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어 통역 생기고 ‘농아미’ 활동이 두배로 즐거워졌어요”
많은 사람들이 대중문화 영역에서 장애인의 이야기를 ‘공연장의 불충분한 휠체어 좌석’ 같은 것으로만 접한다.
하지만 장애에는 다양한 모습이 있다. 청각장애가 있는 김유진씨는 보청기를 끼고 BTS의 노래를 들으며 ‘덕질’을 한다. 시각장애가 있는 ‘K팝 덕후’ 양지우씨는 귀로 온갖 걸그룹 멤버들의 목소리를 구분한다.
역시 시각장애인인 ‘뮤덕(뮤지컬 덕후)’ 김민주씨는 볼 수 없는 뮤지컬의 빈칸을 채우기 위해 유튜브 리뷰 영상을 찾아본다. 조금 다른 감각, 조금 다른 방식으로 덕질을 하는 이들을 만나봤다.
네일리스트 김유진씨(36)의 고개가 ‘까딱까딱’ 일정하게 좌우로 리듬을 탄다. ‘타탁탁탁’ 가볍게 발을 구르는가 싶더니 이번엔 주먹 쥔 양손을 머리 위로 들었다 놨다, ‘짝짝짝’ 세 번 박수를 친다. 방탄소년단(BTS) 제이홉이 피처링해 화제가 된 크러쉬의 곡 ‘러시아워’의 포인트 안무다. 손님이 드문 오전이면, 경기 의정부에 자리한 유진씨의 아담한 네일숍은 작은 콘서트장이 된다. 그런데 매장에는 그 흔한 스피커도 하나 없다. 온통 고요한 가운데 유진씨의 발 구르는 소리가 이따금 날 뿐이다. 벽면을 가득 채운 매니큐어들 옆에 걸린 플래카드에는 BTS 멤버 뷔의 얼굴과 함께 “농아미도 방탄 좋아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유진씨는 ‘농아미’(농인+BTS 팬 아미)다. 지난달 26일 오전 찾은 그의 매장 곳곳에는 BTS의 흔적이 있었다. 눈길 닿는 곳마다 BTS의 앨범과 포스터, 피규어 등 굿즈가 자리했다. 매장 문을 연 유진씨의 일과는 오른쪽 귀에 낀 파란색 보청기를 태블릿 PC와 연결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블루투스 아이콘에 불이 들어오면 그만의 음악 세계가 펼쳐진다.
청각장애인의 덕질법
청각장애인도 ‘덕질’을 한다. 사람마다 청력이 천차만별이라 그 방법이 조금씩 다를 뿐이다. 유진씨의 경우 보청기의 도움을 받으면 음악을 들을 수 있다. 청인과 다른 점이 있다면 노래 가사를 먼저 외워야 노래를 즐기기 수월하다는 것 정도다. “저는 가사를 외워야 곡을 알아듣거든요. 주변 농인 팬들에게 물어보면 각자 달라요. 안경 쓰는 분들도 시력이 다르듯 청각장애인도 청력이 다 달라서 각자의 청력에 맞게 즐겨요.”
블루투스 보청기는 청각장애인 ‘덕후’에게 빛과 같은 존재다. 과거에는 이어폰의 음량을 최대로 키워 듣곤 했는데, 주변에 소리가 새어나가 피해를 줄까 노심초사했다. 이젠 어디에서든 음악을 들을 수 있다.
유진씨는 수어가 제1언어인 농인들이 청인들과 다른 감각으로 가사를 받아들인다고 설명했다. “한국어와 한국 수어는 문법 체계가 달라요. 예를 들어 한국어로 ‘비가 온다’는 수어로 ‘비가 있다’로 번역돼요. 농인에게는 시각적인 게 더 중요하거든요.”
‘농아미’도 할 건 다 한다. CD와 굿즈를 사 모으고 자체 콘텐츠를 챙겨본다. 팬덤 플랫폼·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아티스트와 소통도 한다. 농아미들이 모인 단체채팅방에서는 하루종일 BTS로 이야기로 꽃을 피운다. 2년 전부터는 덕질용 유튜브 채널도 운영하고 있다. 팬미팅·팬사인회 경험담을 공유하거나 댄스 챌린지 영상을 업로드한다. “농인도 춤출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댄스 영상을 올리기 시작했어요. 20대 때 청각장애인을 위한 방송댄스 수업을 들었는데 그 이후에는 유튜브를 보면서 독학하고 있어요. 박자 맞추는 게 어렵긴 해요.”
주력 콘텐츠는 ‘수어 번역’이다. 좋아하는 노래들을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고 싶어 시작한 콘텐츠다. 청각장애인 구독자들의 신청곡을 받기도 한다. BTS의 ‘앤서: 러브 마이 셀프’를 비롯해 10여 곡이 유진씨만의 시각으로 해석돼 수어로 옮겨졌다. 유진씨는 비슷한 활동을 하는 농아미가 적지 않다고 했다. 그는 “해외에도 청각장애인 아미가 많다”며 “한국어 가사를 영어로 번역하고 이걸 국제 수어로 옮긴 다음 또 미국 수어로 옮기는 식이다. 팬들이 자발적으로 하는 활동”이라고 설명했다.
