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섬산로드 장봉도] 바위에 새겨진 12억 년의 그리움

신준범 2023. 10. 6. 0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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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봉과 가막머리전망대 잇는 산행과 기묘한 해안 습곡 바윗길 여행
수평선이 선명한 서해바다를 볼 수 있는 운수 좋은 날이었다. 티 없이 맑고 푸른, 여름 같은 가을이다. 평범한 항구도 젊은 산꾼 윤소영·김태욱씨가 등장하자 한 폭의 그림이 되었다. 한낮의 야달선착장.

12억 년, 영겁의 세월을 찾아 왔다. 장봉도에서 처음 발견되어 장봉편암이라 명명된 바위를 보러 왔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고도 이토록 섬세한 모양이 가능할까 의문이 드는 물결 바위였다. 자를 대고 줄을 그은 듯, 얇은 바위 층을 겹겹이 쌓은 듯 독특했다.

12억 년 전, 지각 변동으로 바다에 들어간 암석이 열과 압력을 받아서 모양이 변했다. 물결 무늬처럼 휘어진 습곡褶曲이 되었고, 긴 세월 파도와 바람을 받아내어 약한 암석은 깎이고, 강한 성분은 덜 깎이는 차별 침식으로, 독특한 모양이 되었다.

산꾼 방식대로 산 정상을 거쳐 능선을 타고 섬 끝까지 가서, 썰물이 되었을 때해안선의 장봉편암을 찾기로 했다. 지난여름 여행객으로 붐볐을 배 안은 허전함이 감돈다. 씩씩하게 배낭을 메고 내리는 남녀는 윤소영(@san_100.doran), 김태욱(@himalaya_david)씨다. 일반적인 등산을 넘어 넘어 히말라야 임자체(6,189m)를 등정한 고산등반 커플이다.

가막머리전망대에서 정해진 산길을 벗어나 바닷가로 내려섰다. 썰물의 해안선을 따라 장봉편암을 찾아 나섰다.

한 무리의 등산객이 인어동상에서 기념사진을 찍는다. 동상 위에 올라가 특정 부위를 만지고 어깨동무를 하자, 지나던 어르신이 버럭 한다. 옛날 장봉도에 최씨 어부가 살았다. 어느 때부터인가 물고기가 잡히지 않아 살림살이가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물을 끌어올리는데, 상반신은 아름다운 여인이고 하반신은 물고기인 인어가 잡혔다. 어부는 눈물 흘리는 인어를 바다로 돌려보내 주었다. 그날 이후 그물을 던질 때마다 물고기가 가득 올라왔고, 최씨는 인어가 은혜를 갚았다고 여겼다.

국내 인어 전설은 거문도와 장봉도에서만 전하며 조선시대 정약전이 쓴 어류백과격의 <자산어보>에도 기록이 실려 있다. 거문도 전설에선 인어가 나타나 돌을 던지거나 소리를 내면 풍랑이 올 것을 미리 알려 주는 것으로 여겨, 일종의 수호신으로 여겼다. 이렇듯 매혹적인 외모에 대한 묘사며, 풍랑을 알려 주는 것이나, 풍어를 가져다 주는 것까지 동서양에 전하는 인어 이야기는 묘하게 닮아 있다. 인어 덕분인지, 장봉도는 조선시대 3대 어장에 꼽힐 만큼 고기가 많이 잡혔으며, 20년 전까지 새우 잡이의 메카였다고 한다.

어르신 마음이 조금은 헤아려진다. 단순히 관광객 볼거리로 만든 동상이 아니라, 섬의 내력이 깃든 형상인 것. 장봉도는 길 장長에 봉우리 봉峰을 쓴다. 말 그대로 섬이 길쭉하고, 봉우리들이 솟아 유래한다. 100m대의 낮은 능선이 길게 뻗었는데 BAC 인증지점은 최고봉인 국사봉(150m)이다. 도로가 있는 말문고개에서 곧장 산길로 든다.

있으면서 없는 경지에 이르다

여름이 부쩍 길어진 인상을 주는 햇살이다. 숲으로 들자 소사나무의 앙증맞은 잎들이 촘촘히 그늘을 내어준다. 몸이 풀릴 만하자 정상이다. 낮은 정상이라도, 정상은 반갑다. 쉼터로 제격인 팔각정이 있어 풍경에 간식을 곁들이기 제격이다. 좁은 바다 건너 쉼 없이 비행기가 날아오른다. 어느 나라로 가는지, 어떤 사연을 가진 여행자들인지 잠깐 궁금했으나 남은 산길이 잡념을 삼킨다.

