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부 장군 해양개척 정신 ‘독도 1500년 역사’ 밝힌다

구정민 2023. 10. 6.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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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2023년 삼척 동해왕 이사부 학술대회

1500년 전 신라시대 우산국(울릉도, 독도)을 우리 영토로 복속시킨 이사부 장군의 역사적 의미와 해양개척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한 학술대회가 6일 삼척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다. 이번 학술대회는 ‘역사 속 삼척과 울릉도, 그리고 미래의 삼척과 울릉도’를 주제로 이사부의 울릉도 복속 출항지이자, 수토의 총괄 지역이었던 삼척에 대한 역사적 학술 연구를 심화시키기 위해 마련됐다. 학계와 지역사회에서는 동해안 해양사에서 다양한 논거를 발굴, 제시함으로써 ‘우리 땅 독도’의 가치를 일깨우고, 동해 영토사에 확고한 이정표를 세울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에 연구진들의 주제발표 등을 요약했다.

조선시대는 신라 이사부를 어떻게 인식하였는가

■ 김창겸 김천대 교수
이사부에 대한 기록은 관찬 사서인 ‘세종실록 지리지’에 처음으로 보인다. 현전하는 개인 저술에서는 김종직의 문집 ‘점필재집’에 이르러 이사부가 울릉도를 정복한 사실을 처음으로 보인다. 이들 문헌에서는 이사부를 울진현에서 언급하였다.

이것은 당시 지방행정구획의 편재에서 울릉도가 울진현에 속했던 것에서 이유가 있겠다. 삼척과 이사부를 연계한 기록은 ‘동국여지승람’에 이르러 비로소 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의 문헌에서는 이사부에 많은 문헌 기록이 확인되어 진다. 그 이유는 역사적으로 조선 후기, 즉 영조와 정조대에는 일본인들이 자주 울릉도에 상륙함에,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복한 역사적 사실을 소환하여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증명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울릉도와 독도 연구에 매우 중요한 기록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신라 이사부를 훌륭한 장수이면서 재상이요 관인으로 평가하였고, 더욱이 조선 후기에 일본과의 울릉도 영유권 문제에 대비해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복한 사실은 더욱 강조됐다.


조선시대 삼척지역 후망처에 대한 고찰

■ 홍영호 하슬라문화재연구소장

조선시대 강원도 동해안 지역에는 조선전기의 대표적 관찬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부터 바다를 조망하기 위한 ‘척후(후망)’가 보인다. 이후에도 조선후기·말기에 울릉도 수토, 표류민 및 이양선 기록과 관련하여 후망이 등장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후망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없었다. 이러한 까닭에 후망의 역사적 실체, 설치 및 운영 시기와 운영 방법, 위치와 입지 등을 알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바다를 통한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설치하고 운영한 동해안 연변봉수의 위치 및 입지와도 구분할 수 없었다.

우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이는 ‘척후(후망)’로 보아 후망이 이 시기부터 설치되어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를 ‘세종실록’이나 ‘중종실록’에서도 후망 기사를 찾을 수 있어 뒷받침된다. 또 후망의 설치 및 운영 시기와 관련해 김종언의 ‘척주지’에 실린 신축년(1481년, 성종 12) 기사를 받아들이면 ‘해정후망’ 5곳이 이때 설치되어 운영되었고, 허목의 ‘척주지’ 서(序)를 통해 연대(봉수)와 해정후망이 임진왜란 때 그 기능을 상실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후기 도서정책과 수토

■ 신태훈 한림성심대 겸임교수

조선 전기에는 도서지역에 대한 인식은 주민들을 데리고 나오기 위한, 사람들이 섬에 살지 못하게 하고자 했다. 그렇기에 파악된 도서의 수도 30개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도서지역으로 이주해서 자신들의 삶을 영위하고자 하였다. 도서지역 이주민들은 주로 어염(생선과 소금) 활동을 하였다. 소금은 농사에 비해서 세금도 적게 내고, 각종 부역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더구나 소금은 농사보다 적은 노동력으로 많은 이익을 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이러한 행태를 보고 조정에서는 백성들이 농사를 포기하고 소금을 생산하는 일에 몰두할 것을 염려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주민들은 여러 해에 걸쳐 황무지를 개간하여 땅을 소유하여 세습하고, 매매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도서지역 이주민들의 경제력이 증대하자 조선 조정에서도 도서 현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조선 후기 지리지에 표시된 서·남해안의 도서 수가 240개에서 465개까지 조사된 것으로 확인되는데 이는 조선 전기에 비해 8배에서 10배 이상 증가한 것으로 도서지역에 대해서 관심도가 증가했음을 보여준다.



