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 신인문학상 단편소설 당선작] 메리와 광복절-박태양

박태양 2023. 10. 6.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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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8월 15일 오전 10시경, 나는 네 개의 짤막한 다리와 마호가니 미닫이문이 달린 TV 앞에 앉아 있었다. 그로부터 거의 반세기에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 시간은 하나의 이미지로 살아남아 가끔 내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르곤 했다. 덩그렇게 놓인 TV와 그 앞에 쪼그려 앉은 내 작은 등이었는데, 내가 나의 등을 볼 수 없는데도 내가 나의 뒷모습을 본 것처럼 기억하는 것이 좀 이상하기는 했다.

훗날 누군가 나의 이야기를 듣고 얼굴이 아닌 등을 기억하는 것은 어떤 불편한 감정을 외면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라고 했다. 하기야 그날 브라운관 속에서 벌어진 일, 그러니까 ‘탕, 탕, 탕’ 하는 소리에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단상에 뛰어오르고,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여인의 목이 꺾여 소파 등받이로 쓰러지던 광경은 아홉 살 아이에게 예사로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된 바로는 재일교포 문모 씨가 쏜 총탄이 누군가는 구국의 영도자라 하고 또 누군가는 독재자라 부르는 사내를 비껴가 그 사내의 아름다운 부인 머리에 가 박힌 사건이었다. 광복절 중계방송은 곧 중단됐고 ‘삐’하는 소리와 함께 화면은 회색으로 바뀌어 버렸다.

헤아리기도 어려운 긴 시간을 건너뛰어 그 장면이 다시 떠오른 건 아버지가 죽었기 때문이었다. 일주일 전이었다. 화장지를 쓰고 세면대에 자꾸 버려두는 학생들이 있어 경고문을 만들어 붙이느라 퇴근이 늦어진 날이었다. 당연히 아침 식사도 늦어져 조급한 마음으로 집에 들어섰는데 그 시간이면 마당에서 서성이고 있어야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얇은 시어서커 이불을 반쯤 덮은 채 천정을 향해 반듯이 누워 있었다. 열어둔 창문에서 이름 모를 새들이 지절대는 소리가 밀려들었고 윙윙 밤새 돌아갔을 선풍기는 아버지의 하얀 머리카락 몇 올을 폴폴 날려댔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된 아버지를 보고 있노라니 뜬금없이 구국의 영도자 혹은 독재자라 불리던 사내가 생각났다. 아내를 앞세운 지 불과 5년 만에 그 사내는 또 다른 누군가의 총구 앞에서 자신의 시대를 마감했다. 그때 아버지는 외발이 삼촌과 술잔을 기울이며 나와 동생들 앞에서 꺼이꺼이 울었다. 그 기억 때문인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와 사내는 묘하게 닮은 구석도 있었다.
 
어쨌든 그 생각은 네 개의 짤막한 다리와 마호가니 미닫이문이 달린 TV, 그 앞에 웅크려 앉았던 내 작은 등을 연이어 떠올리게 했다. 그러자 울컥 목이 메면서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는데 동생들에게 연락을 하고, 그들이 당도하여 이것저것 의논하는 동안에도 도무지 멈춰지지가 않았다. 보다 못한 올케가 “그래도 아버님이 형님한테는 정을 많이 내셨는가 봐요.” 했을 때야, 내 눈물이 아버지를 잃은 지극한 슬픔으로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또 희한하게도 눈물이 쏙 들어가고 울음이 뚝 그쳐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내가 결정하고 처리해야 할 일들이 줄줄이 대기 중이었다. 부고를 전하고, 조문객을 받고, 장지에서 일할 사람들을 구하면서 비로소 아버지가 죽었다는 실감이 났다. 개들도 늘어져 눕는 더위였다. 아버지는 아주 빠른 속도로 사라져 갈 것이었다. 땅속에서든, 기억에서든.
 
특별휴가가 어제로 끝난지라 오전 중 학교에 다녀오기로 했다. 조문을 와준 김 교장과 일주일 동안 기숙사를 맡아준 분들께 인사를 하려면 그들이 퇴근하기 전에 다녀와야 할 것이다. 집을 나섰는데 발길이 나도 모르게 뒷산 쪽으로 향했다. 작열하는 태양이 눈을 부셔 눈가가 자꾸 실룩거렸다. 산책로를 따라 나무 그늘 아래로 걸어도 20여 분이면 교문 앞에 도착할 것이다.
 
김 교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제수씨, 고생했지요?”라며 반가움을 표했다. 김교장은 남편의 오랜 친우였다. 한때 의기투합해 교원단체를 만들고 해직도 불사했던 동지이기도 했다. 교원단체가 합법화 된 후, 각자 다른 길을 선택했지만 남편의 우려가 현실화되기도 전에 남편이 떠나버림으로써 그들은 추억 속에서 더욱 애틋해지는 사이로 남을 수 있게 되었다. 복직 후 김 교장은 책임 있는 자리에서 뜻을 펼쳐보리라 장학사가 되어 교육청으로 들어갔고 남편은 평교사로 남았다. 승진을 염두에 두고 관료 조직 속으로 들어간 이가 젊은 시절의 결기를 지켜 내기가 쉽겠는가, 하면서도 남편은 친우의 행보를 지지해 주었다. 아군과 적군의 구분 논리를 넘어서던 넓은 품은 내가 그를 마음에 담은 이유이기도 했다.
 