‘20년차 덕후’
유진씨의 덕질은 역사가 길다. 중학생이던 2000년대 초반 한 보이그룹 멤버 A씨에게 빠졌다. A씨를 위해서라면 어디든 마다 않고 갔다. 생애 첫 뮤지컬도 뮤지컬 배우로 활동 무대를 옮긴 A씨의 출연작이었다. 20대에는 한 남성 솔로 가수의 팬이 됐다. 음반을 샀고, 팬사인회와 콘서트에 갔다. 지금은 ‘탈덕’ 상태다. 몇해 전 그가 소속사를 옮긴 후 콘서트의 장애인 할인 혜택이 사라졌는데, 그걸 계기로 마음이 떠났다고 했다. (콘서트 티켓의 장애인 할인 혜택은 법적으로 정해진 바가 없어 소속사의 결정에 달려 있다.)
그러다 아미가 됐다. 외출도 쉽지 않은 팬데믹 시기, 우연히 들은 BTS의 ‘다이너마이트’가 유진씨의 마음을 이끌었다. “평소엔 그냥 뷔가 잘생겼다는 생각만 했거든요. 그러다 ‘다이너마이트’를 들었는데 멜로디가 예쁜 거예요. 그때부터 팬이 됐죠. BTS 노래들은 가사가 철학적이에요. 그래서인지 노래를 들으면 힘이 나고 위로가 돼요.”
덕질을 쉰 몇년 사이 팬 문화는 많이 바뀌었다. 줄을 서기만 하면 갈 수 있었던 팬사인회는 이제 앨범을 수십장 사도 가기 어려워졌다. 유진씨는 “팬 문화가 상업적으로 바뀌었다는 느낌”이라며 “바뀐 팬 문화에 적응 중”이라고 했다.
청각장애인 입장에서 좋아진 점도 있다. 2016년 2월 제정된 한국수화언어법은 수어를 한국어와 동등한 자격을 가진 농인의 고유 언어로 인정하고 수어 사용을 이유로 모든 영역에서 차별받지 않게 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청각장애인이 공연장에서 수어 통역사 배치나 한글 자막을 요청할 수 있게 된 데에는 이 법의 역할이 컸다.
“예전에 한 공연에서 해외 팬을 위한 영어 자막이 나오길래 한글 자막도 해줄 수 있냐고 문의한 적이 있거든요. 근데 거절당했어요. 사회적 인식이 부족했던 거예요. 좌절했죠. 근데 이 법이 생기고 수어 통역이 배치되면서 (덕질의) 즐거움이 2배가 됐어요.”
아미들의 도움도 빼놓을 수 없다. 몇 해 전 한 청각장애인 팬이 SNS에 콘서트 수어통역사 배치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이를 본 다른 팬들이 게시물을 공유하며 ‘화력’을 모았고, 이를 소속사가 보면서 수어 통역을 제공하게 됐다. “수화언어법이 있더라도, 아미들이 힘을 합치지 않았다면 수어통역사 배치가 어려웠을 거예요.”
“어렵고 힘들어도…덕질은 비타민”
‘피케팅’(피튀기게 치열한 티케팅)이라 불리는 티켓 구입은 20년차 덕후에게도 어렵다. 장애인석의 경우 전화 등 별도의 과정을 통해 예약이 가능하지만, 휠체어가 들어갈 정도의 공간을 확보하다 보니 무대와 거리가 먼 경우가 대부분이다. 스피커의 진동으로 음악을 느끼는 청각장애인에게는 아쉬울 수밖에 없다. 실시간 소통이 어려운 ‘영통 팬싸’(영상통화로 하는 팬미팅)나 한글 자막이 실시간으로 제공되지 않는 라이브 방송도 청각장애인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겉으로 장애 여부가 드러나지 않아 곤란한 상황도 생긴다. “팬사인회에서 연예인이 저를 알아보면 시간이 살짝 지연되는데, 제가 청각장애인인 걸 모르는 경호원이 ‘빨리 가라’고 ‘휙휙’ 하시더라고요. 팬사인회를 여러 번 가봤지만 장애인을 위한 시스템은 딱히 없었어요.”
그래도 덕질이 주는 즐거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특히 BTS 멤버들이 수어를 쓸 때면 농아미 커뮤니티가 들썩인다. 지난해 6월 한 라디오방송에 출연한 뷔가 팬을 바라보며 주먹을 자신의 코에 갖다 댔다. ‘좋아해’라는 의미의 수어였다. “저는 하필 그 자리에 없었는데 다들 완전 난리 났어요.” BTS는 수어를 활용한 안무를 선보이는 등 청각장애인 팬과의 소통을 꾸준히 하고 있다.유진씨는 덕질을 ‘비타민’에 비유했다. “저에게 덕질은 비타민이자 활력소예요. 음악을 듣고 있을 때면 흥이 나고 힐링이 돼요. BTS 사랑합니다. ‘아포방포’(아미 포에버 방탄소년단 포에버)!”
https://www.khan.co.kr/culture/popular_music/article/202310060600011
최민지 기자 mi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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