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관 명예교수 “안미경중 전략 안 먹혀…양자택일 상황 내몰렸다”[창간 기획]
5년 새 남북관계 최악 속 한반도 둘러싼 국제질서 질적 변화
‘한·미·일 vs 북·중·러’ 신냉전 양상 띠며 진영 대결 벌어져
실익 위해 이념적 포지셔닝 분명히 할 필요가 있는 시대 돼
꽉 막힌 남북관계 풀려면 고위급 특사 파견 등 소통 노력해야
북한, 경제난 때문에 내년 미 대선 전후해 대화 나설 가능성
윤 정부는 일본과 관계 개선 의도 국민에게 충분히 설명해야
올해 한국 외교는 어느 해보다 속도가 빨랐고 어느 때보다 변화가 컸다. 3월 일제강점기 강제동원(징용) 해법을 발표하면서 한·일관계가 급속히 개선됐고, 7월에는 한·미·일 정상회의에서 합의한 ‘캠프 데이비드’ 3개 문건으로 준군사동맹 수준으로 3국이 밀착하는 길을 열었다.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이 높아지는 가운데, 최대 무역국인 중국을 ‘협력할 국가’가 아닌 ‘국제질서를 어기는 국가’로 규정했다. 지난달 북·러 정상은 군사협력을 선언했다. 한국 외교의 속도와 변화폭은 복잡한 한반도 상황과 국제정세가 얽히면서 더 큰 파장을 만들어내고 있다.
지난달 27일 만난 윤영관 서울대 명예교수 겸 아산정책연구원 이사장은 “5년 사이 세상이 안 좋은 방향으로 완전히 바뀌고 있고 한반도 주변 국제질서도 질적인 변화를 맞았다”고 분석했다. 북한의 군사 위협 고조로 남북이 최악의 적대관계 상태에 진입했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치명적 도전을 받았으며, 미·중 대결 심화로 한국이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는 것이다. 그는 외교 문제는 변화한 국제정치 현실을 직시하고 새로운 상황에서 국익을 철저히 따지는 전략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윤 교수와의 일문일답.
- 20년 전 외교통상부 장관 취임 당시 ‘급변하고 있는 국내외 외교환경이 새로운 도전과 과제를 제기하고 있다’고 했는데 지금도 다르지 않아 보인다.
“더 어려워지고 있는 것 같다. 5년 전까지만 해도 생각지 못한 3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첫 번째는 2018년에는 좋았던 남북관계가 최악의 적대관계 상태로 진입했다. 두 번째는 자유주의 국제질서에 대한 치명적 도전인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다. 영토 주권, 자결권 존중, 규범 기반 질서, 개방 경제,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국제질서가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으며, 이 같은 국제질서에 기반해 세계 10위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 한국 입장에서도 심각한 문제다. 세 번째는 미·중 대결 심화다. 5년 전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은 대중국 관여·포용 정책을 폐기하고 대결 정책으로 완전히 전환했다. 이전까지는 한국의 안미경중(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 전략이 먹혔지만 그 여지가 사라지고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방향으로 몰리고 있다.”
- 윤석열 정부가 선택한 한·미·일 협력이 한국 외교에서 갖는 의미는.
“한·미·일 정상회의는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질서의 질적 변화로 야기된 새로운 상황에 대한 대응 방안으로 추진됐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우리 외교력의 상당 부분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여온 일본과의 대결 구도를 협력 구도로 바꿔 안보 위협에 공동 대처하고 기술·경제 협력 등 미래지향적인 방향으로 끌고 가겠다는 취지는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외교정책의 미래지향적 의도와 당위성이 충분하다고 해도, 한·일 대결 구도에 익숙한 국민에게 의도를 체계적이고 충분히 설명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 한·미·일 협력 구도 속에서 한국이 손해를 보는 면이 많다는 우려가 있다. 3국의 손익계산은.
“바이든 대통령은 부통령 시절부터 한·일 협력을 강력히 원했지만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의 강력한 관계 정상화 의지가 한·미·일 협력 구도의 계기를 마련했고 이를 적극 활용한 것이 바이든 행정부다. 그런 면에서 미국 행정부와 지식인층에서는 기시다 일본 정부가 이에 상응하는 적극적 자세를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기적 측면에서 손익계산을 한다면 일본의 상응 조치에 대한 지적이 나올 수 있고, 그런 의미에서 기시다 정부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 바이든 행정부의 외교적 승리라는 시각이 많다.