오래 전, 남편이 자전거 라이딩을 갔다가 가슴을 부여잡고 고꾸라졌을 때, 김교장은 그의 뒤에서 달리고 있었다. 119를 부르고 CPR을 실시하는 사이, 남편은 나의 곁이 아니라 그의 곁에서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후일, 그가 교장으로 있던 고등학교에 읍, 면 지역 학생들을 위한 기숙사가 완공되었을 때, 그는 학습지 교사 일을 쉬고 있던 나에게 사감 자리에 지원해 볼 것을 권유함으로써 떠나간 친우를 잊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가 ‘제수씨’란 호칭으로 부를 때마다 어쩐지 꺼진 불씨를 되살리려는 부질없는 안간힘 같은 것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조문에 대한 감사 인사를 건네자 김교장은 별말을 다 한다며 손짓으로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그런데, 없는 동안에 일이 좀 생겼어요. 2학년에 송혜수라고 있죠?”
 
김 교장은 등을 곧추세워 앉더니 골치 아프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어제 양 부장이 숙직을 섰는데 혜수가 연락도 없이 12시 넘어 들어오더랍니다. 당연히 뭐라고 했겠죠. 아무 말도 안 하는 것이 이상한 거지. 그런데 그게 뭐 그리 뛰어내릴 만한 일이라고, 내 참….”
 
김교장은 혀를 끌끌 찼다. 뛰어내렸다는 말에 내가 흠칫 놀라는 표정을 보이자 김교장은 손사래를 치며 바짝 다가앉았다.
 
“아니, 진짜 뛰어내린 것은 아니고, 오늘 아침, 기숙사 바깥 화단에 방충망이 떨어져 있었는데 4층 혜수방 창문이었답니다. 그게 그냥 떨어진 게 아니고 찢겨져서, 억지로 떼 냈더란 말이지.”
 
룸메이트 유정이 얼마 전에 퇴실했으니 혜수 혼자 있기는 했을 것이다. 하필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하는 낭패감과 혜수가 그렇게까지, 하는 당혹스러움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혜수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뒤통수를 맞은 기분도 들었다.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혜수가 나를 찾아왔었다. 말이 없어 속을 알 수 없었는데 자신이 유정과 한 방을 쓰겠노라 했다. 유정은 어리바리하고 눈치가 없는데다 유튜브 방송을 한다고 시도 때도 없이 음악을 틀고 엉덩이를 흔들어 대는 통에 학부모 민원을 넣어서라도 피하고 싶은 룸메이트 기피 1순위였다. 이유를 물었더니 대답이 가히 아름다웠다.
 
“유정이도 자기 싫어하는 애랑 같이 지내고 싶지는 않을 거잖아요. 단순하고 솔직해서, 저는 좋아요.”
 
영민함에 따뜻함이 더해져 더할 나위 없어 보였다. 웃음이 영 없는 것도 아니어서 기분 좋은 날에는 빙그레 웃기도, 아주 즐거운 날에는 나지막이 소리 내어 깔깔 웃기도 했다. 혜수가 움직이는 걸 보면 모든 것이 납득이 됐다. 그랬던 혜수가 돌연 변한 건, 겨울방학을 집에서 보내고 돌아온 후였다. 늦어지는 입실, 반항적인 말투, 술과 담배 냄새, 까칠하게 굴어서 생기는 친구들과의 말다툼까지. 규정을 자꾸 어기면 퇴실 조치를 할 수 밖에 없다고 경고했더니 야속하다는 듯 노려보다 문을 쾅 닫고 나가버리기도 했다. 열여덟의 나이가 불안하고 우울한 이유야 수백 가지가 아니겠는가, 좀 기다려보자 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
 
김 교장은 오늘 혜수 부모님이 오기로 했으니 같이 만나보고 웬만하면 퇴실조치 하는 것으로 정리하자고 했다. “내일모레가 정년인데, 속 시끄러운 일로 …” 하다가 내 표정을 힐끔 보더니 말을 끊었다. 김 교장에게 잘 살펴보겠다는 말을 하고 교장실을 나왔다.
 
혜수 부모님이 방문하기로 한 시각까지는 시간이 좀 남아 있었으므로 방충망 수리부터 서두르기로 했다. 교무실에 가서 인사를 드리고 행정실로 들어서려는데 톡이 왔다. 부산 사는 여동생이었다.
 
준이네 연락 왔어? 어떻게 하재?
 
아버지가 남긴 유산의 향방을 궁금해 하는 말이었다. 답신을 보냈다.
 
땅은 준이 대(代)까지 가야 제 값 받는다고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말했으니 그쪽으로 상속처리하고, 통장에는 얼마 남지도 않았어. 매일 병원 순례 하셨잖아.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전화 진동음이 울렸다.

“언니, 바보야? 언니, 아버지 모실 만큼 모셨잖아. 그 고약한 성질 다 받아주면서…, 아휴.”
 
아휴에서 동생 목소리가 격앙되는 듯하더니 “언니, 효녀 노릇 그만 좀 해! 그런다고 아버지가 알아주기라도 했어?” 냅다 고함을 지르고는 내 대답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전화를 끊어버렸다.
 
동생은 내가 아버지 모신걸, 맏이로서의 책임감과 아버지에 대한 정 때문이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어림없는 생각이다. 투병 중이던 엄마에게 마지막까지 꼬박꼬박 세끼 밥을 얻어먹었다. 당신 몸은 애지중지하면서 엄마는 힘들지도, 서럽지도, 아프지도 않을 거라 믿었다. 호스피스 병실에 있던 엄마가 곧 가실 것 같다고, 오시겠냐 했더니 “됐다.” 고 했다. 당신 자신밖에 몰랐던, 그런 이기적이고 무정했던 아버지를? 내가? 코웃음이 났다. 아무래도 그런 오해는 불편하다.
 
