맺지 못한 첫사랑, 그러나 노동조합에서 거둔 첫 열매
[신금호 전 서울지방노동위원장]
'불로 짓는 농사' 염농(焰農). 정확하게는 불로 짓는 '그릇 농사'라는 의미다. 현장 활동가로, 노동잡지 편집장으로, 서울·경기노동위원회 위원장으로, 노동의 세계에 근 30년을 몸담았던 신금호 선생이 은퇴 후 도예가의 길을 걸으며 사용하는 아호다.
1944년 생인 신 선생은 서울대 정치학과 출신 엘리트의 영예를 좇지 않고 '조국 근대화'가 빚어낸 불의에 몸과 머리로 맞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의 길로 향했다. 팔순을 바라보는 지금도 '그릇빚음'을 잠시 멈춘 시간에 골프장 미화원으로 일하는 노동자다.
최근 주변의 권유로, 손자에게 꼭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서전에 꾹꾹 눌러 담았다. 젊은날 정면으로 마주했던 군사정권 시대상, 사회에 나와 겪었던 척박한 노동 현장의 기억을 농사짓듯 기록했다. 시대에 저항하고 자연에 순응한 어느 '백발 노동자'가 견뎌 살아온 이야기를 연재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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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지나지 않아 장명국 선생에게서 급한 전갈이 왔다. 전국금속노조 대한전선지부에서 기획실장으로 일할 사람을 찾고 있으니, 모든 일을 제쳐두고 지금 즉시 안양 가는 길목에 있는 시흥으로 내려가 대한전선 노동조합 한달수 지부장을 만나보란다.
고려대 총학생회장 출신이자 한국노총 조직부장인 조춘구도 지원했는데, 그 대신 나를 디밀어 넣었단다. '신금호는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학생운동 출신으로 순수하고 순직하여 장기적으로 보아서도 노동조합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장 선생의 요청에 곧바로 '예스!', '지금 즉시 만나자'는 확답을 받았단다.
이 말을 들은 즉시 나는 서울의 남쪽 끝머리 시흥에 있는 대한전선노동조합 본부로 한달수 지부장을 찾아갔다. 낯가릴 필요도 없었다. 보자마자 곧 '오케이!' 좋단다. 다음 날부터 대한전선그룹 노동조합 본부 기획실장 신분으로 출근하란다.
그 즉시 한달수 지부장과 몇몇 노동조합 핵심 간부와 함께 대한전선 시흥공장 정문 앞 중국음식점 방에 모여 앉았다. 최수길 경비반장, 김송부 조합장, 김성문 사무국장이었다. 모두가 솔직했고, 굵었고, 느긋해보여도 패기가 넘쳐났다.
취하진 않았지만 술잔이 오는 대로 서슴없이 받아 마셨다. 술자리를 파하자 혼자 몸으로 새로 개통된 시흥 1번국도로 걸어 나갔다. 그러나 밤이 너무 늦어 안양에서 내 집 영천으로 가는 103번 버스가 끊긴 상태였다.
사방이 암흑의 밤, 나는 택시라도 잡아타려고 인도에서 차도로 내려 한두 발 옮기는 순간 무언가에 부딪혀 붕 뜨는 듯하더니 차 앞유리를 치고 옆으로 나가 떨어졌다. 그래도 정신은 말짱하여 그 즉시 일어서려 했다. 그런데 아뿔사! 한쪽 무릎이 꺾이는 게 아닌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오른 무릎 인대 두 개가 끊어진 것이었다.
곧바로 대방동 큰길 한독병원에 입원되었다. 경찰이 조서를 쓰며 물었다. 나는 운전기사의 실수가 아니라 전적으로 내 잘못이라고 했다. 아무 말 안 해도 됐을 것을 운전기사를 도우려다 손해 볼 짓을 자초한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그토록 순진하고 세상 물정 몰랐으니, 나로서도 참 내 자신이 한심해 보였다. 그러나 타고난 성품이니 어찌하랴.
그 후 친구들이 웃으며 빈정댔다. '왜 네 잘못이냐, 이 바보 멍청아! 너를 친 건 차가 아니냐!'. 송태호도 이창호도 걱정되어 찾아왔다. 지영이도 찾아왔으나 무척이나 시무룩해 보였다. 나는 한동안 입원생활을 하다가 목발을 짚고 나왔다.
한달수 지부장은 약속했던 그대로 노동조합 일을 하라 했다. 한동안 시흥천 곁 작은 여관에서 노동조합 본부를 목발 짚고 오가며 일했다. 잠시 시흥고개 위 작은 집에 셋방을 얻어 다니기도 했다.
그해 추석에서 며칠이 지나 신촌 로터리 한 지하 음식점에서 지영이와 만났다. 평소처럼 마주앉은 지영이가 나직하고 단호한 소리로 나에게 던지는 말이, 앞으로 더는 나와 만나지 않겠단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말 대신 나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쌓여진 정 때문이요 헤어짐의 서러움 때문이었다.
그의 말의 이면을 나는 너무나도 잘 알았다. 그녀의 행동과 마음은 항상 부드럽고 넓고 따듯하지만, 성품은 단호하고도 야무졌다. 그녀의 생활환경이 내 환경과는 천지 차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우리 집은 가난했고, 지영이네 집은 안정된 화목한 가정이었다. 그녀에게는 의사로서의 보장된 미래도 있었다. 나는 그녀가 가는 길에 걸리적거릴 뿐인 것으로 여겨졌다. 나는 이걸 너무나도 잘 알았다. 서글픔으로 눈물만 흘러내렸다. 그리곤 헤어졌다. 허전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평소처럼 노동조합 일에만 전념했다.