“북한과 중국을 의식했을 때 미국 입장에서 한국은 전방기지, 일본은 후방기지인 셈인데 전후방이 서로 다투는 불편한 상황을 해소시킬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는 점은 상당한 업적이다. 한국에도 상당한 ‘플러스’가 있다. 안보적 측면에서 후방기지인 일본과의 원활한 협력은 북한 위협에 더 확실히 대응할 수 있게 한다.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성주 기지의 X-밴드 레이더가 북쪽을 감시하고 있는데 북한이 잠수함으로 남한의 뒤쪽을 공격하면 속수무책이 될 수 있다. 세계적 대잠전 능력을 가진 일본과 군사협력으로 안보상 허점을 막아낼 수 있다. 미·중 대결 심화로 정치·안보·경제가 완전히 중첩된 상황인데 (한·미·일 정상회의가) 미국이나 일본의 서방 진영 네트워크에 본격적으로 진입할 수 있는 길을 더 원활하게 했다. 상호 신뢰가 구축되면서 한국의 미래가 걸린 반도체나 인공지능(AI) 기술 협력의 가능성이 높아졌다.”
- 미국은 한·미·일 협력을 지속하겠지만 내년 미 대선 결과가 변수로 보인다.
“현재 국제정세는 대단히 아슬아슬하고 위태롭게 돌아가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듯하다. 1950년대 최빈국이었던 한국이 세계 10대 경제 대국이면서 민주국가로 성장한 데는 국민의 노력과 자유주의 질서가 바탕이 됐는데 이 질서가 크게 요동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하나는 국제정치 차원에서 이른바 상승대국인 중국의 파워가 커졌고, 이로 인한 국제 권력의 재배분 상태가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또 하나는 1980년대 이후 미국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과정에 소외된 이들의 어려움이 해소되지 못해 미국 내 백인 러스트벨트(미 중서부와 북부의 쇠락한 공업지대) 노동자들의 분노가 쌓였다. 이는 반세계화와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이끌어 온 미국 역할에 대한 강한 반발로 연결됐고 트럼프 전 대통령이 이런 흐름을 타고 반세계화, 반중, 반이민 정책을 펼쳤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바이든 현 대통령보다 9% 정도 앞선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당선되면 한·미·일 3국 협력 차원이 아니라 자유주의 국제질서 자체가 붕괴할 가능성이 높다. 한국도 어려움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고 국제정치는 대혼란의 방향으로 가고 세계 역사가 1930년대로 회귀할 가능성이 높다. 1930년대는 세계가 블록으로 나누어지고 일종의 근린궁핍화정책(타국의 희생 위에 자국의 번영이나 경기 회복을 도모하려는 국제경제정책)이 횡행했는데 비슷한 상황이 전개될 수 있다.”
- 북·러 정상회담에서 밝힌 군사협력은 어느 정도 이뤄질 수 있을까.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지난달 13일 ‘북한에 대한 제재는 (지금과) 완전히 다른 지정학적 상황에서 채택됐다’고 했는데, 대북 제재 결의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러시아는 북한에 플루토늄이나 농축 우라늄 등 원료 제공이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의 전술핵 탑재나 대기권 재진입 같은 기술 협력을 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변수는 중국이다. 중국은 비핵화, 비확산 체제를 고수하고 있어 러시아가 고도의 핵기술을 북한에 제공해 비확산 체제가 약화되고 한국과 일본 더 나아가 대만과 이란까지 핵 개발 움직임으로 가는 걸 원치 않을 것이다. 미국은 중국이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설득해야 한다. 또 러시아는 철저히 계산적 행동을 하는 국가라 북한에서 받는 무기, 즉 포탄의 가치에 상응하는 만큼의 보상만 할 뿐, 더 높은 기술을 주지는 않을 거라는 시각이 있다.”
- 한·미·일 대 북·중·러의 신냉전 구도라는 평가에 동의하는가.
“한·미·일에 유럽과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를 포함하고 북·중·러에도 이란 등을 추가해야 한다. 일부에서는 미·소 냉전 때와 달리 상호의존으로 깊이 연계된 미·중관계를 비교해 신냉전이라고 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보는데 나는 포괄적으로는 신냉전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미·중 대결은 세계 도처에 경쟁적으로 해군기지를 건설하고 아프리카나 태평양 섬나라를 대상으로 한 영향력 경쟁이 벌어지고, 군사·외교·경제뿐 아니라 이념 경쟁이 심각하다. 중국은 자유 민주주의보다 중국식 권위주의 모델이 우월적이라고 주장하고 글로벌 사우스(남반구에 위치한 개발도상국)의 정치 지도자들을 교육시키면서 모델 확산에 노력해왔다. 과거 미·소 간 이데올로기 전쟁 때와 비슷한 양상이고 미·중이 상호의존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점에서 신냉전 구조로 가고 있다고 본다.”
