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칼럼] 김정은의 러시안 룰렛, 그 끝은 어디인가?

천영우 前 청와대 외교안보수석·한반도미래포럼 이사장 2023. 10. 6. 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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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 베팅하는 건 도박으로 횡재 노리는 것
무기 대가로 식량 받으면 민생 문제는 잠시 해결
정찰위성·잠수함 기술 받으면 경제 회생 아득, 엘리트도 동요
核 진정한 목적은 세습 독재… 北 민초도 깨달으면 결국 파탄
북한 조선우표사는 5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러시아 방문을 기념해 오는 24일 5종의 우표를 발행한다며, 우표 도안을 공개했다.2023.10.5 /조선우표사 홈페이지 연합뉴스

김정은이 러시안 룰렛에 빠져들고 있다. 핵·미사일로 한껏 허세를 부리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의 수렁에 빠진 러시아에 베팅하는 것을 보면 북한의 내부 사정이 얼마나 곤궁한지 짐작할 수 있다. 핵·경제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야무진 꿈이 뜻대로 풀리지 않자 도박으로 횡재를 노리는 것 같다. 도박 중에서도 목숨을 건 러시안 룰렛(실탄 하나를 장전한 회전식 권총을 자기 머리에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는 게임)이 가장 위험하다.

김정은이 도박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 시점은 2019년 2월 하노이 미·북 정상회담으로 거슬러올라간다. 트럼프에게 영변 핵 시설을 폐쇄하는 대가로 핵심 대북 제재의 해제를 요구했다가 퇴짜를 맞는 수모를 당했다. 이미 실체가 드러난 영변 단지를 포기하는 대신 영변 밖에서 가동 중인 우라늄 농축 시설을 이용하여 핵 전력을 계속 증강해 나가겠다는 어설픈 사기극에 트럼프가 걸려들 것이라는 어이없는 오판을 한 것이었다. 영변 밖의 비밀 핵 시설까지 폐기할 결심만 했다면 이미 제작한 핵무기를 고스란히 지키면서 제재도 풀 수 있었는데 과욕을 부리다 빈손으로 돌아간 것이다. 마땅한 대책이 없는 김정은이 선택한 고육지책이 자력갱생으로 제재 국면을 정면 돌파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코로나 방역을 위한 국경 봉쇄까지 겹쳐 자력갱생은 제2의 고난의 행군이 되고 말았다.

작년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김정은은 새로운 도박에 뛰어들었다. 3대에 걸쳐 고수해온 대외 정책의 기조를 뒤집고 침략자 편에 올인한 것이다. 2022년 3월 2일 러시아의 침략을 규탄하고 철군을 요구하는 유엔총회 결의안에 북한은 반대표를 던졌는데 벨라루스, 시리아 등 정권의 생존을 러시아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국가 외에 러시아의 침략을 두둔한 회원국은 북한밖에 없었다.

비동맹의 창설 멤버인 북한은 타국의 영토고권(territorial integrity)과 주권의 존중, 상호 불가침, 국내 문제 불간섭 등 비동맹의 5대 원칙을 60년 이상 외교 정책의 금과옥조로 삼아왔다. 그런데 느닷없이 강대국이 약소국을 침략해도 된다는 입장으로 돌아선 것이다. 더구나 우크라이나는 1994년 12월 5일 ‘부다페스트 메모랜덤’을 통해 자발적 핵 포기에 대한 보상으로 러시아·미국·영국으로부터 무력 불사용과 국경선의 불가침 공약을 포함한 안전 보장을 제공받은 나라다. 이런 나라에 대한 러시아의 침략을 옹호하는 것은 비핵화를 거부하는 북한에 대한 미국의 무력 사용을 정당화하고도 남는다.

이런 이치를 모를 리 없는 김정은이 왜 자신의 묘혈을 파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러시안 룰렛에 뛰어들었을까? 북한이 핵 무력 고도화를 위해 어떤 도발을 감행하더라도 유엔안보리의 추가 제제를 막아주고 기존 제재를 허무는 데도 앞장서줄 든든한 후원자가 당장 더 절실했기 때문일 것이다. 러시아가 고립무원의 궁지로 몰렸을 때 확실하게 편을 들어주면 안보리 상임이사국의 거부권으로 북한을 지켜줄 것이라는 계산을 했을 것이다. 실제로 2022년 3월 이후 북한의 거듭된 화성-17 및 화성-18 대륙간탄도탄(ICBM) 발사에 대해 안보리가 러시아와 중국의 반대로 대응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김정은의 도박이 단기적으로는 성공한 셈이다.

이러한 도박의 연장 선상에서 지난 9월 13일 러시아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열린 김정은·푸틴 정상회담은 판돈을 더 키우기 위한 모의였다. 러시아가 노리는 것은 북한의 포탄 재고와 신형 고체연료 미사일로 대체할 구형 스커드와 노동 미사일이다. 다만 북한이 탄약과 미사일을 공급하더라도 러시아가 전세를 역전시킬 가망은 없고, 한국이 이에 대응하여 우크라이나에 살상 무기를 지원하면 그나마 상쇄되고 만다. 북한으로서는 무기 수출 카드로 식량과 에너지를 받고 노동력을 대거 러시아로 송출하는 딜을 타결하면 당면한 민생 문제를 해결할 절호의 기회를 잡는다. 그러나 이를 정찰위성과 원자력 잠수함 기술 등을 확보하는 데 써버리면 그만큼 경제 회생은 멀어진다.

북한이 아무리 핵 무력을 고도화해도 김정은 체제의 종국적 운명은 경제와 사상 전선에서 결판난다. 2020년 12월 4일 북한이 제정한 “반동사상문화배격법”은 김정은이 주민들의 사상적 동요를 얼마나 두려워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상적 동요는 민생 파탄으로 증폭된다. 대한민국이 본격적인 문화·사상·정보 전쟁을 벌여 북한의 엘리트와 민초들이 자신들의 모든 불행의 근원이 김일성 일가의 세습 독재와 이의 존속을 위한 핵무장에 있음을 깨닫게 되면 김정은의 러시안 룰렛도 결판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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