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게·조개·낙지 찾아 달빛 아래 밤바다로 [ESC]
‘바다 위 보물찾기’ 채집 취미
조수간만 큰 ‘대사리’가 적기
욕심은 금물…금어기 지켜야
우리 팀에 이지선이라는 카피라이터가 있다. 그녀는 좀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는데, 일본에서 공부하고 일본 광고회사에서 일을 배운 카피라이터다. 일을 배운 곳이 일본이라 그런지 원래 성격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녀는 조용하고 예의 바르며, 사뿐사뿐한 느낌인데, 광고회사에 몇 없는 차분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다.
그런 그녀가 어느 날 조심스럽게 휴가를 가도 되겠냐고 물었다. 뭔가 아주 중요한 일이 있다는 느낌. 이럴 땐 왜 가는지 묻지 않는 게 예의라고 생각하는데, 혹시 집에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 “기왕에 가실 거면 주말 끼어서 가지 왜 주중에 가시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생각지도 못한 반가운 대답을 했다. “아. 그때가 대사리라서 꽃게 잡으러 가야 해요”. 대사리! 대사리라니! 나는 내 낚시 친구들 말고, 고향에 있는 우리 어머니 말고, ‘대사리’라는 단어를 서울 한복판의 회사 회의실에서 들을 줄은 몰랐다. 오랜 만에 고향 친구를 만난 느낌. “지선 카피님! 대사리라고요? 진작 얘기하지 그랬어요!” 그녀는 해루질을 진심으로 대하는 사람이었다.
서해 낙지, 동해 바지락, 남해 전복
바다에는 많은 생물이 산다. 낚시가 그중 물고기만을 표적으로 삼아 사냥에 가까운 취미라면, 해루질은 바다에 사는 모든 생물들을 대상으로 하는 보물찾기에 가까운 채집이다. 서해에선 낙지와 꽃게를 으뜸으로 치고, 동해에서는 바지락·명주조개 같은 조개류를 주로 채집하며, 남해와 제주에서는 바위에 붙은 소라·전복 등이 해루질 대상으로 각광 받는다. 그리고 가을은 서해 꽃게의 계절이다. 여름 피서객이 빠지기 시작하는 해수욕장엔 꽃게들이 다시 자리를 잡는다.
인천 무의도에 있는 하나개 해수욕장, 안면도에 있는 삼봉 해수욕장, 꽃지 해수욕장 등이 해루질 포인트로 유명한데, 이 글을 보고 처음 해루질을 알게 됐다면, 별다른 장비 없이 호미와 양파망만 들고 가면 되는 바닷가 어촌 마을들의 갯벌체험 프로그램을 활용하는 것도 좋은 선택이다. 각 어촌계에서 운용하는 갯벌체험에선 아이들과 함께 바지락 캐기 등의 간단한 해루질을 할 수 있다. 바지락 종패(씨조개)를 뿌려 둔 양식장에서 하기 때문에 어린아이들도 안전하게 할 수 있고 무엇보다 ‘수확’이 보장된다.
그러나 ‘양식장 종패’가 아니라, ‘진정한 자연산을 내손으로 채집해 꽃게찜을 해먹겠다’ 마음먹었다면 공부를 좀 해야 한다. 우선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물때’. 서두에 ‘대사리’라는 용어가 나왔는데, 사리란 한달에 두 번, 보름달이 뜨거나 그믐일 때 바닷물이 더 많이 빠지고, 더 많이 들어오는 것을 말한다. 바닷물은 달의 인력의 영향을 받아 들어오고 나가기를 반복한다. 기억하기 쉽게도 보름이나 그믐일 때 물이 많이 들고 많이 나며, 반달이 떴을 때를 조금이라고 부르는데 바닷물이 덜 빠지고 덜 들어온다. 특히 그중에서도 조석차가 큰 사리가 ‘대사리’다. 보름달이 뜨거나 달이 뜨지 않는 그믐 때가 해루질을 하기 좋다고 정리하면 된다.
사리 때가 위험하다는 점도 반드시 숙지해야 한다. 우리나라 서해안은 세계적으로도 조석간만의 차가 큰 바다인데, 물이 빠르게 나가고 빠르게 들어온다. 물의 속도를 대략 계산해보면 빠를 때는 어른 걸음걸이의 대략 세배 정도. 물속에서 날아다니듯 헤엄치는 꽃게를 추적하다가 자칫 잘못하면 고립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지선 카피는 꼭 ‘알람’을 맞춰 두고 해루질을 한다고 했다. 물이 완전히 빠지는 ‘간조’ 시간을 검색해 스마트폰에 알람을 맞춰 두고 간조가 되면 미련 없이 나갈 준비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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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인 만큼 수확하는 취미
해루질을 잘하려면 생물 공부도 해야 한다. 어떤 환경에서 어떤 생물이 서식하는지, 어떤 먹이를 주고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 동해의 바지락 서식지는 파도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수심이 갑자기 얕아지는 수중 모래 언덕 같은 지형이 생기는 곳 주변이다. 이곳에서 발로 모래를 슬쩍슬쩍 훑어오면 모래에서 깊지 않은 곳에 바지락이 산다. 서해에서는 어느 해수욕장이든 물때를 잘 맞춰서 간조에서 한두시간 정도 일찍 바다에 들어가야 한다. 아이들과 함께라면 그래도 안전한 낮에 집중해야 하고, 채집이 진정한 목적이라면 밤바다가 유리하다. 대부분의 생물들이 낮보다 밤에 활동성이 더 좋기 때문이다.
범위를 넓게 잡고, 의심 가는 곳은 들춰보거나 파보면서 걸어간다. 해루질은 ‘바다 위 보물찾기’인 만큼 의심되는 돌 밑이나 동그랗게 숨구멍이 올라와 있는 작은 구멍들을 파봐야 한다. 이 작은 구멍에 낙지가 살 수 있을까 싶은 곳에도 낙지가 있을 때도 있다. 참 신기하다.
해루질을 하면서도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은 금어기와 금지체장(어획이 금지되는 무게)이다. 특히 금어기는 산란 시기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기 때문에 풍요로운 바다 환경을 위해서도 욕심내지 않는 마음이 중요하다. 어촌계에서 뿌려 둔 양식장에 침입해서도 안 된다. 우리가 하는 것은 생업이 아니라 취미 활동이니까.
“광고 아이디어는 10개를 고민해도 1개가 채택될까 말까 한데, 해루질은 일한 만큼 결과물이 있어 좋아요.”
이지선 카피가 해루질의 재미를 이렇게 표현했다. 광고업계는 스트레스가 심한 직업군인데, 그녀는 달 밝은 밤 잔잔한 물속을 걸으며 그 스트레스를 풀고 있었다. 꽃게도 잡고, 조개도 캐고, 운 좋으면 낙지가 걸리기도 하고.
그녀와 함께 준비하던 광고 경쟁 입찰에서 최근 떨어졌다. 허탈함에 누구는 술을 마시러 갔고 누구는 휴가를 쓰고 집에 처박혔다. 몇주를 투여한 우리의 고민이 의미 없는 일이 돼버리면서 공허함을 느끼던 차에 갑자기 “일한 만큼 결과를 얻어 좋다”는 말이 생각났다. 나도 이번 사리에는 해루질이나 좀 해야겠다.
허진웅 이노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낚시든, 악기든, 오토바이든, 세차든, ‘너 좋아하는 게 뭐야?’ 라고 물었을 때 무언가 한가지 서슴없이 대답할 수 있는 삶이야말로 좋은 삶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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