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민의 정치 포커스] 절로 존경하게 만드는… ‘소프트 파워’가 최고 전략

박성민 정치컨설턴트 2023. 10. 6.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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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미국에서 대통령, 부통령에 이어 권력 서열 3위인 케빈 매카시 하원의장이 해임됐다. 234년 미국 의회 역사상 처음이다. 지난 9월 21일 우리 국회도 헌정사상 최초로 국무총리 해임건의안·야당 대표 체포동의안·검사 탄핵소추안을 통과시켰다. 이제 한국과 미국 정치에서 절대 넘으면 안 되는 ‘레드 라인’은 없다.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가 무너지면 민주주의도 무너진다.

살의와 광기가 지배하는 전쟁에서 관용과 자제가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다. 지난 칼럼에서 이렇게 썼다. “국제 정치든 국내 정치든 조폭이든 위계질서가 분명하면 평화는 유지된다. 위계가 깨질 때가 문제다. 그레이엄 엘리슨은 ‘예정된 전쟁’에서 신흥 세력이 지배 세력을 위협할 때 가장 치닫기 쉬운 결과가 전쟁이라고 통찰했다. 그는 이를 ‘투키디데스 함정’이라고 불렀다. ‘미·중 패권 전쟁’이나 ‘주류 교체 전쟁’ 모두 세계관의 충돌이란 점에서 본질적으로 ‘전쟁’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한국과 미국 모두 정치적 위계의 붕괴가 전쟁을 불러왔다.

새뮤얼 헌팅턴은 ‘WHO ARE WE?’에서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tant·백인 앵글로 색슨 개신교)’의 나라 미국의 ‘국가 정체성’이 훼손되고 있다고 경고했다. 도널드 트럼프의 극단적 주장에 대중이 열광하는 ‘트럼피즘’은 겉으로는 ‘러스트 벨트’의 외피를 둘렀지만 속으로는 ‘국가 정체성’ 전쟁이다. 백인 노동자가 아니라 ‘백인의 위기’가 문제의 본질이다.

한국에서도 ‘주류 전쟁’이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오랜 시간 ‘민(民)’이 들어간 조직은 ‘비주류’를 상징했다. 민주당·민노총·민변·민예총 등은 주류가 아니었다. 2017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 지형이 달라졌다. 지금은 민주당 대 반민주당 시대다. 민주당이 상수다. 보수가 상수이던 시대가 막을 내렸다. 민주당의 전매특허였던 ‘후보 단일화’는 이젠 보수의 몫이 되었다.

전쟁은 ‘하드 파워(Hard Power)’와 ‘샤프 파워(Sharp Power·회유, 협박, 교묘한 여론 조작 등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만 동원될 뿐 ‘소프트 파워(Soft Power)’는 뒷전으로 밀린다. ‘소프트 파워’ 용어를 만든 하버드 대학교의 조지프 나이는 2004년에 출간한 ‘Soft Power : The Means to Success in World Politics’에서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 그들이 원하는 것을 강제하기 위해 군사력이나 경제 제재 같은 ‘하드 파워’를 동원하는 경성 국가가 아닌 외교·문화·교육·과학기술·제도와 같은 소프트 파워로 영향력을 확대하는 연성 국가의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했지만 지금 국제 정치는 그의 희망과 반대로 움직이고 있다.

미국·중국·러시아뿐 아니라 영국·프랑스·일본·독일 같은 전통적 강국의 소프트 파워가 약해지는 사이에 한국의 소프트 파워는 뚜렷하게 존재감을 느낄 정도로 급상승했다. 한국은 가장 닮고 싶은 매력적 나라가 되었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한국의 소프트 파워를 G5라고 하던 전문가들이 이젠 미국과 함께 G2의 위상을 갖게 된 것 같다고 놀라워했다. 세계가 우리의 입과 발을 주목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도 여기까지다. 세계관의 충돌이란 점에서 본질적으로 미·중 패권 전쟁과 같은 ‘주류 전쟁’ 탓에 한국의 소프트 파워도 미국이나 중국의 길을 걷게 될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국민의힘과 민주당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상징자본’을 다 탕진했다. 지금 민주당은 우리가 알던 김대중·노무현·김근태의 민주당이 아니다. 민주주의와 인권, 비주류에 대한 포용, 이견에 대한 열린 태도, 반칙과 특권에 대한 분노, 도덕적 우위에 대한 자부심, 지도자에 대한 신뢰, 원칙 있는 승리에 대한 갈망은 온데간데없다.

지금 민주당은 2017년부터 2020년까지 존재했던 ‘자유한국당’을 보는 듯하다. 황교안 대표, 전광훈 목사, 태극기 부대, 보수 유튜버의 영향력이 극에 달했던 그때는 보수의 ‘다키스트 아워(Darkest Hour)’였다. 고립과 패배를 자초했다. 민주당이 그 길을 따라가고 있다. 국민 51%의 지지를 얻어 집권하겠다는 당의 모습이 아니다. 자유한국당이 보수의 흑역사로 남았듯이 지금 민주당도 그렇게 기억되고 기록될 것이다.

국민의힘도 별반 다르지 않다. ‘반국가세력’ 척결을 주장하는 ‘올드 라이트(Old Right)’와 운동권에서 전향한 ‘뉴라이트(New Right)’를 내세워 국민 51%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 아마 어려울 것이다. 문재인 정권에 의해 정체성이 부정당한 그들의 울분과 분노를 모르는 바는 아니다. 김구와 김원봉을 앞세운 정권에 의해 격하된 이승만과 백선엽 복권을 이해 못 할 바도 아니다. 그러나 이념 전쟁과 역사 논쟁은 국민의 마음을 얻는 좋은 전략이 아니다.

이승만·박정희·백선엽의 복권 시도와 홍범도 논쟁은 불필요한 ‘친일’ 프레임에 갇힐 위험이 크다. 박정희나 백선엽처럼 해방되기 전에 성인이 된 인물들은 친일이든 반일이든 선택해야 했기 때문에 이념 전쟁과 역사 논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해방될 때 성인이 되지 않아 그런 논란으로부터 자유로운 세대를 내세우는 것이 훨씬 좋은 전략이다.

1934년생인 이어령은 한 강연에서 “나보다 늦게 태어난 나의 조국”이란 극적인 실존적 표현을 썼다. 식민지에서 태어나 소프트 파워 강국으로 만든 주역이 ‘조국보다 먼저 태어난 사람들’이다. ‘대한민국과 싸우는 세력’에 맞서 ‘대한민국을 위해 싸우는 세력’이 승리하려면 이승만·박정희·백선엽에 가려진 ‘이름 없는 영웅’의 감동 스토리를 내세우는 게 훨씬 효과적이다.

뮤지컬 ‘시스터즈’도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다. 원조 걸그룹이었던 그들처럼 모든 분야에서 대한민국을 경제·기술·문화 강국으로 이끈 전설적 인물들에게 뒤늦게나마 기립 박수를 보내야 한다. 윤석열 정부와 보수 진영이 해야 할 일이 바로 그것이다. 정부를 비판한 가수에게 족쇄를 채우고 재갈을 물리는 ‘샤프 파워’가 아니라 저절로 존경이 우러나오게 하는 ‘소프트 파워’가 ‘주류 전쟁’에서 승리하는 최고의 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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