행정실장에게 오늘이라도 방충망 수리를 해야겠으니 업체에 연락을 해달라고 부탁하고는 기숙사 사무실로 들어왔다. 묘하게 심사가 뒤틀렸다.
 
“나, Y에 가서 살면 안 되겠나?”
 
엄마가 가신 후, 서울 남동생 집, 무슨 캐슬아파트로 입성했던 아버지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그 말을 할 때 아버지 목소리가 몹시 주저하고, 조심스럽고, 눈빛은 간절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동의 따위를 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내가 남편과 결혼해 고향 Y로 돌아가 살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저런 바보, 빙충이” 라고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심지어 남편이 비명에 갔을 때는 “거 봐라, 네 신세 네가 망쳤지.” 힐난하기도 했다. 남편을 싫어하고 그의 사는 방식을 조롱했던 아버지가 내게 손을 내밀었던 것이다. 낯선 서울, 텅 빈 집안, 아버지 몫의 방 한 칸에서 보낸 무기력한 잉여의 시간이 아버지를 쇠락케 하고 견고한 자존의 성을 무너뜨려 마침내 내게 동의를 구하게 했던 것이다. 아버지는 자신을 여전히 박 사장으로 기억하는 Y에서 다시 행복해 질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지도 몰랐다. 나는 아버지의 바스러져 가는 몸과 뼈에 사무치는 고독, 자신도 모르게 내뱉을 한숨과 끝 모를 절망, 부질없는 희망과 어쩔 수 없는 포기를 지켜보기로 했을 뿐이었다. 그것이 혹 이 재미없고 시시한 세상을 살아가야 할 이유가 되어 준다면 그것으로도 아버지와의 동거에 충분한 이유가 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동생은 틀렸다.
 
기다리던 업체는 소식도 없는데 회의실로 오라는 인터폰이 왔다. 회의실에는 예순은 족히 되어 보이는 촌로 둘이 혜수 담임, 학생부장과 마주 앉아 있었다.
 
남자는 눈에 띄는 강골로 몸이 다부지고 몸집이 컸다. 쌍꺼풀진 눈이 부리부리했고 인물이나 풍채가 좋다는 말을 제법 들을 것 같았다. 여자는 남편에 비해 훨씬 나이가 들어 보여 몇 살에 혜수를 출산했을까, 속으로 자꾸 따져보게 됐다. 추레한 입성에 어울리지 않게 버버리 문양의 작은 손가방을 들고 새초롬한 얼굴로 앉아 다른 사람의 말을 듣기만 했다.
 
혜수 아버지는 도대체 애가 왜 그런지 모르겠다며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혜수가 금요일에 집에 가는 걸 싫어하던데, 가정에 혹 다른 걱정거리가 있나요?”
 
내가 완곡한 어조로 물었더니 혜수 아버지는 어림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 집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우리는 공부하라고 스트레스를 주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대학을 못 보내 준다고 하지도 않아요. 걱정거리가 뭣이 있다고, 나 원 참. 그런데, 혹시나, 저, 뭐, … 남자관계라든가, 뭐 그런 문제로 선생님한테 얘기한 적은 없었나요?”
 
혜수 담임이 화들짝 놀라며 두 손을 절레절레 흔들어 아니라는 시늉을 하다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나와 눈을 마주쳤다. 남자친구도 아니고 남자관계라니, 열여덟 살 딸자식을 두고 쓰기에 너무 통속적이고 저속한 말이 아닌가. 나는 그가 내뿜는 이상한 기운에 멍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은밀한 생을 사는 이들이 자기도 모르게 세상으로 흘려보낸 비밀 한 자락을 목도해 버린 것 같다 할까. 그런 순간의 어지러움이 느껴졌다.
 
혜수 아버지는 뭣에 안심을 했는지 의자 등받이에 느긋하게 등을 기대더니 이번에는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학교에서 뭔 일이 있기는 있었던 것 같은데 …, 선생님, 청소년들은 우리의 미래고, 또 어른들은 청소년들이 잘 자라도록 보살펴야 할 의무가 있잖아요. 어른들이 아이들을 잘 교육시켜야 사회도, 국가도 바로 서고 … ”
 
학생부장이 눈치 빠르게 끼어들며 혜수 아버지의 말을 막았다. 학생부장은 요즘 아이들의 못된 행동거지와 그런 아이들을 교육시켜야 하는 교사들의 어려움에 대해 토로한 후, WEE 클래스에서 일정 시간 상담을 끝낼 때까지는 집에서 통학을 시켜주시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안을 내놓았다. 그때까지 가만히 듣고만 있던 혜수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금방 방학인데, 뭘 번거롭게 아침저녁으로 애를 태우고 다녀요? 며칠이나 남았다고. 그냥 선생님께서 잘 타이르시고 방학 되면 집에 오게 해주세요!”
 
버버리 짝퉁 가방을 거머쥔 혜수 어머니가 가타부타 다른 말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통고처럼 툭 말을 내뱉고는 발딱 일어나 문밖으로 사라져갔다. 아직 사회, 국가적 대의에 할 말이 많은 듯한 혜수 아버지가 할 수 없다는 듯, 빠르게 인사를 하고 뒤를 따랐다. 밤새 창가에서 서성였을지도 모르는 딸의 시간, 어쩌면 번민으로 들끓었을지도 모르는 그 시간들을 뒤로 한 채.
 
묘하게 익숙했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시 산에 올라 산책로를 거슬러 집으로 돌아왔다. 딸아이가 전화를 걸어와 왜 이렇게 전화를 늦게 받느냐며, 볼멘소리를 했다. 혼자 있더라도 끼니는 절대 거르지 말라고 당부를 했다. 입덧이 가라앉으면 한번 내려가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일찌감치 출근을 서둘렀다. 해가 지자 뒷산 정자와 산책로로 사람들이 몰려 나왔다. 얼굴을 알아본 몇몇이 “고생했네.” 인사를 건넸다.
 
