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석재의 돌발史전] 전래동화, 알고보면 호러물이었다고?

유석재 기자 2023. 10. 6.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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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웅 감독의 장편 인형 애니메이션‘콩쥐팥쥐’(1968). 콩쥐가 죽고 팥쥐가 징벌받는 뒷부분의 이야기까지 다룬 이례적인 작품이다.

혹시 전래동화 ‘콩쥐팥쥐’의 결말이 어떤 내용이었는지 기억하십니까? 이 질문을 받는 사람들은 대부분의 경우 (A), 소수의 경우 (B)로 대답합니다.

(A)콩쥐는 사또 아들 또는 부잣집 도령과 결혼해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

(B)팥쥐가 콩쥐를 죽였고, 콩쥐의 귀신이 환생해 팥쥐와 계모에게 복수했다.

사실은 결말처럼 보이는 A 뒤에 ‘장화홍련’ 같은 호러물을 방불케 하는 B가 더 있는 것이었습니다만, 많은 어린이용 동화책에는 그냥 A에서 끝납니다. 예전에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이 우리나라에서 개봉됐을 때 주인공 남녀가 잘츠부르크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데서 끝나는 것처럼 뒷부분을 잘랐다는 일화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그렇게 했던 이유는 뒷부분이 그다지 좋지 않은 이야기였기 때문이죠. 콩쥐팥쥐의 뒷얘기는 무척 참혹하기까지 합니다. 좀 더 얘기하자면 콩쥐의 결혼 상대는 사또 아들이 아니라 사또였습니다. 첩으로 들어갔던 것이죠.

그러니까 여러 책에서 삭제된 이야기는 이것이었습니다. 콩쥐를 시샘한 팥쥐가 어느 날 ‘연못에 놀러 가자’고 꼬인 뒤 콩쥐를 물에 빠뜨려 살해합니다. 팥쥐는 콩쥐인 척 하고 원님의 아내 노릇을 하게 되는데, 콩쥐의 원혼은 원님 앞에 나타나 억울함을 호소합니다. 연못 물을 모두 퍼 내 콩쥐의 시신을 건져 내니 콩쥐는 살아났습니다.

원님은 팥쥐를 죽이고 시신으로 젓을 담가 팥쥐 엄마에게 보냈는데 팥쥐 엄마는 젓갈인 줄 알고 먹다가 그게 무엇인지 깨닫고 기절해 죽습니다(이 ‘젓갈 선물’ 이야기의 원전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동주열국지’에서 공자의 제자 자로가 위나라에서 정변에 휩쓸려 죽은 뒤, 위나라 조정이 공자에게 자로의 시신을 젓갈로 담아 보낸다는 이야기에서도 나옵니다. 공자는 단번에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고 제자들에게 ‘그걸 열지 말라’고 지시합니다). 아무튼.

최근에 ‘그림 동화’ 완역본이 출간됐습니다. 참 반가운 일이죠. 그런데... 동서양의 수많은 전래동화들은 아이들을 위해 손질한 개작의 흔적을 한 꺼풀 벗겨 내면 호러물에 가까울 정도로 잔혹한 내용이 들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라는 우리 전래동화 속 대사를 다들 잘 아시죠? 거의 모든 유아용 그림책 시리즈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해와 달 이야기’ 입니다. 하지만 한국 전래동화의 중요한 원전 중 하나로 꼽히는 박영만의 ‘조선전래동화집’(1940)에 실린 이 이야기는 무척 충격적인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떡을 다 빼앗아 먹은 호랑이는 지름길로 가서 숨어 있다가 “왼 팔을 베어 달라”며 어머니의 팔을 떼어 먹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어머니의 오른 팔, 왼쪽 다리. 오른쪽 다리를 차례로 베어 먹은 호랑이는 마지막 순간 땅 위를 굴러 집으로 가는 어머니의 몸뚱이까지 삼켜 버립니다.