- 윤석열 정부가 이념을 앞세운 외교를 하는 것은 어떻게 평가하나.
“현재 국제정치 상황은 이념과 실리를 구분하기 힘들고, 실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이념적 포지셔닝을 확실히 해야 하는 세상이 됐다. 미·중관계가 좋았던 2018년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은 공산당이 지배하는 중국과 경제·사회·정치·문화적으로 교류하고 포용하면 민주화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미·중이 대립하고 진영 대결 양상으로 변해 디커플링(탈동조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민주주의 진영으로서의 아이덴티티를 확실히 해야 경제적 실익이 확보된다. 5년 전과 달리 민주주의 진영으로서 한국의 입장을 확실히 해두지 않으면 미국이나 일본이 우리에게 민감한 반도체 기술 협력을 하자고 칩4 동맹을 제안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미·일 캠프 데이비드 회의에도 들어간 AI 같은 민감한 전략 기술도 협력 제안을 안 했을 것이다. 믿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실익을 위해 이념적 포지셔닝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는 시대가 됐다.”
- 외교 사안이 국내 정치화되면서 더 복잡해지는 양상인데 해결책은 무엇인가.
“국내 정치 이슈화는 과거에도 있었지만 최근 더 심각해지고 있다. 근본 요인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질서의 질적 변화를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 5년 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는데, 많은 이들이 이전 상황에 적합한 사고와 관점을 가지고 현 상황을 보고 있다. 잔잔한 호수를 가다 험한 파도가 몰아치는 대양에 들어왔는데 과거같이 호수를 항해하는 방식으로 간다면 큰 혼란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안보나 외교 문제에 대해서는 감정적 접근이나 정파적 관점이 아니라 변화한 국제정치 현실을 직시하고 새로운 상황에서 국익을 철저히 따지는 전략적 접근을 위한 담론 구조가 형성됐으면 한다. 이 같은 담론 형성과 초당적 노력이 시급하고 이런 노력을 언론이 주도해 끌고 갔으면 하는 게 개인적 바람이다.”
- 남북관계는 지난 5년간 꽉 막힌 상태로 있는데 어디서부터 풀어내면 좋을까.
“국제정치를 공부한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한반도에서 전쟁을 막아내는 것이고, 상대가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도록 힘을 기르는 것이다. 이것이 국제정치의 기본적 패턴이고 교훈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억제에만 치중하면 안 되고 소통의 노력이 필요하다. 문제는 북한이 빗장을 닫아걸고 거부하고 있다는 점이지만 계속 소통 채널을 열려는 노력이 바람직하다. 특히 바이든 행정부가 과거 클린턴 정부 때 윌리엄 페리 국방장관을 특사로 임명하고 상당한 권한을 줬던 것처럼 고위급 인사를 특사로 임명해 북한에 파견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 달라진 국제질서 속에서 한반도 평화를 추구할 수 있는 외교책은 무엇일까.
“북한은 내년 미 대선을 전후해 대화로 나올 가능성이 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경제난 때문이다. 2025년 새로운 미 행정부의 출범이라는 중요한 변화를 계기로 북·미 간 소통이 재개될 수 있다고 본다. 누가 당선되느냐에 따라 한·미관계 정립도 달라질 수 있지만, 한반도 평화 정책 가능성을 모색할 기회가 올 수 있다고 보고 북한 비핵화 전제하에 남북, 미국이 모두 만족할 수 있는 평화 정착 방안을 모색해봐야 한다.”
- 미리 준비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그간 한·미관계를 보면 장기적 로드맵 없이 그때그때 눈앞에 떨어진 이슈들에 연연했다. 장기 플랜을 염두에 두고 코디네이션하는 부분이 부족했는데 강화된 한·미 협력과 신뢰를 충분히 활용할 필요가 있다. 장기적 관점에서는 한반도의 바람직한 상황을 전제로 도달할 수 있는 여러 방안을 허심탄회하게 논의해야 한다.”
윤영관 교수는… 윤영관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는 외교·안보 분야에서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최고 전문가로 꼽힌다. 노무현 정부 초대 외교통상부(외교부) 장관(2003~2004년)을 지냈다. <외교의 시대: 한반도의 길을 묻다>(2016) 등 집필 활동과 강연을 통해 풍부한 통찰을 제시해왔다. 지난 3월부터 아산정책연구원 이사장을 맡고 있다.
박은경 기자 yam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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