보안 시스템을 해제하고, 에어컨을 켜고, 각 층을 돌며 빠짐없이 점검을 했다. 행정실에서 문을 열어 줬는지 혜수방 방충망은 말끔히 수리되어 있었다. 단단히 고정되었나 몇 번을 흔들어 보았다. 멀리서 자습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아이들이 시끄럽게 내지르는 고함과 웃음소리들이 점점 가까워졌다. 무거운 책가방을 둘러맨 아이들이 속속 들어오기 시작했다. 다행히 혜수도 학생들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학생증 바코드를 찍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말없이 목례를 했다. 오랜만이라는, 반갑다는 기색이 조금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기말고사가 코앞이라 옷을 갈아입은 아이들이 속속 자습실로 모여들었다. 혜수는 어떻게 하려나 자습실 앞에서 기다렸는데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WEE 클래스에서 긴 상담을 하고 왔을 테니 피곤하기도 했을 것이다. 4층으로 올라갔다.
 
잠자리에 들었을까 해서 노크는 하지 않고 살짝 문을 열어 보았다. 불은 꺼져 있었다. 창가에 시커먼 그림자가 보였다. 다행히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달빛이 비껴들어 혜수 머리 위로 회색 반사광이 반짝였다. 인기척을 들었을 텐데도 요지부동이었다. 앞도 뒤도 돌아보지 않는 부동에의 완고한 고집이 느껴졌다. 외로운 섬처럼, 박제된 동물처럼, 그저 거기 존재했다. 쌕쌕, 천식으로 가쁜 숨소리가 아니었다면 혜수가 정말 살아서 거기에 있나 의심했을지도 몰랐다. 문을 조금 더 열고 들어섰다.
 
“얘기 좀 할래?”
 
“… 이제 자려고요. … 다른 생각, 안 할게요.”
 
“…”
 
덕분에 눈을 좀 붙이고 아이들 아침 식사와 등교가 완료되자 학교를 나섰다. 태풍이 몰려올 거란 보도가 있더니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먼 산에서 시커먼 구름이 스멀스멀 몰려와 회색빛을 하늘에 도포하기 시작했다. 산길은 아무래도 빗물에 미끄러울 것 같아 학교 앞 도로를 따라 걸었다. 아버지와 저녁 운동을 나가던 나래공원을 지나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처음 출발했던 공원 입구가 저만치 보이면 아버지는 “가자,” 무뚝뚝한 한마디로 그날 운동이 끝났음을 알렸다. 늘 앞서 휘적휘적 걸었고 나는 언제나 멀찍이 떨어져 뒤를 따랐다. 나란히 걷거나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는 그런 일은 아버지도, 나도 젬병이었다. 그냥 오래전부터 그렇게 되어 있었다. 아버지와 나 사이의 거리만큼 메마르고 서걱서걱한 감정이 있었다. 되살아나는 기억을 뿌리치려 걸음을 빨리했다. 아버지의 몸은 땅속에서 벌써 해체를 시작했을 것이다. 나는 그보다 훨씬 빨리 아버지를 잊어갈 것이다.
 
그런데, 공원 입구다. 아버지가 자꾸 살아난다.
 
이런 날이면 바깥 외출이 힘들다고 아버지는 짜증을 부렸다. 정작 아버지를 박 사장이라고 불러 줄 사람들은 몇 남지도 않았는데 하루 중 얼마라도 바깥나들이를 하지 못하면 역정을 내고 짜증을 부렸다. 그런 날만 제외하면 아버지와의 동거는 대체로 단순하고 지루했다. 이른 아침 퇴근을 해오면 아버지는 앞마당에 나와 서성이다 툭 한 마디를 건넸다.
 
“왔나.”
 
둘만을 위한 아침상이 차려지면 말 없는 식탁을 텔레비전 소리만이 가득 채웠다. 아침을 먹고 나면 우리는 각자의 방에서 서로를 잊었다. 아버지는 소주 한 병을 까서 마시며 텔레비전이나 유튜브 영상을 봤다. 귀가 어두운 탓에 영상이 토해 내는 소리가 온 집안을 울렸다. 나는 야간 근무의 피로를 푼다는 핑계로 견딜 수 없는 그 소음들을 피해 꿈속으로 도피하곤 했다. 대체로 조촐한 점심을 먹고 나면 아버지는 외출을 하거나 병원 순례를 했다. 나는 아버지가 적셔 놓은 속옷과 이불을 빨거나, 책을 읽거나, 저녁 찬거리를 준비하거나, 마당의 잡초를 뽑았다. 아버지가 바깥에서 머무는 시간은 점점 짧아졌다. 집에 돌아오면 잊고 있었던 듯, 이번에는 막걸리 한 병을 깠다. 나는 “술 좀 그만 드세요.” 매일 똑같은 소리를 해댔고 아버지는 “오늘 처음 마시는 건데, 내가 이런 자유도 없나” 매일 똑같은 거짓말을 했다. 이른 저녁을 먹고 나면 약속처럼 집 근처 나래공원으로 운동을 나갔다. 두세 바퀴 돈 후, “가자.” 한 마디면 운동이 끝이 났다. 겉보기로는 평화롭고 무탈한 시간이었다. 아버지는 시간의 덫에 걸려 있었다. 해가 뜨면 해가 지기를, 해가 지면 해가 뜨기를 기다렸다. 사이에 긴 불면의 밤도 있었다. 이유도, 목적도 없이, 살아가고 있는지, 죽어가고 있는지도 모를 모호한 시간들이었다. 아버지는 나날이 말라갔다.
 