능선에 몸을 싣고 물결처럼 장봉도를 걸었다. 화려한 바위도, 예쁜 꽃도 없는 평범한 숲길이지만, 걸을수록 몸과 마음이 정화된다. 흘러내린 땀방울에 놓지 못했던 집착과 불안이 담겨 있어 비릿한 냄새가 나는 것이라, 이 산행이 끝나면 더 자유로워지고 성숙해질 것이라 믿으며 걷는다.

쉽지만 쉽지 않다. 오르내림이 크지 않아 속도를 낼 수 있으나, 끝이 없다. 다 왔나 하고 스마트폰을 보면, 서쪽 끄트머리는 아직 멀었다. 봉수대가 있는 봉우리에서 모처럼 경치가 터진다. 남쪽으로 드러난 모래섬들. 썰물 때만 드러나는 바다 위 사막 풀등이다. 풀이 자라는 것도 아니지만 썰물 때 드러나는 사막 같은 모래섬을 서해사람들은 풀등이라 부른다.

장봉선착장에는 여행자 안내소를 비롯해 인어동상과 장봉도 영문명이 새겨진 작은 공원이 있다.

언젠가 배를 타고 풀등에 간 적 있다. 파도의 지문이 새겨진 모래 위를 맨발로 걸을 때의 촉감은 잊을 수 없다. 섬도 바다도 아닌, 있으면서 없는 공문空門의 경지에 이른 이름 없는 풀등이 곳곳에서 떠올랐다. 텐트 치고 가만히 앉아 풀등이 물에 잠겼다 떠올랐다 하는 것만 보고 있어도 인생이 금방 지나갈 것 같았다.

서쪽 끝 가막머리전망대는 뙤약볕이 지배하고 있었다. 백패킹 명소지만 한낮의 전망데크에는 아무도 없었다. 장봉편암을 찾아가는 여행은 이제 시작이다. 해안선 비탈을 따라 이어진 걷기길인 갯티길이 있으나 해변으로 내려갔다. 예상대로 썰물이 절정을 이룬 시간이었다.

윤소영·김태욱씨는 지난해 히말라야 임자체(6,189m)를 등정했다. 김태욱씨는 에베레스트 남벽 등반을 꿈꾸는 젊은 고산등반가다.

암벽등반에 능한 김태욱·윤소영씨는 편안하게 바위를 넘나들었다. 암벽등반을 못 해도 어려운 수준은 아니었으나, 정해진 길이 없는 바위 더미 속에선 한 발 한 발 디딜 곳을 정해야 한다. 바다가 잠시 떠나간 사이 동굴을 찾았다. 깊지 않은 동굴이었으나 강렬한 햇살을 피해 한숨 돌리기엔 안성맞춤이었다. 동굴 안에서 본 바다는 둥근 액자 안에 쏙 들어온 것이, 작품이었다. 액자 속 무인도인 동만도·서만도가 덩그러니 놓여, 갈 수도 올 수도 없으나 서로를 의지하고 있었다.

해안선을 한 굽이 돌아설 때마다 실망했다. 장봉편암은 없고, 곤혹스런 갯벌이 갈수록 넓어졌다. 단단한 흙이라 생각하고 밟았는데 늪처럼 발이 푹 빠졌다. 징검다리 넘듯 폴짝 뛰며 바위만 밟아 걸었다. 간혹 흔들리는 바위를 밟을 때면 춤추듯 휘청이며 균형을 잡았다. 무더위는 예상치 못한 복병이라, 두 사람은 연신 땀을 닦았다.

해안선의 얕은 동굴. 썰물 때에 맞춰가야 볼 수 있다.
가막머리전망대에서 윤옥골로 이어진 해안선을 걷는 윤소영·김태욱씨. 썰물 때만 지날 수 있다.

12억 년 습곡의 습격

기대 없이 해안선 모퉁이를 돌아서려 바위에 올라섰을 때, 습곡褶曲의 습격이었다. 켜켜이 쌓인 바다의 말. 얼마나 간절했으면 12억 년간 바위에 진심을 새겼을까. 바위에 새겨진 12억 년의 그리움이다. 눈부신 바다와 찰랑이는 파도. 아무도 없는 바위 해변을 감탄하며 걸었다. 손으로 어루만지고 찰나가 아까워 폰으로 영상을 찍었다.

