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광주·부산·마산·강남·용산을 응시하여 듣는 ‘침묵의 소리’
최근 9편에 8년 전 등단작 세워
70~90년대 현대사 이면 관통
퀴어·페미니즘 통한 사유와 치유
집요한 ‘소신과 소명의 쓰기’
쿄코와 쿄지
한정현 지음 l 문학과지성사 l 1만7000원
당대 2030 작가들 가운데 근현대사의 실상과 이면에 가장 천착하는 작가로 불릴 만하다. 이때 역사는 ‘바로 세워’지는 것이라기보다 ‘더해 세워’진다. 중요하게 증축되어야 할 것은 견고한 공적 역사에 대비되는 문학적 역사이고, ‘우리’의 역사 이전 ‘나들’의 역사다. 언어로써 가능한 일이며, 소설이 해야 하고 소설이 할 수 있다고 믿는 소설가가 한정현(38)이다. 2015년 등단 이래 지금껏 그가 표명하는 좌표다.
새 소설집 ‘쿄코와 쿄지’는 2020~22년 쓰인 9편과 등단작까지 모두 10편으로 묶였다. 3년 전 소설집 ‘소녀 연예인 이보나’가 이미 나왔지만 등단작은 제외되었다. 대저 작가들의 첫 소설집으로는 흔치 않은 경우다. 소설집 전체를 특정의 세계관으로 꿰어 독자 앞에 세우려는 작가의 기획 의도 때문이다. ‘쿄코와 쿄지’도 한 세계 아래의 연작소설처럼 읽힌다. 각 꼭지의 인물들이 연루되고, 이 상처가 저 상처를 보듬거나 덧대며, 다들 현대사의 그늘에서 침묵을 감당해왔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한정현은 그들에게 언어를 준다.
표제작 ‘쿄코와 쿄지’의 주인공은 1970년대 후반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네 명, 경녀, 혜숙, 미선, 영성이다. 이들은 깊은 우애의 표식으로 이름 끝을 맞추고자 한다. 돌림 공동체로, 먼저 떠올린 항렬자는 ‘아들 자(子)’였다. 이제 우리는 무엇이 되려는가. 뻔한 질문에 수년째 재수하는 오빠로 인해 희생은 물론 상습적 구타까지 당했던 혜숙이 뱉은 한 마디가 계기였다. “아들이 되고 싶어.” 하지만 무리 중 유일한 남성인 영성은 여성이 되고자 했으므로 이들은 ‘스스로 자(自)’를 선택한다.
이윽고 경자 혜자 미자 영자를 맞는 건 1980년 오월 광주다.
소설은 외견상 모녀 각각의 기록을 배치해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처참했던 시대의 파문을 독자들이 짚어가며 짜 맞추고, 감각하도록 한다. 1958년생 경자와 1980년경 태어나 역사연구자가 된 삼십대 중반의 딸 영소가 그들이다. 다만 경자의 기록도 연령과 처지에 따라 질문을 심화하(며 성장하)는 영소에 답하려 한다는 점에서 소설은 1980년대가 아닌 2020년대를 발 딛고 있다.
소외된 광주에서의 소외된 나들의 현재성은 특히 페미니즘의 프리즘을 통해 더 선명해진다. 논고되어온바, 페미니즘은 대결의 조건이 아니라 사유의 조건이다. 상처(받은 마음으)로 이해가 가능하고 상처에서 새로운 언어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기존의 당연한 ‘사실’은 ‘모순’으로 새롭게 적발된다.(정희진, 샌드라 바트키 등)
한정현이 비현실적이리만큼 소외를 집약시킨 인물들이 그 방편이자 결과다. 독자가 공감할 때, 비현실적 사실은 현실적 모순으로 적나라해진다.
스스로 ‘남성’으로부터 벗어나려던 영성이 ‘아들은 광주일고에, 법대에 가야 한다’는 억압적 위계로부터 벗어나려던 영성과 다르지 않다. 폭력적 (성)질서의 억압으로부터 이탈하려던 영성은 그러나 군 복무 중 연고를 이유로 5월 광주에 총이 들린 채 투입된다.
스스로 ‘죄를 말할 수 있음’을 미덕과 윤리로 삼는 미선은 5월 광주를 경험하고선 신을 부정한다. 목도한 대로다, “신은… 광주에 있었”고 “가장 죄 많은 건 바로 그 신”이었다. 미선은 수녀의 꿈을 포기하고 정신병원에 갇힌다.