나도 모르게 나래공원 안으로 들어섰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웬 낯선 여자가 쭈뼛쭈뼛 다가왔다. 돌이켜보니 교문 앞에 서 있다 내가 기숙사에서 나오는 걸 지켜봤던 여자 같다. 나를 따라온 게 틀림없었다. 사십 대 중반에 뒤로 질끈 묶어 맨 생머리와 말간 얼굴이 호감을 주는 인상이었다.
 
여자는 대뜸 “혜수 학교 있어요? 혜수 무사해요?” 라고 물었다. 통성명도 없이, 다짜고짜. 누구냐고 물으려는데 틈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혜수가 죽는다고 해서 어제 학교 갔다 왔대요. 동네 창피하다고 나를 막 고함지르고 혼냈어요. 혜수가 학교, 무사히 있는 거 맞아요?”
 
말이 어눌하다는 생각에도 여자의 겁에 찬 눈동자가 고개부터 끄덕이게 했다.
 
“네, 아침 먹고 등교했어요. 그런데, 누구세요?”
 
여자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비쳤다. 그러고 보니 여자는 우산을 쓰지 않고 있었다. 맨발에 슬리퍼, 후줄근한 티셔츠와 반바지, 집에서 급히 나온 듯했다. 황급히 우산을 씌워주자 여자는 책을 읽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내 딸은 송혜수입니다.”
 
“……. 그럼 어제 학교에 온 사람들은 누군데요?”
 
“옆집 사람들이요.”
 
여자와의 대화는 인내를 요구했다. 주어를 자꾸 빼먹었다. 자신이 혜수의 진짜 엄마이고 어제 학교를 갔다 온 옆집 여자가 혜수 때문에 동네 창피해서 못 살겠다며 자기를 쥐 잡듯 몰아세우고 구박했다는 말을 반복했다. 옆집 사람들이 왜요? 라고 물었을 때는, 또, 아, 옆집은 아니고 같은 집에서 뒤로 돌아가면 내 방이 있어서, 라며 알쏭달쏭한 대답을 했다.
 
“그럼 어머니랑 어제 학교 오신 분들하고 같은 집에 사신다고요?”
 
“예, 같이 살아요. 옆집 사람들이랑.”
 
빗줄기가 점점 세어지고 있었다. 바짓가랑이가 한 뼘쯤 젖어 들었다. 버버리 짝퉁의 나이가 지나치게 많았던 점, 딸자식 일에 야멸차게 반응하던 모습이 여자의 얼굴에 오버랩 됐다. 여자는 남자의 후처임에 틀림없었다. 본처인 버버리 짝퉁이 후처의 자식인 혜수를 빌미로 여자에게 강짜를 부렸다는 얘기가 아닌가.
 
아, 혜수의 절망은 한 지붕 아래서 두 여자와 사는 아버지, 말갛고 천진하지만 많은 것이 부족한 엄마 탓이었겠구나. 갑자기 훅 메스꺼움이 밀려왔다. 더운 열기와 찐득찐득한 공기가 뒤섞이며 말할 수 없는 불쾌감이 올라왔다. 여자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제법 인물이 좋다. 버버리 짝퉁은 나이에서나, 인물에서나 이 여자를 이겨낼 재간은 없어 보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엄마를 생각하면 이 여자를 미워해야 하는데, 미움이, 멸시의 감정이 생겨나지 않았다. 그녀의 모자란 문장과 천진한 눈빛을 듣고, 보고 있자니 어쩌면 그녀는 머리를 볶고 빨간 연지를 발랐던 여자와는 다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젊은 시절의 아버지는 잘나가는 사업가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 건축기사 자격증을 따고 도내 학교나 관공서 같은 건물을 짓는 수주에 뛰어들었다. 도시에 있는 작은 건축회사에 적을 두면서 담합과 나눠 먹기 입찰로 공사를 늘려갔다. 아버지는 똑똑하고 재바른 데다 타고난 악바리 근성 덕분에 Y읍에서는 제법 큰 집을 소유한 유지가 될 수 있었다. 본채와 세를 주던 별채, 공사에 사용될 자재를 보관하던 큰 창고와 넓은 마당까지, 아버지는 명실상부 성공한 박 사장이었다.
 
어느 날인가부터 머리를 볶고 빨간 입술 연지를 바른 여자가 집을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정확하게는 아버지 방이었다. 도시에서 근사한 오디오와 소파를 들여와 장식해 두었던 방. 여자와 아버지가 그 방에 들어가면 대낮에도 쿵짝거리는 음악 소리가 들렸다. 나중에야 그것이 지루박 같은 사교댄스 음악인 걸 알았다. 엄마는 그 여자가 남자들 신세 망치는 재수 없는 년으로 소문이 자자하다며, 제발 그 여자만은 만나지 말라고 읍소를 했다. 아버지는 사업을 하려면 다 배워둬야 될 일이고 교습을 할 뿐이라고 했다. 쿵짝쿵짝 아버지가 여자와 춤을 추며 돌아가면 엄마는 부엌에서 쓸데없이 그릇을 부딪치거나 마루를 쿵쿵거리며 걷다가 문을 세차게 닫거나, 던져 봐야 부서질 것 같지도 않은 빗자루 같은 것을 집어 던지고는 했다. 마루에 엎드려 숙제를 하던 나는 쿵짝쿵짝 음악이, 엄마가 일부러 만들어 내는 날선 소리가 숨이 막힐 것처럼 두려웠다.

