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나는 여신보다는 사이보그가 되겠다”
‘사이보그 페미니즘’ 선언
도발적 언어, 전복적 사유로
‘여성 정체성’ 페미니즘 해체
영장류,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
자연의 재발명
도나 해러웨이 지음, 황희선·임옥희 옮김 l 아르테 l 3만6000원
도나 해러웨이(79)는 전복적 상상력으로 페미니즘 이론을 혁신한 미국의 학자다. 해러웨이의 이력은 독특하다. 동물학·철학·문학을 전공하고 생물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과학사학자가 됐다. 이런 이력에서 짐작할 수 있듯 해러웨이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언어와 사유로 페미니즘 이론의 새 국면을 열어젖혔다. 해러웨이의 대표작으로는 ‘영장류,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1991)가 꼽히는데, 이 책이 21년 만에 재번역돼 나왔다.
이 책은 1978년부터 1989년까지 발표한 글 10편을 묶은 논문 모음이다. 해러웨이는 이 10여년 사이에 백인 여성의 정체성을 지닌 사회주의 페미니스트에서 “여러 낙인이 새겨진 사이보그 페미니스트”가 됐다. 글의 순서가 해러웨이 자신의 이론적 성숙 과정을 보여준다는 얘기다. 이때의 성숙은 원만해진다는 뜻이 아니라 도발성과 전복성이 커진다는 뜻이다. 특히 제3부에 실린 ‘사이보그 선언문’(1985)은 해러웨이 사유의 정점을 보여준다. 이 글은 망치 같은 언어로 학문 전반에 충격을 안겼다.
해러웨이의 사유 망치가 부수려 하는 것은 장벽처럼 굳게 서 있는 존재론적 경계다. 책의 제목에 등장하는 ‘영장류, 사이보그, 여자’가 이 경계에 놓인 존재들이다. 영장류는 인간과 동물의 경계에 선 존재이며, 사이보그는 인간과 기계의 경계에 선 존재다. 마찬가지로 여자는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서구 사유 전통에서 인간(남성)과 비인간 사이의 존재였다. 이 경계의 존재들은 양쪽에 걸쳐 있기에 일종의 키메라, 곧 괴물(monster)이다. 괴물이란 ‘무언가를 보여주는’(demonstrate) 존재다. 기존의 완고한 경계를 지우는 해방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보여주기에 괴물이다. 이 상상력으로 해러웨이는 앞 시대 페미니즘 이론들, 곧 자유주의 페미니즘, 사회주의 페미니즘, 급진적 페미니즘을 해체한다. 해러웨이의 전복적 사유가 응집된 ‘사이보그 선언문’이 기존 페미니즘 담론의 토대를 허물고 새로운 페미니즘의 상상력을 펼쳐 보이는 장이다. 그 페미니즘을 해러웨이는 ‘사이보그 페미니즘’이라고 부른다.
사이보그 페미니즘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려면 해러웨이가 비판하는 페미니즘, 특히 급진적 페미니즘의 이론 구조를 들여다봐야 한다. 이 글에서 해러웨이는 캐서린 매키넌이 제시한 급진 페미니즘 이론을 검토한다. 매키넌 페미니즘의 핵심은 ‘여성의 기원이 타자의 욕망에 있다’는 주장에 있다. 남성의 욕망이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함으로써 그 대상화의 결과로 여성이 여성으로 구성돼 실존하게 된다는 얘기다. 여성은 남성 욕망이 만든 대상일 뿐이다. 그러므로 여성이라는 범주는 자연적인 것이 아니며 일종의 허구다. 여기서 매키넌은 사태를 역전시킨다. 다시 말해, 남성의 성적 대상화를 통해 만들어진 여성이라는 허구를 역으로 여성 정체성의 근거로 삼는다. 남성 욕망의 대상화라는 표지를 안고 여성 전체가 여성이라는 범주로 한 묶음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급진 페미니즘은 여성 범주로 모든 여성을 포괄하는 ‘극단적 총체화’를 감행한다.
해러웨이는 여기에 급진 페미니즘의 치명적인 함정이 있다고 말한다. 여성은 인종·민족·계급으로 수없이 나뉘어 있기에 단일한 범주로 묶일 수 없고 동일한 정체성을 지닐 수 없다. 급진 페미니즘은 여성의 수많은 차이를 말소한다. 그 결과로 탄생하는 것이 유럽계 백인 전문직 여성이 여성 전체를 대표하는 권위주의다. 여성의 공통 경험을 강조하는 급진 페미니즘의 실천 속에서 유색인·하층민·식민지 여성의 온갖 모순과 차별이 지워지고 마는 것이다. 해러웨이는 여성이라는 범주가 근본적으로 허구라는 급진 페미니즘의 주장은 받아들이되, 여성 내부의 무수한 차이를 지워버리는 총체화는 단호히 거부한다. 여기서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페미니즘’이 등장한다. 여성은 각자 여러 경계에 걸쳐 있고 여러 정체성이 중첩된 잡종적 존재다. 그런 여성을 상징하는 이미지가 ‘사이보그’다. 해러웨이는 말한다. “우리는 모두 사이보그다.”
사이보그라는 말은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 인공두뇌학)에 오거니즘(organism, 유기체)을 결합한 조어다. 기계와 인체가 합체된 ‘기계인간’이 사이보그다. 1970년대 텔레비전 방영물 ‘소머즈’나 ‘6백만불의 사나이’에서 사이보그의 전형을 볼 수 있다. 해러웨이는 이 사이보그의 이미지를 여성의 존재와 실천을 아우르는 메타포로 쓴다. 사이버네틱스의 본질은 피드백 시스템을 이용해 스스로 자기를 조절하고 향상한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사이버네틱스는 인간의 자아에 대한 비유가 될 수도 있다. 여성의 자아 정체성은 앞 시대 페미니즘이 밝힌 대로 ‘구성된 허구’ 혹은 ‘강요된 허구’다. 그렇다면 그 자아 정체성을 여성들 스스로 각자 새롭게 재구성할 수도 있다. 우리는 몸으로 살아간다. 다시 말해 유기체로 살아간다. 유기체로 살아가면서 우리의 자아 정체성을 재구성하고 우리 자신을 새로 만들어갈 수 있다. 그렇게 보면 우리의 존재를 사이보그라고 부르는 것도 아주 엉뚱한 일은 아니다.
해러웨이는 여기서 사이보그의 메타포를 한 번 더 확장한다. 사이보그는 인체와 기계의 결합체다. 하지만 반드시 기계가 몸에 영구히 부착돼 있어야만 사이보그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인체와 기계의 외적인 결합도 사이보그를 이룰 수 있다. 우리의 몸이 정보네트워크와 연결된다면 그 연결상태로 우리는 사이보그가 된다. 또 사이보그로서 정보네트워크를 통해 다른 사이보그와 만날 수도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각자의 정체성을 지닌 채로 서로 연결돼 우리를 지배하는 힘에 대항해 투쟁할 수 있다. 단일한 정체성 지반이 없더라도 이 대항 투쟁 속에서 연대하고 결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성들은 각자 사이보그 전사로서 제국주의적·군사주의적·자본주의적 지배에 저항할 수 있다. 그 끝에는 젠더 없는 세계, 다시 말해 성역할 구별이 없는 세계가 있을 것이다. 그 유토피아를 향해 나아가는 존재가 사이보그다. 해러웨이는 글의 마지막에 이렇게 쓴다. “나는 여신보다는 사이보그가 되겠다.” 여성 정체성의 가장 순도 높은 체현자가 되기보다는 잡종의 괴물로서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만들어가는 키메라가 되겠다는 선언이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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