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희의 길 위에서] 내가 머문 인상적인 호텔들
20년째 여행으로 밥을 버는 삶을 살아오는 동안 숙소는 나에게 애증의 대상이었다. 저예산 배낭여행자에게 비싼 숙소는 ‘넘사벽’. 싸구려 숙소들 중에서 최대한 깨끗하고, 안전하고, 분위기까지 좋은 곳을 고르기 위해서는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에는 영문 가이드북에 의존하거나 그 도시의 관광안내소를 찾아가 숙소를 추천받았다. 그렇게 찾아간 숙소가 마음에 들면 다행인데, 그렇지 않을 경우는 지도를 들고 이 집 저 집 하염없이 돌아다니며 발품을 팔아야 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숙소는 인도 바라나시에서 머물렀던 숙소다. 1998년 첫 인도여행이었다. 그날 따라 바라나시에는 방이 없었다. 지칠 대로 지쳐 찾아간 화장터 근방의 숙소에서 방이 있다고 했다. 다만 직원의 표정이 어딘가 이상했다. 할 말을 참는 듯 좀 불편한 기색이었다. 그가 데려간 방은 관처럼 좁고 길었다. 선풍기조차 없는 방이었지만 다행히 창이 있었다. 괜찮겠냐고 묻는 직원에게 무조건 좋다 하고 짐을 풀었다. 지쳤던 나는 씻자마자 죽음 같은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아침, 개운한 기분으로 눈을 떴는데 간밤에는 없었던 회색의 이불이 내 몸에 덮여 있었다. 몸을 일으키니 이불이 우수수 흩날리며 흩어졌다. 화장터의 장작이 타고 남은 재가 열어 놓은 창으로 날아든 거였다. 나는 밤새 그렇게 타인의 죽음을 내 온 몸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셈이다. 혜초나 원효쯤 됐더라면 그 자리에서 도를 깨쳤을지도 모르겠지만 범인인 나는 그저 충격과 찝찝함으로 샤워실로 달려갔을 뿐.
아무튼 주머니는 가벼운 처지에 취향은 까다로워 숙소를 고르는 일은 늘 고단한 노동이었다. 그래도 여행이 길어지면 한 번쯤은 좀 무리를 해 괜찮은 숙소를 찾아가고는 한다. ‘괜찮은 숙소’에 대한 내 기준은 나름대로 엄격하다. 일단 다국적 체인 호텔은 피한다. 표준화된 서비스와 군더더기 없는 시설이 재미 없다. 그보다 중요한 건 ‘여행 누수’ 때문이다. 20만원을 이 호텔 숙박비로 쓴다 해도 모기업으로 빠져나가고 그 나라에 남는 비용은 훨씬 적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난한 나라일수록 누수율이 심해 네팔 같은 경우는 70%가 넘는다고 했다. 또 숙소의 디자인 요소도 내게는 중요한데 다국적 체인 호텔은 특징 없는 고층 빌딩인 경우가 많다. 같은 금액이라면 규모가 작으면서 현지인이 운영하고, 개성이 살아있는 부티크 호텔을 선호한다. 다양한 방식으로 지구를 위하는 곳이라면 금상첨화. 그렇게 만난, 내 마음에 쏙 드는 숙소 몇 곳을 소개해 본다.
지난 3년간 해마다 찾아간 조지아의 룸스 호텔. 조지아인이 만든 호텔이다. 룸스 호텔은 수도 트빌리시와 산간 마을 카즈베기에 하나씩 있다. 트빌리시의 경우 수영장이나 사우나도 없다. 하지만 방의 실내 장식은 탄성이 절로 난다. 빈티지 스타일의 수전, 화려하면서도 우아한 벽지, 철제 장식이 달린 침대, 가짓수는 많지 않지만 양질의 아침 식사. 무엇보다 책으로 장식된 로비가 매력적이다. 트빌리시의 룸스도 좋지만 카즈베기의 룸스 호텔은 내 ‘최애 호텔’이다. 일단은 압도적인 전망. 말이 필요 없다. 고도 5천54m의 카즈베크산을 방에서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다. 야외의 자쿠지에 몸을 담구고 앉아 카즈베크산을 바라보고 있으면 세상의 모든 근심이 다 사라지는 것 같다. 아침형 인간이 되지 못하는 내가 이곳에서만큼은 테라스에서 일출을 보기 위해 오전 5시 기상을 빼 먹지 않을 정도다.