상처를 추스르고 노동조합 활동에 매진
노동조합 신문 발간이 대한전선 노동조합 본부에서 내가 할 일이었다. 경희대 신문방송학과 출신이자 서울신문 노동조합 초대 지부장이었던 친구 안병준, 문리대 학생운동 그룹의 선봉장인 서원석 후배, 그리고 석탑출판사 장명국 선생과 최영희 선생의 도움을 받아 타블로이드판 4면으로 월간 '대한전선 노동조합 신문'을 발행에 착수했다.
이를 시작으로 나는 7년 6개월 여 동안, 1만 여 조합원으로 구성된 대한전선 그룹 내 노동조합의 활동전반을 총괄기획하고 실행하는 기획실장으로서의 활동을 전개했다. 첫 작업인 노동조합 신문은 제호를 '대한전선 노보'로 하였다.
신문을 만들기 위해서는 노동조합의 모든 걸 알아야 했다. 내가 내린 결론은 단 한 가지, 대한전선 노동조합은 '열린' 노동조합이라는 사실이었다. 1만 여 조합원에게도 열린 문, 노동조합 중견 간부들에게도 열린 문, 지부장을 비롯해 일곱 분회장과의 관계도 열린 관계, 대외적으로도 열린 노동조합! 위아래나 안팎에 관계없이 모두에게 열려 있는 노동조합이었다. 운영방식도 민주적임은 물론이었다.
대한전선 본부노동조합 밑에는 전선 케이블을 뽑아내는 대한전선 시흥공장 분회(분회장 한달수), 통신 케이블을 뽑아내는 대한전선 안양공장 분회(분회장 오창환), 전자기기를 생산하는 전기공장 분회(분회장 김장선), 냉장고를 만드는 대한전선 인천공장 분회(분회장 정찬백), 텔레비전을 만드는 대한전선 구미공장 분회(분회장 유해우), 각종 제작기계를 만드는 군포공장 대한전선 제작소 분회(분회장 한기태), 트랜지스터 등 전자부품을 만드는 대한전선 부천공장 분회(분회장 이용호), 텔레비전 부품을 만드는 대한전선 군포공장 분회(분회장 김근진), 오랜 역사를 가진 시흥의 설탕공장 대한제당 분회(분회장 이관우) 등 8개의 공장 노동조합 분회조직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7년 여 후 내가 노동조합을 떠날 때 조합원 수는 모두 1만2627명이었다.
그 중심인 노동조합 본부에는 한달수 지부장과 김성문 사무국장 그리고 기획실장인 나와 노동조합의 일을 보좌하는 여성 활동가 최경숙 선생과 여성 사무직원이 있었다. 한달수 지부장은 조직의 지도자요 대표자요 책임자요 지휘자였고, 김성문 사무국장은 지부장의 대내외 활동을 보좌하고 조절하고 뒷받침하는 조직의 관리자이자 예산의 집행자였다. 기획실장인 나는 노동조합 본부 대소 활동의 기획자요 실행자요 평가자였다.
일주일에 한 번은 꼭 노동조합 대표자 회의가 열렸다. 나도 10명 구성원 중의 한 명이었다. 한달수 지부장의 지휘에 따라 노동조합의 모든 일상 활동이 집약되고, 새로운 계획을 토의하고 분담했다. 조합원 교육은 분회가 전담하고, 간부교육은 지부가 주도하였다. 달마다 노동조합 신문을 발간해 모든 노동조합원에게 배포하였다.
1년에 한번은 지부 대의원대회가 본부조합 강당에서 열렸다. 이를 통해 전년도 분야별 사업내용을 보고하고, 새로운 1년 사업계획을 수립했다. 대회에서 통과된 사업계획에 따라 세부적인 실천계획은 기획실장인 내가 세웠고, 실행은 지부장을 중심으로 대표자들이, 그 결과 보고서는 다시 내가 짜냈다.
대한전선 그룹과의 임금교섭은 지부장을 중심으로 모든 분회장과 사무국장으로 구성된 임금교섭위원들이 감당했고, 교섭 시기는 4월이었다. 노동조합의 임금인상안은 내가 세웠는데, 이를 위해 보름 동안 날밤을 새웠다. 물론 그러면서도 달마다 노동조합 신문을 발행하였다. 나는 기자였고, 편집자였고, 인쇄자였고, 출판자였고, 배포자이기도 했다.
대외적으로는 지부장이 중심이 되어 전국금속노동조합과 한국노동조합총연맹과도 끊임없이 교류하였다. 지부장에게는 수시로 경인지역 금속노동조합의 젊은 대표자들이 찾아와 당면된 문제들을 상의하여 풀어나갔다.
그 가운데에는 새한자동자 노동조합의 이성균 지부장, 대한중기 노동조합의 이종복 지부장, 동양강철 노동조합의 최웅길 지부장, 한일 도루코 노동조합의 김문수 분회장, 섬유노동조합 원풍모방 노동조합의 방용석 지부장 등등이 그들이었다. 이들 모두는 대한전선 한달수 지부장과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이었다.
동지들 중에는 <시사통신> 노동조합 전문기자인 연현배 기자, 석탑출판사와 월간잡지 <새벽> 대표자인 장명국 선생, 일찍부터 현장 노동운동 활동가 생활을 한 그의 부인 최영희 선생, 세브란스의 내과의사 김원천 형제도 있었다.
<계속>
[신금호 전 서울지방노동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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