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모순을 무대에 펼친 ‘21세기 사무엘 베케트’
노벨문학상 욘 포세 작품세계
1994년 처음 쓴 희곡 이후로
30년만에 노벨상 영예 안아
소설·시 등 다양한 장르 넘나들며
“삶 본질 묻는 깊은 여백의 언어”
“냉정하고 맑은 지적 작품” 평가
노르웨이 서안 오두막에 거주
시골서 운전중 수상전화 받고
“벅차고, 무섭기도 하다” 소감
스웨덴 한림원은 2023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욘 포세의 작품을 이렇게 평가했다. 한림원은 5일(현지시간) 공식 발표한 보도자료에서 “포세는 언어적, 지리적 측면에서 강력한 지역적 유대관계를 모던한 예술기법과 결합했다”며 “그는 선대 작가들의 부정적 견해를 공유하지만, 세상에 대한 허무주의적인 경멸을 초래하지는 않는다. 그의 작품엔 실제로 따뜻함과 유머가 넘친다”고 덧붙였다.
노르웨이 작가 욘 포세는 5~6년 전부터 꾸준히 노벨문학상 유럽 후보로 거론된 거장이다. 그는 비교문학 전공자로 희곡, 소설과 시, 에세이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문학적 삶을 이어왔다.
한국에 출간된 작품은 약 7권으로 2018년 번역된 소설 ‘저 사람은 알레스’가 처음이었다. 한 여인이 창가에서 해안가로 나가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회상하는 첫 장면으로 열리는 소설로 ‘그가 사라지고 돌아오지 않은 이후로 예전과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인간의 본질적 상실감, 외로움과 불안을 은유한 작품이다. 노르웨이 해안도시 헤우게순 출신인 작가의 삶이 반영된 작품이다.
장르 초월적 글쓰기를 이어 왔지만 욘 포세의 주요 장르는 희곡이었다. 특히 그의 희곡 속 세계를 움켜쥐는 두 키워드는 ‘가족과 인생’이다. 현대사회의 보편적 삶과 그 안에 찌든 모순을 발굴해 무대 아래 관객에게 삶의 실체를 보여주는 희곡을 써 왔다. 대표작 ‘이름’은 현대 사회 최소 단위인 가족의 단절을 그린다. 오랜 시간 출가했던 딸이 임신한 채 귀가하지만 그들 사이에 소통은 부재하고 자주 엇갈린다.
또 다른 희곡 ‘가을날의 꿈’ ‘어느 여름날’ ‘겨울’ 등도 대표작으로 꼽힌다. 그의 희곡에선 ‘내 평생 하나의 질문과도 같았어. 하나의 외침과도 같았어. 우린 서로를 발견했고 우리가 서로를 발견했던 것처럼, 그렇게 갑자기 우린 서로를 떠나야 했어. 하지만 그게 인생이지’란 희곡 속 문장이 인간의 운명과 모순이란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되는 그의 작품을 응축해낸다.
정민영 한국외대 교수는 “포세 작품은 삶의 본질을 묻는 깊은 여백의 언어”라며 “굵은 윤곽으로 이루어진 담담한 그림, 그 사이의 여백에 인간의 삶이 가진 구체적인 모습들이 존재한다. 그것은 현대인이 만들어내는 의사소통 부재의 사회적 관계이기도 하며, 인간 의식 속에 존재하는 무형의 원형질이기도 하다”고 강조했다.
노벨문학상 수상이 확정된 뒤 수상 소식을 알리는 한림원의 전화가 걸려온 순간, 욘 포세는 시골지역에서 운전 중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욘 포세는 같은 시간 스웨덴 출판사를 통해 “벅차고, 다소 무섭기도 하다”며 “노벨문학상은 다른 고려 없이 다른 무엇보다도 문학이기를 목표로 하는 문학에 주는 상이라고 여긴다”라고 덧붙였다. 그는 노르웨이 서안의 오두막에 거주 중이라고 외신은 전했다.
1959년 노르웨이 해안도시에서 태어난 그는 하르당게르표르에서 성장했다. 데뷔작은 24세 때인 1983년 소설 ‘레드, 블랙’이었고, 이후 ‘보트하우스’ ‘병 수집가’ ‘납 그리고 물’ ‘멜랑콜리’ 등을 냈다. 그에게 노벨상의 영예를 안겨준 희곡을 처음 발표한 건 30년 전인 1994년으로 첫 작품은 ‘그리고 우리는 결코 헤어지지 않으리라’였다. 이후 ‘이름’ ‘기타맨’ ‘어느 여름날’ ‘가을날의 꿈’ 등을 발표하며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욘 표세 희곡은 전 세계 무대에서 900회 이상 발표됐다. 그는 헨릭 입센 이후 가장 성공한 노르웨이 극작가로 평가받는다. 노르웨이어 최고 문학작품에 주어지는 뉘노르스크 문학상, 스웨덴 한림원이 북유롭 소설에 주는 도블로우그상, 또 브라게상, 국제입센상, 프랑스 공로훈장, 세인트 올라브 훈장 등을 모두 휩쓸었다. 영국 데일리 텔레그레프는 욘 포세를 “살아 있는 100인의 천재 중 한 명”으로 일컬었다.
욘 포세의 책을 번역해온 홍재웅 한국외대 교수는 이날 통화에서 “포세의 작품에는 감성주의가 들어설 여지가 없는 냉정하고 맑은 지적 언어와 문체가 깃들여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포세가 쓰는 이야기는 거대한 사회비판, 스펙터클한 서사가 아닌 지극히 일상적인 사건인데 그런 점에서 한림원의 경향이 바뀌어간다는 느낌이 든다. 내면적인 성찰, 삶과 죽음의 문제를 철학적으로 써낸 작품이 한림원 선택을 받았다”고 이번 수상 결과를 평가했다.
한국에서 출판을 앞둔 욘 포세 작품은 이달 20일 민음사에서 1·2권 합본으로 출판되는 ‘멜랑콜리아’다. 빛을 사랑했지만 그늘진 인생을 살아야 했던 예술가 라스 헤르테르비그가 독일의 한 예술 아카데미를 찾아간 뒤 정신착란을 일으키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욘 포세는 동화책을 쓰기도 했는데 그의 작품 ‘오누이’는 한국에서도 출판됐다. 노르웨이 피오르드 마을에 사는 5세 아이가 잔잔한 바다에 비친 풍경을 보면서 세상을 관조하는 이야기다. 당분간 출판계는 노벨문학상 특수를 누릴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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