‘항길고택일기’를 통해 본 삼척지역민 역할

■ 이원택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항길고택(恒吉古宅)은 강릉김씨 감찰공파 김자현(金子鉉, 1404~1501)의 현손 김인지(金仁祉)의 후손들이 세거해왔던 삼척(현재 동해시) 용정리에 있었던 고택 ‘항길장(恒吉庄)’을 말한다.

‘항길고택일기’는 항길고택 사람들이 18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123권의 책력(冊曆) 위에 기록한 일기를 말한다.

이 일기에는 울릉도 수토를 위한 삼척지역민의 역할이 기록되어 있는데, 울릉도 수토를 담당하였던 삼척진영에 수토가 있던 해에는 어김없이 수토료(搜討料)를 납부했으며, 울릉도 수토를 마치고 배가 육지로 회항할 때 후망수직군(候望守直軍)으로 동원되어 배가 어디로 접안하는지 등이 기록돼 있다. 특히 울릉도 수토를 하러 간 군인들에게 지급할 울릉도 수토료(搜討料) 또는 수토료미(搜討料米)를 울릉도 수토가 있는 해에는 삼척의 주민들이 어김없이 납부하였던 사실이 기록된 것은 ‘항길고택일기’에서만 볼 수 있는 중요한 내용이다.


조선후기 삼척영장의 위상과 재임실태

■ 장정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조선시대의 삼척영장은 영동지역의 군사책임자였다. 삼척영장은 여느 영장과 마찬가지로 관할 지역의 군사훈련과 치안을 담당했지만, 영장제 안에서는 독특한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삼척은 충청·전라·경상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전임영장인 ‘별영장(別營將)’이 파견된 지역이다. 삼척영장의 독특한 위상은 삼척진첨절제사(三陟鎭僉節制使)를 겸한 데 있다. 별영장과 달리 수령이 겸한 영장을 ‘겸영장(兼營將)’이라고 했는데, 수령이 아닌 변장(邊將)을 겸한 유일한 케이스가 삼척영장이다.

삼척진첨절제사는 강원도의 유일한 수군진관인 삼척포진(三陟浦鎭)을 관할했으므로 삼척영장은 영동 9개 고을의 연병·치안을 담당했을 뿐만 아니라 동해안의 해방(海防)을 관장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독특한 지위로 인해 17세기 말부터는 울릉도(鬱陵島)의 수토(搜討)를 책임지는 임무까지 아우르게 되었다.

체험공간으로서 이사부독도기념관의 역할

■ 정은정 동북아역사재단 독도체험관장

일본정부의 독도를 둘러싼 영토해양 주권에 대한 침탈이 지속화되면서, 우리 정부는 관련 법률을 제정하거나 정비하여 영토해양 주권을 강화하는 동시에 독도 교육 강화 방안을 통해 미래세대에 대한 영토교육을 강화하였다. 특히 독도를 간접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독도체험관을 2012년 수도권 최초로 건립하여 독도에 대한 역사적, 지리적, 국제법적인 논리를 체계적으로 교육하고, 국내외 홍보를 통해 일본정부의 독도 영유권 주장의 허구를 알리고자 하였다.

교육부는 2010년 이후, 매년 독도 교육 기본 계획을 발표하였고, 2011년부터 초중고교에 ‘독도바로알기’ 부교재와 다양한 교육 자료를 배포했다. 2014년부터 지역 교육청에 독도체험관(독도전시관) 건립 사업을 추진해 올해 부산교육청 독도체험관 건립을 끝으로 전국적인 독도 체험 교육을 위한 인프라를 구축했다. 재단의 독도체험관과 지역 교육청에 만들어진 독도체험관은 독도를 간접 체험할 수 있는 체험 공간으로서의 독도 교육 성과를 제고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독도를 간접 체험할 수 있는 독도체험관의 운영 성과는 개관할 이사부독도전시관이 1500년 독도의 역사를 밝히고, 독도에 대한 간접적인 체험 공간으로 마치 독도에 다녀온 듯한 경험을 통해 영토해양 주권에 관한 교육을 선도하는데 기관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정리/구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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