아버지의 사교댄스 교습은 터미널 근처 다방 마담이었던 그 여자가 다른 고장으로 뜰 때까지 두어 달 지속되었다. 아버지는 여자가 떠나기로 한 날, 인부들을 태운 차를 몰고 급하게 돌아오다 중앙선을 침범했고 마주 오던 트럭과 충돌했다. 인부 한 명이 죽었고 아버지와 다른 한 명은 크게 다쳤다. 엄마는 그런 아버지 간병과 사고 뒤처리까지 감당해야 했다. 정작 삶에 재수가 없었던 건, 그 여자도, 아버지도 아닌 그들과 엄마가 아니었을까.
 
뒷방 신세에 본처에게 구박 받으며 딸의 보호자 역할에서도 밀려난 여자의 옷이 젖고 있었다. 무슨 심사에선지, 여자를 집으로 데려왔다. 같이 발을 씻고 에어컨을 켜고 주스를 마셨다. 여자는 혜수가 무사히 학교에 있다는 것을 확인해서인지 배시시 웃으며 집안 여기저기를 둘러봤다. 묻는 말에 두서없지만 넙죽넙죽 대답도 잘했다. 자신이 장애 등급을 받은 사람이라 그 남자와 살 수 밖에 없다고도 했다. 얼마 후, 나는 택시를 불러 여자를 태웠다. 여자는 택시에 타면서도 재차 다짐을 받았다.
 
“알았지요? 혜수한테 무슨 일 있으면 그 남정네 말고 꼭 나한테 전화해요. 나한테요. 알았지요. 꼭이요.”
 
여자가 내뱉은 “꼭이요.” 라는 말끝에 긴 여운이 남았다. 부자 되세요, 꼭이요, 할 때처럼. 택시가 빗속을 뚫고 멀어져 갔다. 학교로 걸음을 서둘렀다. 빗줄기가 굵어져 보도에 부딪치며 하얀 물보라를 일으켰다. 여자가 쏟아낸 수많은 말들이 뒤에서 등을 떠미는 것처럼 발걸음을 재촉했다.
 
“아니오, 그 사람 혜수 친아버지 아니에요. 그 남자 아주 나쁜 사람이에요. 얼마나 숭한 사람인데, 그 사람이. 그 남정네가 우리 혜수를 자꾸 ….”
 
쿠르르 쾅쾅. 천둥이 쳤다. 내 속에서 자지러지는 소리가 터져 나오고, 비바람이 온 몸에 휘몰아쳐 오고, 굵은 빗줄기가 따다다닥 보도에 떨어져 꽂히고, 느려진 차들이 차르르차르르 차도를 지나는데, 문득 적막감이 몰려왔다. 공기도, 소리도 멈춘 청력검사용 밀실에 든 것처럼, 아득하고 적요했다. 혜수의 적막은 이보다 훨씬 더 깜깜하고 음습했으리라. 귓속에서 ‘삐’하는 소리가 나고 밀실을 나오듯 정신이 들었다.
 
“갈 데가 어디 있다고요, 집도 없고, 돈도 없고…. 나는 일도 못하는데 … 혜수만 건강하면 나는 좋아요. 다 괜찮아요. 에헤헤.”
 
종국에는 가벼운 웃음으로 끝난 여자의 목소리가 체념이라기보다는 능청에 가까웠다는 것이 이상한 불안감을 더했다.
 
김 교장이 학생부장을 불러 내렸다. 성 비위 사안 발생 시 매뉴얼에 따라 최초 인지자인 내가 경찰에 신고를 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말이죠. 혜수 어머니가 뭔가 정신적 문제가 있는 장애인인 것 같은 데, 사실이 아닌 것을 얘기했다면 그 아버지라는 사람이 가만있겠어요? 명예훼손이라고 우리를 걸면, 우리는 증거라고는 그저 어머니 말뿐인데, 이게 증거능력이 되나 말이지요. 학생부장. 학생부장 생각은 어때요?”
 
김 교장의 관록은 때로 모호했다. 관료의 조심성으로 신중하고 사려 깊게 보이기도 했지만 노회한 능구렁이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느 쪽인지 판단이 되지 않았다. 교장의 의중을 알아차린 학생부장이 매뉴얼에서 용케 ‘혹은’ 을 찾아냈다. 성폭력상담소 ‘혹은’ 경찰 중 어느 한 군데만 신고를 해도 학교는 학교의 의무를 다했고 고로 책임을 면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김 교장은 이제부터는 혜수 담임이 주축이 되어 학교에서 관련 절차를 진행할 테니 나는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될 것이라 말했다.
 
“그런데, 그 남자는 그렇다 해도 본처는 왜 굳이 남편 자식도 아닌데 혜수 엄마 노릇까지 하고 다니는 걸까요?”
 
교장실을 나서려다 내가 문득 궁금하여 물었더니 김교장은 흐흐 쓴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자고로 사람이 움직이는 방향을 보면 그쪽에 다 돈이 있는 법 아니겠어요? 남편 호적에 오른 것도 아니고, 독립 가구에 장애인이면, 기초 수당과 장애인 연금이 당연히 나올 테고, 촌구석에서 매달 따박따박 나오는 월급을 누가 포기하려 하겠어요. 모르긴 해도 생활비다 뭐다 하면서 본집에서 다 가져가겠죠.”
 
아무래도 김 교장은 노회한 능구렁이 쪽이 맞는 것 같다.
 
