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기자생활] 가짜 사인볼과 잠실야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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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시절, 야구를 좋아해 한 프로야구 구단에서 모집하는 '대학생 서포터즈'에 참여했다.
그 덕에 일반 관중은 접근할 수 없는 야구장 구단 사무실에서 경기를 근접 관람했다.
당시 야구장 한구석에선 구단 간판선수들의 사인이 박힌 새 야구공을 쌓아둔 상자가 종종 눈에 띄었는데, 그 옆에서는 마케팅팀 과장이 다리를 꼬고 앉아 탁자 위에 올려둔 선수의 진짜 사인을 힐끔힐끔 보며 사인을 대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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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기자생활]
손지민ㅣ 전국팀 기자
대학생 시절, 야구를 좋아해 한 프로야구 구단에서 모집하는 ‘대학생 서포터즈’에 참여했다. 그 덕에 일반 관중은 접근할 수 없는 야구장 구단 사무실에서 경기를 근접 관람했다. 당시 야구장 한구석에선 구단 간판선수들의 사인이 박힌 새 야구공을 쌓아둔 상자가 종종 눈에 띄었는데, 그 옆에서는 마케팅팀 과장이 다리를 꼬고 앉아 탁자 위에 올려둔 선수의 진짜 사인을 힐끔힐끔 보며 사인을 대필하고 있었다. 유명 야구 선수의 사인 볼은 그렇게 과장 손에서 대량생산됐다. 유명인의 사인이 그려진 물건을 볼 때마다 ‘자기가 한 진짜 사인일까?’라는 의구심이 일기도 했지만, 막상 눈앞에서 대필 장면을 목격하니 거북함이 밀려왔다.
“사인 볼은 다 이렇게 과장님이 만드시는 거예요?”
“바쁜 선수들이 언제 사인을 하고 있겠어.”
“그건 그렇지만…. 이래도 되는 거예요?”
“괜찮아. 어차피 몰라.”
새삼 오래전 일화가 떠오른 이유는 최근 잠실 돔구장 대체 구장 논란 때문이다. 서울시는 지난달 19일 야구장이 있는 잠실종합운동장 일대를 ‘스포츠·마이스(국제회의·박람회 등을 개최하는 산업, MICE) 단지’로 개발하고, 2025년부터 2031년 말까지 잠실야구장을 돔구장으로 새로 짓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잠실야구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해온 두산 베어스와 엘지 트윈스의 대체 구장은 확정하지 못했다.
야구계는 잠실야구장 공사 기간에는 옆에 있는 잠실주경기장을 대체 구장으로 쓸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주경기장도 개발 사업이 진행되는 종합운동장의 일부지만, 리모델링만 하기 때문에 대체 구장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주경기장을 야구장으로 개조하면 관중을 1만8000여명까지 수용할 수 있단다. 그러나 주경기장을 제외한 종합운동장 전체에서 큰 공사가 진행되는 만큼 안전사고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주경기장 7개 진입 통로 중 봉은교 진입로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공사용 펜스로 가로막힌다. 경기가 끝나면 수많은 관람객이 한번에 폭 6m의 경사로를 통해 봉은교로 나가야 한다. 다른 진입로를 만드는 방안은 주변 공사 때문에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대체 구장 지정을 마무리하지 않은 채 설익은 사업을 발표한 서울시도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안전 문제가 있는 주경기장이 최선의 대체 구장이라 주장하는 야구계에도 아쉬움이 남는다. 대체 구장으로 거론됐던 목동·효창운동장은 너무 좁고 키움 히어로즈 홈구장인 고척스카이돔을 함께 쓰기도 불편한 건 사실이다. 서울 연고인 두 구단이 인천, 수원까지 가기 힘든 것도 이해된다. 하지만 이런저런 불편함보다도 중요한 것이 안전이다. 우리는 이미 ‘설마 그런 사고가 일어날까’란 안일한 마음으로 지난해 이태원 참사를 겪었다. 안전 우려에도 주경기장이 최선이라 주장하는 모습에선 “이래도 되는 거예요?”란 말에 ‘신뢰’라는 가치는 외면하고 “괜찮아. 어차피 몰라”라고 답했던 마케팅팀 과장이 겹쳐 보인다.
‘괜찮아, 어차피 사고 안 나’, ‘위험한지도 사람들은 모를 거야.’ 이런 마음은 접어두면 좋겠다. 팬들에게 익숙한 잠실에서 좋은 경기를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것도 필요하다. 서울시와 야구계가 이달 초 1차 통합협의체를 구성한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야구와 안전 모두를 위한 최선의 답을 찾기 바란다.
sj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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