스스로는 그저 아들답게나 대우받고 싶었을 뿐인 의대생 혜숙은, 더 평등한 미래를 위해 대학 다니던 강원도에서 5월 광주로 돌아와 항거하다 죽는다.
‘스스로’가 파괴되는 1980년 광주의 ‘O자’들의 미래는 1995년 무너진 삼풍백화점의 판매 노동자(‘지금부터는 우리의 입장’), 2009년 불탄 용산참사의 희생자(‘다만 지구의 아침’)이기도 하다. 이들은 한국에서 차별받아 온 국외 여성들의 삶(‘결혼식 멤버’, ‘무이네’ 등)과도 연루된다.
여러 작품을 가로지르며, 일제 패망 후 조선에 남겨진 하류층 일본인 여성의 손녀가 미자이고, 미자가 매개해준 여성이 노동운동을 위해 청소노동자로 위장취업했다가 삼풍백화점 매장 여직원을 사랑한 박두자이며 둘의 숨은 이야기를 기록 전달하는 이가 미자 친구 경자의 딸 영소인 식이다. 영소의 진짜 엄마는 5월 항쟁 중 죽은 혜자다.
이처럼 기구한 소외의 고리는 “약한 존재에게 늘 자신을 파괴하는 방식의 자기 증명을 요구”하는 폭력의 고리와 대척한다. 경자는 영소가 중학교 졸업할 즈음 오키나와로 이주한다. 경자가 사랑했던 영성(영자)가 가보고 싶다던 곳, 일본서 소외와 상처를 가장 잘 이해하는 곳이 오키나와 아니던가. 하지만 영소는 바로 그곳 오키나와에서 차별과 학폭이라는 겹의 상처를 경험한다. “더러운 피”라며 모욕하는 가해자들의 얼굴을 그어버리겠다고 지녔던 과도가 식칼로 바뀔 즈음 보복의 심리 또한 자신을 갈라 다른 피가 아니란 걸 보여주겠다는 ‘자폭’의 각오로 바뀌어 있다.
영소는 아버지(영자를 말함)도 자살하지 않았냐며 자포자기한다. 그때 경자가 던진 말은 이렇다. “그 애는 너무나 살고 싶었어, 거기 있던 모두가 그냥 살고 싶었던 거야.”
이 시대 영소들의 화답은 ‘리틀 시즌’에서 잘 형상화된다. 십여년 새끼를 억지로 낳아야 했던 번식견을 영소가 돌본다. 이 개의 “삶에는 계절이 없었다.” 뜬장에서 구조된 뒤로도 식사와 잠을 거부하던 개를 영소가 새로 부르는 이름은 ‘자자’다. 잘 자자의 자자라 경자 혜자 미자 영자를 보듬는 이름처럼도 들린다. 거창하게는 연대이고, 낭랑하게는 사랑인 것이 바로 ‘자자’하는 마음이다.
한정현의 단편들에서 자주 보이는 단어(나 어감)는 눈물, 이모, 언어, 연구, 청자, 잘 자기 등이다. 기록 바깥 소외된 이들이 눈물을 거둬 단잠을 자기까지, 듣고 물어 언어를 주는 일은 필수적이다. 등단작(‘아돌프와 알베르트의 언어’)을 이 소설집의 프롤로그로 앉힌 까닭이다. 정처 없이 부유하던 호주 남자가 우연히 광주에 닿아 아내를 만나고, 1980년 5월을 경험하며 정체성을 갖고, 비로소 사라진 것을 목놓아 갈구하는, 귀화한 한 언어학자의 이야기다.
이런 기획성 때문에라도 소설은 정보와 의미로 때로 과중해진다. 하지만 독자로서의 무게가 작가 스스로 짊어매온 무게에 견줄 바는 못 되리라. 한정현은 현대사를 이후 세대가 어떻게 인지하고 애도할지에 대한 고민, ‘응시하는 자’의 태도로 소설들을 썼다고 말한다. 그렇게 광주, 부산, 마산, 서울 강남과 용산을 중심으로 1970~90년대를 관통했고, 이제 막 시작한 세번째 소설집에선 1990년대 이후 현대사의 주요 시공간을 등장시킬 거라고 ‘다짐’했다. 그중 첫 단편을 최근 계간지에 발표했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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