며칠 후, 신고가 들어간 성폭력상담소에서 상담사가 학교로 나와 두 차례 상담이 진행되었다고 혜수 담임이 알려왔다. 정작 혜수는 놀라지도 않으면서 그런 일이 없었다고, 엄마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는데 상담사가 오랜 경험상 피해 당사자가 부인하는 한, 이 일은 없었던 일로 묻힐 게 뻔하다는 말을 했다며 안타까워했다. 상담사가 할 수 없이 혜수 어머니와 통화를 하고 만남을 시도하자 혜수 어머니는 옆집에서 알면 큰일 난다고, 이젠 전화마저 받지 않는다는 말도 같이 전해주었다. 그러더니 묻지도 않은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상담사가 그쪽 면사무소에 아는 사람이 있어 물어봤더니 혜수 엄마가 혼인신고도 없이 혜수 낳고 혼자가 됐는데 그 남자가 건드려서 그렇게 됐대요. 제 버릇 개 못 준다더니….”
 
자습실에 앉은 혜수는 고단해 보였다. 고단했으나 의연하기로 마음먹은 것 같았다. 영특한 혜수는 그 남자가 잘못된다면 자신이 앞으로 얻을 것 보다 잃을 것이 더 많다고 계산했을지도 몰랐다.
 
기숙사 앞에서 마주친 김 교장은 홀가분한 얼굴로 말했다.
 
“본인이 아니라는데 어쩌겠어요. 우리는 우리 할 일을 다 했고, 그러면 된 거지. 더 이상 신경 쓰지 말아요.”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혜수는 며칠 사이에 더 파리하고 창백한 얼굴이 되어 짐을 싸 집으로 돌아갔다. 정리해야 될 아버지 물건들이 닫힌 방 건너편에서 끝내지 못한 숙제처럼 버티고 있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위에 짓눌려 차일피일하다 보니 8월이 왔다. 태풍이 한 번 더 몰아쳤고, 뒷산에 산사태가 생기니 마니 소동이 일었고, 입덧이 가라앉지도 않은 딸아이가 다니러 오겠다고 연락이 왔다. 방을 치워야 하니 더 미루어 둘 수가 없어 아버지 짐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옷가지며, 물건들이며 웬만한 건 버리기로 했다. 멀리 군(郡)에 있는 재활용 센터에 전화를 해서 와서 가져갈 수 있냐고 했더니 분량을 물어보고는 “기름값도 안 나오겠어요,” 했다. 짐들을 차에 싣고 불러준 주소지로 운전해 갔다. 물건을 부리고 돌아서 나오는데, 옆 가게에서 나오던 혜수와 마주쳤다. 식육식당 간판이 붙어 있었다.
 
“여기서 아르바이트 하니? …, 다 마친 거야?”
 
혜수는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더니 “네,” 하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빛에서 서늘한 체념이 읽혔다. 동네까지 태워주겠노라 했더니, 이번에는 좀 더 분명하게 “괜찮아요” 라고 대답했다. 더위에 걷기는 무리라고 억지로 차에 밀어 넣었다. 마을 초입에 이르도록 잠자코 있기에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전에 엄마를 만났거든, …”
 
“…, 도시는 집값이 얼마나 해요? 둘이 살려면. 간호사는 돈 많이 번다면서요. 간호사 되려면 대학부터 가야 하는데….”
 
“…”
 
혜수는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차에서 내렸다. 저녁 어스름이 밀려들고 있었다. 차를 세워두고 동네가 한 눈에 보이는 언덕배기로 올라섰다.
 
비탈진 곳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스물 남짓 가구를 나지막한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었다. 산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하자 한 집, 한 집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어둠이 그들을 불러들여 하나씩, 하나씩 삼켜버리는 것처럼. 그곳으로 혜수가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야만과 탐욕과 무지의 횡포한 세상으로, 끌려가듯 점점 작아지며 사라지고 있었다. 어둠이 마을을 통째로 삼켜 버리자 산은 마치 무덤의 봉분처럼 보였다. 산 자들의 무덤. 산자가 죽은 자가 되는 무덤. 그러다 아침이면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멀쩡한 얼굴의 사람들을 다시 토해내는 무덤. 저 어둠 속에서 어떤 이는 횡포해지고, 어떤 이는 숨죽여 울고, 또 어떤 이는 눈과 귀를 닫으며 어둠을 견뎌내고 있으리라. 나는 속절없이 무기력해졌고 그것을 견딜 수 없어 슬퍼졌다.
 
다음 날, 딸아이가 수척해진 얼굴로 사위를 대동하고 내려왔다. 아버지 방 문을 거리낌 없이 열어젖히더니 “엄마, 이제 고생은 않겠지만 할아버지 안 계셔서 쓸쓸해서 어떡해?” 했다. 모두들 자기 편한 대로 생각하고 생각하는 대로 믿어버린다. 나는 빛의 속도로 아버지를 잊고 있다. 그런데, 딸아이가 비워둔 옷장 안에 처박아두었던 사진첩을 꺼내왔다.
 
“갖다 넣어둬.”
 
“엄마, 기숙사 일 이제 그만 두는 게 어때? 나이도 있고 하니까. 대신 우리 애 태어나면 좀 봐줘.”
 
