작하는 것보다 거리가 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화엄사에서 노고단으로 오르는 코재 구간이 가파르기 때문이다. '코재'는 코가 땅에 닿도록 등허리를 구부리고 올라야 할 정도로 경사가 급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화대종주(화엄사-대원사) 코스와 화중종주(화엄사-중산리) 코스의 거리는 각각 46.2㎞, 37.9㎞이다. 100리를 넘나든다. 지리산 종주는 체력과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한 대부분의 도보 여행자에게 '넘사벽'(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이다.
'멍때리기' 좋은 암자 순례
그런데 오랜 시간 능선을 타지 않더라도 지리산 기운에 흠뻑 젖어 걸을 수 있는 길이 있다. 화대, 화중 종주 코스의 시작점인 화엄사에서 시작해 연기암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화엄사 입구로 내려오는 암자순례길이다. 거리는 6㎞ 남짓. 화엄사 원찰인 연기암을 포함해 일곱 암자를 돌아볼 수 있다. 7암자는 산 위쪽에서 아래로 내려오면서 연기암-청계암-보적암-미타암-내원암-금정암-지장암 순으로 돌게 된다. 암자에 머무는 정도에 따라 순례에 걸리는 시간은 다를 것이다. 화엄사 입구에서 연기암까지 가는 길이 줄곧 오르막이나 그리 힘들지 않으며 연기암부터 지장암까지는 대부분 내리막이고, 길이 잘 다듬어져 있어 멍때리기, 즉 마음 비우기나 생각 없이 걷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치유·효심·애국의 감동
암자 순례길은 치유의 숲길, 어머니 길로도 일컬어진다. 역사에 주목하는 연구자들은 '벽암 선사 길'이라고 부르고 싶어 한다. 화엄사에서 연기암에 이르는 길은 2.1㎞로, 화엄사 계곡을 따라 나 있다. 우렁찬 계곡 물소리를 들으며 녹음 짙은 숲속을 걷다 보면 몸과 마음이 누그러진다. 치유의 숲길이라고 지칭되는 이유다. 계곡 옆 숲길을 걸으면 눈, 귀, 코, 피부의 감각을 통해 이중, 삼중으로 힐링 효과가 일어난다. 눈을 편안하게 하는 숲, 나무들이 내뿜는 항균물질, 물·바람·새 소리, 계류에서 나오는 음이온 등이 몸을 이롭게 한다.
마음은 몸에서 생겨나기 때문에 몸이 상쾌해지면 마음도 편해진다고 한다. 늦여름의 햇볕은 고집스럽게 뜨거웠다. 치유의 숲 속에 드니 몸과 마음이 금세 달라져 나아갈 듯 가벼워진다. 화엄사∼연기암 길은 화엄사의 창건주 연기 조사가 어머니를 업고 올랐다는 효심의 길로도 유명하다.
벽암 각성(1575∼1660) 대사는 화엄사 중창의 주역일 뿐 아니라 임진왜란, 병자호란에 참전해 활약했던 큰 스님이다. 벽암은 임진왜란 때 해전에 참여해 큰 공을 세웠으며, 1624년(인조 2) 남한산성을 쌓을 때 팔도도총섭으로 임명돼 승군을 이끌고 3년 만에 성을 완성했다. 1636년 병자호란이 터지자 승군 3천여 명을 이끌고 호남 관군과 함께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중 전쟁이 끝나자 승군을 해체하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화엄사 주요 전각이 임진왜란 때 불탄 뒤 그가 중수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그의 공로를 조정이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인조는 화엄사 중창을 지원했으며 인조의 삼촌이었던 의창군이 쓴 대웅전 편액이 아직 걸려 있다. 벽암은 해인사, 법주사, 쌍계사 중창도 주도했다. 벽암은 무주 적상산성에 있는 사고(史庫)도 보호했다. 임세웅 구례군 문화관광해설사는 "숲길에 들어서면 왜군에 의해 화엄사가 불타고 나서 이 길을 걸었을 벽암의 아픈 심정이 전해오는 듯하다"며 벽암이 아니었다면 오늘날의 화엄사가 있기 어려울 것이라고 강조했다. 벽암은 입적의 순간에도 국은에 보답하라는 유지를 남겼다.
화엄사 원찰 연기암
7암자 중 불자와 길손이 가장 많이 찾는 암자는 해발고도 530m에 자리 잡은 연기암이다. 인도의 고승 연기 조사가 창건한, 화엄사의 원찰이다. 연기 조사는 어머니와 함께 한국에 와 백제 성왕 22년(544년) 화엄사를 창건한 것으로 여겨진다. 연기암에는 높이 13m에 달하는 문수보살 입상이 섬진강과 구례 시가지를 내려다보고 있다. 연기암은 섬진강과 구례가 어우러지는 풍광을 감상하기 좋은 장소이기도 하다. 연기암에는 티베트 불교에서 사용하는 수행 수단인 황금색의 대형 마니차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마니차 안에는 불교 경전이 들어 있는데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마니차를 돌리면 경전을 읽은 것과 같다고 간주한다. 글을 읽지 못하거나 시간이 없어 경전을 읽기 어려운 신도들을 위해 고안한 도구이다.
청계암은 보수 공사 중이었다. 청계암 스님은 걷기 수행자로 알려져 있었다. 산봉우리들로 둘러싸인 보적암에서 보이는 것이라고는 산군과 숲밖에 없었다. 번잡스러운 인간계에서 벗어나 자연에 파묻히고 싶다면 보적암이 제격일 것 같았다. 미타암과 지장암은 비구니스님들의 수행처였고 내원암은 여염집처럼 아담했다. 금정암은 웬만한 사찰에 버금갈 만큼 큰 암자였다. 이 암자 입구에는 금빛 샘물이 솟는다는 금정이 불자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지장암 옆으로 돌아가니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올벚나무가 세월과 함께 굽이치는 역사를 지켜보고 있었다. 추정 수령은 약 300살. 올벚나무는 다른 벚나무보다 꽃이 일찍 핀다. 높이 약 12m, 뿌리 부분 둘레 4.42m인 이 나무는 병자호란 이후에 심어진 것으로 보인다. 호란의 치욕을 겪은 인조는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활을 만드는 데 쓰는 벚나무를 많이 심게 했다.
벽암 선사는 그에 호응해 화엄사 주변에 올벚나무를 많이 심었다. 그중 한 그루가 살아남아 호국 의지를 증거하고 있다. 구례 섬진강 벚나무 길, 섬진강 지류인 서시천 벚나무 길, 하동의 십리벚꽃길 등 지리산 주변 벚나무 길들의 시작 점이 이 올벚나무이다. 7암자 순례는 지리산을 몸으로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3년 10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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