이 장면이 전체 분량의 절반 가까이 차지할 정도로 상세히 묘사되는데 또 다른 판본에서는 팔을 먹기 전에 저고리·치마와 속곳까지 빼앗아 성적 겁탈을 암시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호랑이는 힘없는 민초들에 대한 가진 자들의 집요한 약탈의 상징인 셈인데, 대부분의 그림책에서는 ‘어머니를 잡아 먹었다’ 정도로 간단하게 언급하고 넘어가기 일쑤입니다. 예전 창비 판본에서는 아예 호랑이와 어머니가 만나는 장면을 통째로 빼 버렸던 기억이 납니다.

정창화 감독, 엄앵란·조미령 주연의 1962년 영화 '대장화홍련전'.

‘장화홍련’의 원전 역시 엽기적인 장면을 포함한 19금(禁)에 가까운 내용입니다. 사또가 장화와 홍련이 왜 죽었느냐고 추궁하자 계모는 ‘사실은 장화가 낙태를 한 뒤 못에 빠져 죽었다’고 거짓말을 한 뒤 허리춤에서 피 묻고 바싹 마른 고깃덩어리를 내 보이는데, 사또가 이것을 칼로 가르니 쥐똥이 가득 차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이고 세상에.

아동용 각색판과 원전 사이의 괴리는 서구 동화 역시 만만치 않습니다. 그림 동화 원전에서의 ‘백설공주’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처럼 ‘그리고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And they lived happily ever after)’라는 관용구 문장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처럼 난쟁이들의 추격을 피해 도망간 계모(왕비)가 절벽에서 사고로 떨어져 죽는다는 내용도 없습니다. 백설공주의 결혼식에 온 계모에게 불로 달군 쇠구두를 신겨 죽을 때까지 춤을 추도록 한다는 얘기가 원래 동화의 결말입니다.

그림형제, ‘백설 공주’.

‘신데렐라’는 또 어떻고요. 신데렐라의 두 언니는 주인공이 떨어뜨린 신발을 억지로 신기 위해 발가락과 뒤꿈치를 칼로 잘라냅니다.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마지막 장면에서 비둘기들이 나타나 두 사람의 양쪽 눈을 파먹습니다. ‘헨젤과 그레텔’에서 주인공 남매는 마녀를 떠밀어 오븐 속에서 타 죽게 합니다. ‘노간주나무’라는 동화에서는 계모가 전처의 자식을 죽여 수프로 만든 뒤 남편에게 먹이는 장면까지 나옵니다.

각색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원래 이야기에 깃든 잔인한 요소가 남아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안데르센 동화 ‘빨간 구두’는 신기만 하면 춤을 추게 되는 구두가 벗겨지지 않아 발목을 잘라낸다는 이야기고, 페로 동화 ‘푸른 수염’은 아예 (지금은 서울구치소에 사이좋게 모여 있을) 유영철이나 강호순을 닮은 연쇄살인마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습니다.

19세기 그림 형제의 원전 자체가 이미 상당 부분 각색된 판본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1998년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됐던 기류 미사오(桐生操)의 ‘알고보면 무시무시한 그림 동화’는 (1)그림 동화 초판에서 백설공주와 헨젤·그레텔의 엄마는 사실 친어머니였지만 나중에 계모로 바뀌었고 (2)’잠자는 숲 속의 공주’에서 물레에 손가락을 찔리는 부분은 성 경험을 상징하는 것이며 (3)’빨간 모자(원래는 빨간 두건이었는데 언제부턴가 국내 제목이 이렇게 바뀜)’는 원래 소녀가 늑대에게 잡아 먹히는 데서 끝난다는 등의 지적을 했습니다. 1966년 영화 ‘남과 여’ 도입부에서 여주인공 아누크 에메가 아이들에게 읽어 주는 동화가 사실 이 원래 버전이었습니다.

최초의 한글 전래동화집인 심의린의‘조선동화대집’(1926·왼쪽)과 3대 전래동화집 중 하나인 박영만의‘조선전래동화집’(1940).

