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동현의 예술여행] [2] 모로코 마라케시에서 마신 허브티 한 잔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영국의 총리로 연합국의 승전을 이끈 윈스턴 처칠은 능력 있는 아마추어 화가였다. 그는 1930년대부터 수차례 모로코 마라케시를 방문해 다양한 풍경을 그림으로 남겼다. 몇 년 전 영화배우 앤젤리나 졸리가 소장한 윈스턴 처칠의 그림 한 점이 크리스티 경매에 나와 높은 가격에 팔렸다는 뉴스를 접했다. ‘쿠투비아 모스크 탑(1943)’이라는 제목의 작품이다. 쿠투비아 모스크는 마라케시의 랜드마크이자 가장 큰 모스크다.
카사블랑카에서 기차를 타고 마라케시로 향한다. 마라케시 메디나(구시가지) 옆에 77미터 높이로 솟아 있는 쿠투비아 모스크의 미나레(탑)가 보인다. 근처 제마 엘프 나 광장에는 수크(시장)가 자리 잡고 있다. 미로 같은 메디나 거리가 여행자의 정신을 혼미하게 한다. 여기에 시장의 혼란스러움이 더한다.
마라케시는 베르베르인이 11세기 건국한 알모라비데 왕국의 수도였다. 쿠투비아 모스크는 12세기 지어졌다. 무슬림 베르베르계 왕조인 알모하드의 후원으로 지어진 이 모스크는 모로코 모스크 건축 양식의 시작으로 의미가 크다. ‘쿠투비아’라는 이름은 필사본을 사고파는 상인들이라는 의미의 ‘쿠투비인’이라는 아라비아어에서 유래했다. 지금은 다양한 음식과 물건으로 가득 차 있는 수크만 남았지만, 과거에는 모스크 주변으로 100여 개의 이른바 ‘서점’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당시 이슬람 세계의 높은 지적 수준을 알 수 있다.
이곳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수크에서 마신 한 잔의 허브티였다. 테이블 위에 쌓여 있는 허브 몇 가닥을 지저분한 티 컵에 쑤셔 넣고 꾹꾹 누른 후 뜨거운 물을 붓는다. 이게 끝. 찻집 한편의 의자에 앉아 혼돈의 시장 풍경을 바라본다. 쿠투비아 모스크의 미나레를 배경으로, 휘황찬란한 상점들의 조명 사이로 사람들이 가득하다. 한 모금을 마셨을 때 느껴지는 풍부한 허브의 향과 맛이 혼돈과는 다른 마라케시의 활기와 생생함을 일깨운다. 놀라운 맛이다.
9월 초 마라케시 근처에 큰 지진이 일어나 도시가 큰 피해를 입었다는 속보를 접한 후, 마라케시 수크에서 마신 허브티와 처칠의 그림이 떠올랐다. 오래된 역사와 활기찬 문화가 조화를 이루었던 멋진 도시, 마라케시가 빨리 지진 전의 모습으로 복구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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