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전쟁 아닌 돌봄, 역병 속 되새기는 퀴어의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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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팬데믹이 한창일 때, '바이러스와의 전쟁'이란 은유가 대두했다.
이때 바이러스는 생명을 앗아가고 죽음을 불러오는 위협으로 상상된다.
조지프 오스먼슨 미국 뉴욕대 교수의 에세이 '바이러스, 퀴어, 보살핌'은 '코로나 일기'를 바탕으로 풀어낸, 한마디로 '퀴어의 바이러스학'(원저 제목이 'Virology'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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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성, HIV 위기, 코로나 사태 등
개인·체제의 폭력 속 ‘백인성’ 비판
“모든 이를 함께 돌보는 것” 숙제
바이러스, 퀴어, 보살핌
뉴욕의 백인 게이 바이러스 학자가 써내려간 작은 존재에 관한 에세이
조지프 오스먼슨 지음, 조은영 옮김 l 곰출판 l 2만3000원
코로나 팬데믹이 한창일 때, ‘바이러스와의 전쟁’이란 은유가 대두했다. 이때 바이러스는 생명을 앗아가고 죽음을 불러오는 위협으로 상상된다. 이에 대한 대응 역시 바이러스를 효율적으로 제거하여 비상사태를 정상사태로 되돌리는 행위, 곧 전쟁으로만 귀결된다. 그러나 코로나바이러스, 에볼라바이러스,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 등 소수의 극단적인 바이러스가 바이러스 전체를 대표할 순 없다. “각각의 바이러스는 행동이 완전히 다르고, 들려주는 이야기도 제각각이다. (…) 대부분의 바이러스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바이러스를 ‘적’이라 안이하게 상상하는 것은, 우리가 정말로 해야 할 일들을 가로막는 데 기여할 뿐이다.
바이러스를 연구하는 생물학자, 에이치아이브이란 잠재적 위협 아래 사랑과 섹스를 해온 게이 남성, 그리고 수전 손택(‘은유로서의 질병’)과 오드리 로드(‘암 일지’)의 글을 사랑하는 사람만큼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해본 사람이 또 있을까. 조지프 오스먼슨 미국 뉴욕대 교수의 에세이 ‘바이러스, 퀴어, 보살핌’은 ‘코로나 일기’를 바탕으로 풀어낸, 한마디로 ‘퀴어의 바이러스학’(원저 제목이 ‘Virology’다)이다.
“바이러스의 방식은 번식과 복제, 그리고 대량 생산”인데, 때로 그것은 숙주인 생명체를 죽이기도 한다. 인체 내 면역세포를 죽이는 에이치아이브이가 발견된 1983년 이래, 이 사실을 가장 뼈저리게 새기고 살아남기 위해 노력해온 것은 누구보다 게이들이었다. 전염성 앞에선 늘 그랬듯, 에이치아이브이는 1980년대 ‘바이러스를 옮긴다’며 “우리”에 포함되지 않는 퀴어나 흑인에게 폭력을 가하는 빌미가 됐다. 지은이는 미국 사회에 뿌리박은 ‘전쟁’의 은유, 그리고 그 원천인 ‘백인성’을 고발한다. 자본주의와 노예제에 기대어 탄생한 백인성이란 “폭력을 통해 주체성과 통제력을 소유”하려는 성질로, 자신이 ‘타인’에게 끼칠 해악은 보지 않고 그저 ‘우리’에게 허락된 자유만을 중시한다. 소수자에게만 전염의 혐의를 뒤집어씌우고, ‘개인의 자유’를 앞세워 마스크 착용이나 백신 접종을 거부하는 등 코로나 팬데믹 때에도 이런 ‘백인성’이 여지없이 드러나지 않았던가.
동성간 성관계에 ‘죽음’이란 낙인을 찍는 세상에 반발한 이들은 침묵하는 대신 생존할 권리를 요구했고, 이들의 노력은 단백질 분해효소 억제제 개발, 노출전예방약 ‘트루바다’ 개발 등 오늘날 에이즈가 “치료 가능한 만성 질환”이 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지은이는 ‘모두의 몸은 함께 취약하다’는 명징한 사실로부터 상호 돌봄의 필요성을, 더 나아가 우리에게 익숙한 “전쟁의 은유를 돌봄의 은유로” 전환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한다. 인류 역사에서 ‘근절’에 성공한 바이러스는 천연두가 유일하다. 바이러스로 가득한 행성에서 “인간의 몸을 하고 안전하게 살 방법은 없다.” 지은이는 “전쟁이 아닌 돌봄”이라고, 오직 모든 이를 함께 돌보는 것만이 우리의 할 일이라 말한다.
되돌아갈 ‘정상’이란 없는 세상에서, 퀴어성은 더욱 빛을 발한다. “퀴어가 된다는 것은 체제의 억압, 폭력, 살인, 바이러스성 전염병 상황에서도 발휘되는 돌봄의 유산이자 역사이다. 퀴어들은 이런 순간을 위해 훈련해 왔다.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상황에서도 희생하고 서로 돌보며, 불가능해 보이는 현재와 미래 앞에서도 즐거움을 잃지 않는 훈련 말이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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