겨울을 나기 위해 몇 년 간 계속 찾아갔던 치앙마이에도 내가 사랑하는 숙소가 있다. 호시하나 빌리지. 고바야시 사토미와 가세 료가 출연한 일본 영화 ‘풀’의 배경이 된 곳이다. 치앙마이 청소년들의 자립을 돕는 비영리기구 반롬사이를 운영하기 위해 일본인들이 설립한 숙소다. 가운데 수영장을 배경으로 독채 방갈로가 여섯 채쯤 서 있다. 놀랍게도 이곳의 숙소는 전부 개인의 기부로 지어졌다. ‘클레이 하우스’는 한 청년이 1년간 머물며 혼자 힘으로 흙집을 지었고 ‘이치가와 코티지’는 이치가와씨의 기부로, ‘스이카 하우스(수박 집)’는 이름을 밝히기 싫어 하는 독지가의 후원으로 지어졌다. 이런 식으로 드넓은 부지에 독채 방갈로가 한 채씩 들어섰다. 방갈로에는 투숙객이 필요로 할 만한 모든 것이 준비돼 있어 일본인들의 세심함이 돋보였다. 저마다 다르면서도 조화로운 방갈로는 주변의 자연과도 잘 어울린다. 방에서도, 부엌 창으로도, 화장실 창으로도 정원의 꽃나무가 보였다. 부겐빌레아와 프란지파니, 코튼트리의 꽃들이 화려하게 피어 있었다. 그곳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완벽히 누릴 수 있었다. 날이 저물 무렵 노을을 보며 수영을 하거나 고양이들과 어울려 놀기. Pool호를 타고 나가 장을 보거나 자전거를 타고 마을 돌기. 책을 읽거나 일기를 쓰며 ‘멍 때리기’ 좋은 곳이어서 해마다 찾아가 2, 3일씩 머물고는 했다.
내가 좋아하는 또 다른 숙소는 그곳이 어디든 가톨릭 교회에서 운영하는 호텔이다. 수도원의 숙소들은 일단 공간적 특징으로 인해 몸과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까지 든다. 작년 여름 이탈리아 메라노에서는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작은 호텔에서 머물렀다. 전망이 좋고 조용한 곳이었다. 방은 소박하고 간소한데 필요한 건 다 있었고, 티끌 하나 없이 깨끗했다. 불필요한 장식이나 보이기 위한 사치스러움이 없어 수녀님들의 간결한 삶을 상상하게 되는 곳이었다. 역시 지난해 가을 헝가리에서도 수도원 호텔을 찾아갔다. 오스트리아와 가까운 마을 쇼프론에서였다. 1710년 세워진 수도원을 2009년 개조했는데 아름답고 안온한 공간이었다. 낮에는 숙소의 도서관에서 글을 쓰고, 아침에는 주변을 산책했다. 아침·저녁식사가 포함된 숙소의 가격은 예산을 가뿐히 초과했지만 그곳에서 누린 만족감은 가격으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사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전통 건축을 활용한 숙소다. 루마니아 북부의 마을을 여행할 때 주로 그런 곳에 머물렀다. 그중에서도 브랩이라는 마을은 혼기가 찬 딸이 있으면 정원의 나무에 냄비를 매달아 놓는 재미난 풍습을 가진 곳이었다. 그 마을에는 전통 목조 주택을 개조한 숙소가 많았다. 내가 머문 곳도 120년이 된 목조 주택을 고친 곳이었다. 자수를 놓은 수공예품으로 장식한 컬러풀한 방이 아름다웠다. 숙소에서 일하던 안드레아는 아침마다 염소를 몰고 와 아침 식사를 건네주고, 다시 염소를 몰고 떠나곤 했다. 마침 가을이라 들녘에서는 건초 베는 일이 한창이었다. 저물 무렵이면 산처럼 쌓인 건초를 실은 마차가 하나둘 마을로 들어서는 모습이 그 어떤 종교화보다 신성해 보였다.
숙소 고르는 일이 힘들다고 투정을 부리지만 나도 잘 알고 있다. 좋은 숙소가 여행자의 몸과 마음을 얼마나 위로해 주는지를. 내일 다시 루마니아로 떠난다. 이번 여행에서도 몹시 지친 날에는 ‘호텔’이라는 작은 사치를 하룻밤 누려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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