억겁의 세월을 감히 이해할 수 있으랴. 암호 같기도 하면서 일관된 선으로 남긴 습곡은 경이로웠다. 수 만 번, 수십 억 번, 그 이상 갈망하고 소멸했을 바다의 마음. 감히 짐작할 수 없었다. 상상 밖에 있는 바다와 돌의 시간 위를 걸었다. 오묘한 바위를 만지며 느리게 걸었다. 어느새 바다가 편암 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독특한 무늬의 습곡인 장봉편암을 즐기며 걷는다. 장봉도에서 처음 발견된 습곡이라 이름 붙었으며, 다른 곳에서 발견된 이런 바위도 장봉편암이라 부른다.
건어장해변 곁으로 해가 진다. 애틋한 연인처럼 서만도·동만도가 붙어 있다. 사람 없는 무인도다.

윤옥골(유노골)에서 임도로 올라섰다. 몇 채의 집이 있어 태욱씨가 날진 수통에 지하수를 얻어왔다. 집주인이 마셔도 되는 물이라 하여 들이켰더니 시원함이 내장 깊숙이 퍼질 만큼 개운했다.

숙소가 있는 건어장해변까지 해안 걷기길을 따랐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윤옥골에서 걷기를 마치는 탓에 풀이 높았다. 의외로 가팔라 남은 체력을 쏟아 붓기에 제격이었다. 해변에서 멋진 노을을 담고 싶었으나 산길에서 해가 저문다. 낮다 하여 만만히 볼 수 없는 섬 산행임을 실감하며, 계단을 내려서자 건어장해변이다.

바다 끝으로 사그라지는 노을을 곁에 두고, 건어장해변을 걷는다. 자갈해변이라 디딜 때마다 자박 자박 소리가 나는, 개구쟁이 같은 해변을 걸었다. 노을이 저무는 소리가 날 턱이 없는데, 골골골 하는 소리가 났다. 자갈 틈으로 물결이 찼다가 빠지는 소리였다. 저토록 뒤끝 없는 소멸이 있을까. 완벽한 어둠으로 끝맺는 저녁이 부러웠다.

섬 여행 가이드2010년대 이후 줄곧 수도권 인기 섬 1~2위를 다투는 섬이다. 배를 타고 갈 수 있는 섬 중에서 이토록 편히 다녀올 수 있는 섬은 드물다. 영종도 삼목선착장에서 아침 7시부터 저녁 8시까지 배가 운항한다.

장봉도선착장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등산로 입구가 나온다. 상산봉을 시작으로 능선을 종주해 BAC 인증지점이자 섬 최고봉인 국사봉을 거쳐 서쪽 끝인 가막머리전망대까지 갈 수 있다. 여기서 해안선 걷기길을 따라 건어장해변까지 돌아오는 산행이 총 14km이며 6시간 정도 걸린다. 건어장해변은 버스 종점이라 산행 종착지로 효율적이다. 장봉편암을 보려면 썰물일 때를 맞춰서 가야 한다. 바닷물때표 사이트 참조(badatime.com).

교통 공항철도 운서역에서 1번 출구로 나와서 204, 307, 16번 버스를 타면 삼목선착장에 닿는다. 25분 정도 걸린다. 삼목선착장에서 30여 분 간격으로 운항하며, 신도를 거쳐 장봉도에 닿는다. 장봉도에서 신도를 거쳐 삼목으로 돌아간다. 장봉도까지 40여 분 걸리며, 요금은 3,000원. 첫배는 아침 7시이며, 마지막 배는 저녁 8시 10분. 신분증이 있어야 하며 예약은 받지 않는다. 배편이 잦아 예약 없이도 발권이 어렵지 않다. 세종해운과 한림해운에서 번갈아 운항한다.

섬 내에는 마을버스가 운행한다. 장봉선착장에서 말문고개를 거쳐 장봉2리와 3리를 거쳐 건어장해변에 닿는다. 건어장해변에서 역순으로 되돌아 나간다. 현금 1,000원(교통카드 950원). 청소년 700원(교통카드 600원), 어린이 400원(교통카드 350원)이며, 현금으로 낼 경우 잔돈을 거슬러주지 않는다. 미리 잔돈을 준비하거나 교통카드를 사용해야 한다. 환승불가이므로 하차 시 카드를 찍을 필요 없다.

숙식 장봉도 플러스 가이드 참조

야달선착장 해안길을 걷는 두 사람. 야달선착장 일대는 도로가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다.
BAC 인증지점인 국사봉 정상. 도로가 지나는 말문고개에서 400m만 오르면 닿는다.

월간산 10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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