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만 듣고 걸그룹 멤버 맞추기? 자신있죠”···‘청각’으로 아이돌 덕질하기
많은 사람들이 대중문화 영역에서 장애인의 이야기를 ‘공연장의 불충분한 휠체어 좌석’ 같은 것으로만 접한다.
하지만 장애에는 다양한 모습이 있다. 청각장애가 있는 김유진씨는 보청기를 끼고 BTS의 노래를 들으며 ‘덕질’을 한다. 시각장애가 있는 ‘K팝 덕후’ 양지우씨는 귀로 온갖 걸그룹 멤버들의 목소리를 구분한다.
역시 시각장애인인 ‘뮤덕(뮤지컬 덕후)’ 김민주씨는 볼 수 없는 뮤지컬의 빈칸을 채우기 위해 유튜브 리뷰 영상을 찾아본다. 조금 다른 감각, 조금 다른 방식으로 덕질을 하는 이들을 만나봤다.
“아…이거 제목이 뭐였더라? ‘데이식스(DAY6)’인 건 확실해요.”
서울 종로구의 한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바닐라 프라페를 먹던 양지우씨(23)가 말했다. 소음 때문에 휴대폰의 음악 검색 기능도 잘 작동하지 않는 공간이었지만, 그는 인터뷰 중간중간 카페에서 나오는 음악 제목을 거의 다 알아맞혔다. 양씨는 K팝 아이돌 ‘덕후’다. 그리고 태어날 때부터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1급 시각장애인이기도 하다.
“미숙아로 태어나서 선천적인 전맹이에요. 아이돌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좋아했어요. 걸그룹 붐이 있던 때였거든요. 소녀시대를 좋아했어요. 맹학교에서 중창단 활동하던 친구들끼리 ‘우리도 리틀 소녀시대다’ 하면서 파트 나눠서 노래 부르기도 하고요.”
요즘 ‘덕질’ 중인 그룹은 ‘엔믹스’다. 양씨가 아이폰을 오른쪽 귀 가까이 가져다댄 뒤 유튜브 앱을 켰다. 아이폰의 ‘보이스 오버’ 기능이 최대 배속으로 휴대폰 홈 화면에 뜬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유튜브의 최대 배속(2배속)보다 적어도 2배 이상 빠른 속도다.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겐 단어 하나도 알아듣기 힘든 빠르기, 양씨에게는 평범한 속도다. 쭉 듣다 좋아하는 그룹 이름이 나오면 영상을 클릭한다. “…이렇게 보다가 ‘라이브가 아니네’ 하고 그냥 넘기기도 하고, 이렇게 댓글도 하나 달아주고요. 숏츠도 보고요. 그런데 진짜 제 홈 화면에 다 아이돌 밖에 없긴 하네요.”
그 아이돌과 내가 같은 시간에 있다는 것
“목소리만으로 30개 그룹은 구분 가능해요.” 청각만 이용해 덕질을 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스터디’가 필요하다. 양씨는 관심 가는 신인 그룹이 나오면 어떻게든 자기소개 영상을 찾아서 본다. 그룹 멤버의 이름과 목소리를 구분하기 위해서다. “어느 소속사에서 데뷔했다고 하면 거기 들어가서 개인별 소개 영상을 봐요. 라디오 하나만 들어도 목소리는 누가 누군지 금방 익히는 편이에요. 제가 걸그룹 30개 정도 목소리는 구분할 수 있어요. 자신있어요.” 그렇다고 꼭 음성이 중심으로 된 콘텐츠만 접하는 것은 아니다. “엔믹스를 예로 들자면 최근에 나온 자체 콘텐츠가 ‘직장 편’이었어요. 지금 제가 직장 생활을 하다보니 타자 소리 같은 공간적인 것들이 익숙하잖아요? 그런 건 음성 중심이 아니더라도 챙겨보려고 해요. 운동이나 안무 연습 콘텐츠 같은건 못 보지만요.”
인스타그램도 본다. “사진은 못 보더라도 글 써놓은 거 보면 ‘오늘 뭐 했구나’ 스케줄 체크가 되잖아요. 예전부터 V라이브도 꾸준히 봤어요. 그건 댓글이 안 보여도 좋아요. 그 아이돌과 같은 시간에 내가 있다는 게 좋은 거죠.”