딸아이는 별 관심은 없지만 한번 보기는 하겠다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사진첩을 휘휘 넘겼다. 나도 모르게 곁눈질을 했다. 한쪽 바짓가랑이 아래 발목이 보이지 않는 남자가 인상을 쓰고 노려보고 있었다. 외발이 삼촌이다. 어릴 적 무슨 사고인가로 삼촌은 오른쪽 무릎 아래를 잃었다. 홍두깨보다 긴 나무 막대기를 지팡이 삼아 탁, 탁 짚고 다녔다. 그러고 보니 편찮은 몸으로 삼일 내내 장례식장을 지켜 주었던 울릉도 숙모에게 인사 전화한다는 걸 잊고 있었다. 세월이었을까? 아니면 팔자소관이라 여겼던 걸까? 숙모는 아버지를 미워하고 증오할 법도 한데 그러지 않았다.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숙모는 외발이에다 성질마저 괴팍한 삼촌에게 시집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는 뭍으로 나와 살고 싶어 하는 울릉도 처자가 있다는 걸 알음알음으로 알게 되었고 일사천리로 결혼을 추진했다. 숙모가 삼촌 다리를 본 것은 사주단자 교환도 끝내고 이미 뭍으로 나온 후였다. 물론, 여기까지는 아버지가 당신이 동생가정을 만들어 주기 위해 어떤 공을 들였는지, 자랑스럽게 떠벌리곤 했기 때문에 알게 된 것들이다. 그 당시, 나는 아홉 살이었으니까. 그저 메리와 놀거나 강에 가서 멱을 감거나 구슬치기나 고무줄놀이를 하는 것으로 하루하루가 즐거운 아홉 살이었으니까, 어른들의 그런 사정까지야 알 길이 있었을까.
 
그런데 삼촌이 신접살림을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울릉도 숙모가 사라졌다. 숙모가 사라진 날 밤, 나의 메리도 사라졌다. 학교를 다녀오면 저 멀리서부터 나를 알아보고 껑충껑충 뛰고 꼬리를 흔들며 컹컹 짖어대던 나의 메리. 책가방을 집어 던지고, 머리를 쓰다듬고, 그 선한 눈에 내 눈을 맞추고 어쩌구저쩌구, 조잘조잘 수많은 얘기를 쏟아내게 하던 메리. 그런 메리를 아홉 살의 내가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메리는 밥그릇으로 사용하던 찌그러진 양은 냄비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메리를 찾아 헤매다 강변 제방 위에서 저 멀리 자갈밭에 시커먼 숯덩이로 변해 있던 메리를 보고 말았다. 숙모가 사라진 후, 외발이 삼촌이 부린 포악의 시작은 메리를 매질하는 것이었다고 누군가 전해주었다.
 
차마 제방 아래로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 으흐, 으흐, 배꼽보다 훨씬 더 깊은 아래쪽에서 울음이 토해져 나왔다. 석양이 바다보다 깊은 어둠으로 바뀌도록 제방 위에 얼어붙은 것처럼 서 있었다. 엄마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와 밤새 울다 지쳐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아버지는 피곤하지만 안도한 얼굴로 울릉도 숙모를 대동하고 나타났다. 첫차를 타기 위해 터미널 근처에 숨어있던 숙모를 찾느라 밤새 잠복하며 기다렸다고 했다. 숙모의 얼굴은 흙빛이었다. 숙모의 뒤쪽으로 메리의 찌그러진 양은 냄비 밥통이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도, 외발이 삼촌도 보기 싫어 안방으로 들어왔다.
 
TV를 켰다. 광복절 기념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탕, 탕, 탕’ 총소리가 나고,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이 단상에 뛰어오르고, 한복을 차려입은 여인의 목이 뒤로 꺾였다. 아홉 살 아이에게는 예사롭지 않은 장면이었겠지만 그것이 대체 아이의 생에 무슨 상관이었겠는가. 아이는 TV를 보고 있었지만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있었다. 나는 사랑을 하지 말아야겠다. 이렇게 마음이 아픈 게 사랑이라면 사랑 같은 것은 절대 하지 말아야겠다.
 
그러니까 1974년 8월 15일은 8월 14일의 다음 날이어서, 우연히 그날 권력자의 부인이 죽어서, 그리고 한 여인이 벗어나고 싶었던 곳으로 돌아오고, 한 아이가 온 마음을 다해 사랑을 포기해서 반세기에 걸친 시간에서도 살아남았던 거다.
 
사위에게 아버지 방에 남아있던 물건들을 밖으로 모두 빼내 달라고 부탁했다. 아무래도 도배를 새로 해야 할 것 같다. 사진첩을 베고 잠든 딸아이를 놔두고 밖으로 나왔다. 인테리어 가게에 들렀다. 주인이 견본책을 내놓으며 “벽지는 어떤 걸로 할까요?” 하고 물었다.
 
“여자애들이, 아니 아가씨가 좋아할 만한 밝은 색으로요. 연한 핑크나 시원한 하늘색 같은.”
 
마음이 하늘하늘 꽃잎처럼 날아올랐다. 우기가 물러난 하늘은 쨍하게 맑았다.
 
그날의 굳은 다짐에도 망각의 힘은 또 대단해서 우울했던 십대와 냉소적인 이십 대를 보내고 남편을 만났다. 그는 낮고 부드러운 음성과 건강한 생명력으로 메리와 숙모와 엄마를 잊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런 남편은 너무 일찍 가버렸다. 가끔 궁금해지곤 했다. 한평생 사랑하리라던 남편의 맹세는 지켜졌을까? 기꺼이 학교장의 전횡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되겠다던 남편의 결기는 어찌 되었을까? 남편이 살아있어 김 교장의 나이가 되었다면, 그이라면 무심한 시간과 무자비하기도, 유혹적이기도 한 세상에 굴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의 생은 너무 짧아 어떤 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사랑이, 과연 다시 할 만한 것이었는지 말이다.
 
인테리어 가게를 나와 보도를 따라 걸었다. 계속 걸어가 보는 수밖에…. 멀리 경찰서가 보였다. 무슨 일에선가 김 교장이 전화를 걸어왔는데 받지 않았다. 톡이 왔다. 서울 사는 남동생이었다.
 
누나가 아버지 지극하게 모신 것 알아. 땅은 같이 처분하기로 하자.
 
거리에 드문드문 태극기가 보였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광복절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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