그럼 뭔가, 전래동화란 원래는 ‘애들은 가라’는 이야기였다는 걸까요. 왜 이렇게 아이들 동화 곳곳에 잔혹한 흔적들이 깃들어 있는 것일까요? 아주 오래 전 인터뷰에서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는 “지금 ‘동화’라고 돼 있는 이야기들은 원래 문학을 대신하는 구전 민담으로서 18세기까지도 어른들의 문화였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과거에는 성적(性的)이고 폭력적인 내용을 아이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고, 아이들을 그런 데서 보호하려는 태도는 20세기에 들어와서야 생겨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와 같은 윤색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이 다름아닌 디즈니 애니메이션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이들에게 원래 모습의 동화를 들려 줘야 할까요? 아니면 ‘윤색’된 버전의 동화를 들려 줘야 하나? 전문가들의 입장도 엇갈리는 것 같습니다. 전문가 A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유아들은 들은 내용을 머릿속으로 상상하기 때문에 정서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부모들이 동화책을 읽어 줄 때 문맥을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그런 내용들을 건너 뛰거나 바꿔 읽어 주는 게 바람직합니다.”

하지만 또 다른 전문가 B씨는 다른 말을 합니다. “아이들은 무서운 이야기를 좋아하면서도 나름대로 걸러서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대로 들려 줘도 무방하다고 봅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무서운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아이들은 더 이상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아동교육 전문가가 아닌 저로서는 여전히 쉽게 판단하지 못할 문제입니다. 예전 미국 시트콤 ‘프렌즈’에선 주인공 중 한 명인 피비(리사 쿠드로)의 어머니가 이별이나 죽음으로 끝나는 영화들의 뒷부분을 모두 편집해버린 뒤 어린 딸에게 보여줬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성인이 된 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이티(E.T.)’를 다시 본 피비가 “이티가 자기 별로 다시 가버려 지구 소년과 헤어지는 결말이었다고?”라며 놀라는 장면이 나오죠.

1982년 6월 개봉한 영화 ‘E.T.’의 한 장면. 식물을 채취하러 지구에 왔다가 홀로 남겨진 외계인(왼쪽)과 그를 돌봐주는 아홉 살 소년의 우정을 그린 이 영화는 할리우드의 기념비적 작품이 됐다. /유니버설 픽쳐스

여기서 제가 오래 전 ‘이티’를 영화관에서 봤던 때가 생각납니다. ‘이티’는 1982년 영화였지만 우리나라에 수입 개봉된 것은 2년이나 지난 1984년의 일이었습니다. 이미 이티 만화, 이티 아이스크림(이티콘), 김창완이 부른 ‘외계인 이티’ 노래가 나오는 등 유행이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간 뒤였습니다. 저는 국제극장 아니면 허리우드극장에서 이 영화를 봤는데, 멀지 않은 자리에서 어떤 야구모자를 쓴 아빠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까말까한 어린 남매와 같이 이 영화를 보고 있었습니다. 고향을 그리워하던 이티가 병들어 눕고 국가기관이 주인공 엘리엇의 집을 봉쇄하는 장면에서, 뭔가 급한 일이 있기라도 한 듯 갑자기 그 아버지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자, 이티 죽었다! 영화 끝났다, 가자~!”

어린 남매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아빠의 손을 붙잡고 영화관 밖으로 나갔습니다. 이티가 “이티 폰 홈”을 외치며 되살아나고, 엘리엇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탈출하고, 마침내 자전거가 무전기를 든 기관원들의 코앞에서 하늘로 치솟고, 이티와 엘리엇이 우주선 앞에서 헤어지는 그 다음 장면을 그들은 보지 못했습니다.

혹시 그 남매는 지금도 이티는 그때 죽은 것으로 알고 있지는 않을까요? 그 생각만 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픕니다. 왜 이 일이 생각났느냐 하면, 원전을 왜곡하는 어른들의 어설픈 작업이야말로 오히려 동심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떨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한 줄기 역사의 단면이 드러나는 지점을 잡아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매주 금요일 새벽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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