다만 시각적 퍼포먼스가 중심이 된 ‘뮤직비디오’를 즐길 방법은 아직 찾고 있다. “사실 춤보다 제가 접하기 힘든 건 뮤직비디오예요. 뮤직비디오가 그 앨범의 콘셉트를 보여주는 건데, 그걸 모른 채로 음악을 듣다보니 약간 반쪽짜리 덕질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가끔은 멤버들 얼굴도 궁금하다. “어느 플랫폼을 가도 그 멤버의 얼굴을 설명해주는 건 없잖아요. 그 부분은 어떻게 해도 대체가 안 돼서 아쉬워요. 설문조사 같은 게 있거든요. 유튜브에 ‘아이돌 고양이상 톱은 뉴진스 해린’ 이런 식으로요. 그럼 이 아이돌들은 조금 뾰족하게 생겼겠구나, 시크한 상이겠구나 하고 짐작하는 거죠.”
양씨는 뮤직비디오도 다른 콘텐츠처럼 ‘화면 해설’ 기능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주변 사람에게 설명해달라고 해도 되는데, 사람마다 설명하는 방식이 다 달라요. 그리고 일단 그 멤버가 누군지를 몰라요. 화면 해설처럼 정형화된 콘텐츠가 있으면 참 좋겠다 싶을 때가 많죠. 예컨대 ‘지우가 음료를 마신다’라고 하면 그건 모두가 똑같이 알아들으니까요. 제가 충격받은 게, 엔믹스가 라디오 나와서 ‘뮤직비디오 그 장면 몇 시간 찍었는데 0.5초 나왔다’고 하는 거예요. 화면 전환이 정말 빈번하다는 걸 그때 알았어요.”
뮤지컬 덕후 민주씨도 유튜브로 ‘리뷰 스터디’
김민주씨(24)도 양씨처럼 1급 시각장애인이다. 김씨는 ‘뮤지컬 덕후’다. 최근엔 <오페라의 유령>을 봤고, <레미제라블>은 서울 공연이 시작하길 기다리고 있다. “뮤지컬은 음악으로 많은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듯해요. 같은 역할을 다른 사람이 했을 때 다른 느낌을 찾는 것도 너무 재미있고요.” 특히 좋아하는 뮤지컬인 <레베카>는 캐스팅이 바뀔 때마다 챙겨봤다.
김씨도 뮤지컬 전후에 ‘스터디’를 한다. “<오페라의 유령>은 친구들이랑 같이 보러갔는데, 1부 끝나니까 친구들이 ‘되게 키스신이 많이 나온다’고 하는 거예요. 이렇게 놓치는 정보들이 있으니까 유튜브에서 말로 리뷰해주는 영상을 많이 찾아봐요. 이를테면 <데스노트>를 보고 싶었는데, 티케팅에 실패해서 못 봤거든요? 그런데 리뷰를 보니 <데스노트>에서 미디어 아트가 엄청 화려하고, 무대를 계속 바꿔가면서 공연한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나중에는 티케팅을 시도하지 않았어요.”
아이돌을 좋아하는 양씨가 가끔 한계를 느끼는 부분이 뮤직비디오라면, 김씨는 티케팅이다. “혼자 예매 시도하는 건 예전에 포기했어요.” 인터넷 예매 시 자신이 클릭한 구역의 좌석을 이미 다른 사람이 예매했으면, 신속히 되돌아가 같은 과정을 반복해야 한다. 단계별로 몇 분씩 늦게 음성 안내를 받아 진행해야 하는 시각장애인의 경우 티케팅 성공 확률이 낮을 수밖에 없다. 몇 초 만에 매진되는 인기 공연의 경우 더욱 그렇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예매 서비스는 큰 공연에서는 전혀 없어요. 1,2초가 중요한데 저희 스스로 티케팅 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해요.”
김씨는 말로 하는 전화 예매도 도전해봤지만, 역시 쉽지 않았다. “2시부터 예매 시작이면 상담원들은 2시 이후에 연결이 돼야만 해줘요. 만약 1시59분에 연결되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엄청 시간 계산을 해서 전화를 걸어도 잘 안 돼요. 그냥 친한 친구나 동생, 언니에게 부탁을 하죠. 그런데 보고 싶은 공연이 많은데 티케팅 할 때마다 부탁하는 것도 참 그렇잖아요. 그런게 너무 불편해요.”
장애인은 뮤지컬 등 공연을 볼 때 복지 할인을 받는 경우가 많다. 김씨는 “할인은 안 해줘도 되니, 예매만 가능하게 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공연 보는 사람들끼리 많이 이야기하는 게 두 가지예요. 복지 할인 안 해줘도 되니까 티케팅을 할 수 있게 해달라, 그리고 어떤 배리어프리 공연에서는 ‘터치 투어’를 진행하거든요. 일찍 와서 무대가 어떻게 생겼는지, 배우들 의상이나 무대 소품들을 만져볼 수 있게 해주는 거예요. 큰 뮤지컬 같은 경우는 그런 게 전혀 없는데, 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하곤 해요.”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310060600001
김한솔 기자 hanso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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