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흰색 잉크로 쓴 여성의 텍스트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여기 두 여성 시인이 있다.
한 사람은 살해당한 남편의 피를 손바닥에 받아 마신 뒤 전설적인 시 '아트 올리어리를 위한 애가'를 구술한 아일랜드의 아일린 더브, 또 한 사람은 네 아이를 낳아 키우며 오직 임신과 출산과 수유 상태를 반복 중인 저자 데리언 니 그리파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주혜의 다시 만난 여성]
목구멍 속의 유령
데리언 니 그리파 지음, 서제인 옮김 l 을유문화사(2023)
여기 두 여성 시인이 있다. 한 사람은 살해당한 남편의 피를 손바닥에 받아 마신 뒤 전설적인 시 ‘아트 올리어리를 위한 애가’를 구술한 아일랜드의 아일린 더브, 또 한 사람은 네 아이를 낳아 키우며 오직 임신과 출산과 수유 상태를 반복 중인 저자 데리언 니 그리파다. 시인으로 명성을 쌓아 가던 데리언 니 그리파가 처음 발표한 산문 ‘목구멍 속의 유령’은 자발적으로 아이를 넷 낳고 가사 노동에 전념하며 자신을 지우길 선택한 시인이 이상한 충동에 사로잡혀 18세기의 시인 아일린 더브의 삶과 흔적을 파고드는 이야기다. 이 산문을 에세이로 볼 것인지 소설로 볼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작가 역시 장르의 규정이 무의미하다는 듯 책의 시작과 끝에 단호한 한 문장을 박아넣는다. ‘이것은 (오직) 여성의 텍스트’라고.
이 여성의 텍스트는 황금이나 성수, 성유 같은 신비로운 재료가 아닌 지극히 일상적이고 육체적인 것으로 쓰였다. 아일랜드어로 구술 채집된 아일린 더브의 시를 한 행 한 행 영어로 옮기는 과정은 작가에게 수 세기 전 집안일에 속하는 행위들을 모방하는 것에 가깝다. 작가의 번역은 누비이불을 오리털로 채우기, 밀가루 반죽 치대기, 커튼 솔기가 정확히 맞아떨어질 때까지 몇 번이나 다시 꿰매기, 러그 정돈하기, 장식품 하나하나에 광내기와 비슷하다. 또 여성의 삶을 발굴하는 과정은 남성 일색인 기록에서 간혹 여성이 언급되는 부분을 찾아 모든 기록과 편지를 하나하나 깎아내는 행위, 즉 의도적인 삭제 행위와 같다. 일련의 과정에 대해 작가는 ‘여성 안에는 언제나 최소한 약간의 좋은 모유가 남아 있다. 여성은 흰 잉크로 글을 쓴다.’라는 엘렌 식수의 말을 인용하면서 자신 역시 이 글을 흰색 잉크로 썼음을 천명한다.
관련 도서관과 박물관, 유적을 샅샅이 뒤져 아일린 더브의 흔적을 찾아가는 작가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도 자연스럽게 18세기 무렵의 역사와 여성들의 삶을 더듬게 된다. 아일린이 비보를 전해 듣고 단 세 걸음 만에 남편을 향해 달려갔을 때 두 사람 주변에는 노파뿐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작가는 이 노파를 나이 든 아일린의 현현이라고 추측하지만, 동시에 아일린을 추적 중인 자신의 모습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나아가 책을 읽는 누구나 그 노파라고 한들 이상하지 않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노파의 눈으로 울부짖는 아일린을 보고 흰 그림자 같은 작가의 손으로 아일린의 등을 쓸어내리는 행위에 가담한다. 작가의 말처럼 ‘이것은 존재하는 것조차 작은 기적인 여성의 텍스트’이지만, 활자라는 평범한 경이를 통해 수백 년 전 한 여성과 지금의 우리를 촘촘히 꿰매 연결하는 크나큰 기적을 수행한다.
수유를 중단한 작가는 왼쪽 유방에서 덩어리를 감지한다. 검사 결과 암은 아니라는 판정을 받은 그 덩어리는 작가가 다른 사람들의 몸속으로 흘려보냈던 다량의 모유가 남긴 흔적이자 마침표에 가까운 쉼표, 암모나이트 화석처럼 미래의 누군가에게 전하는 단서이기도 하다. 그러니 한 번만 더 강조하고 싶다. 이것은 작가가 심장 가까이 지니고 다니는 흰색 잉크로 쓴 여성의 텍스트라고.
이주혜 소설가·번역가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유엔사의 수상한 움직임과 대만 사태 [세상읽기]
- 김태우 ‘불법 영어유치원’ 공약 논란 되자 “방과후과정 얘기였다”?
- 오늘 이균용 임명동의안 표결…민주 “압도적 부결 요청드린다”
- 김행, 국힘 “나갑시다”에 청문회 자리 박차고 나가 ‘행방불명’
- [단독] 주식백지신탁 소송 11명…5명 ‘시간 끌기’로 임기 마쳐
- 제2의 드루킹?…‘클릭 응원’과 ‘뉴스 댓글’ 구별도 못하는 여권
- 국토부 ‘김건희 일가 특혜’ 양평도로 여론전…“경제성 0.1p 높다”
- 유인촌, ‘임명 반대’ 문화예술인에 “행동가들”…갈라치기 발언
- 밤하늘 8번째로 밝은 별, 알고보니 별이 아니었다
- [단독] 국토부, 건설노조 ‘월례비·노조전임비 몰수’ 시도하다 ‘실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