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국의 우리문화 들배지기] 그림은 알고 있다
나·랏:말쌍미 ‘·中듕國·귁·에달아’는 조선이 중국과 화이부동(和而不同)함을 대놓고 만천하에 공표한 것이다. 이런 주체적 자각 속에서 세종은 한자의 역리(易理), 상형원리, 자방고전(字倣古篆) 원리로 훈민정음(1443)을 만들었다. 한자 밭에서 한자를 넘어선 한글이 태어난 것이다.
15세기 조선의 그림·글씨·도자·지도·활자 역시 ‘몽유도원도’·안평대군체·분청자기·‘혼일강리역대지도’(1402)·‘초주갑인자’(1434)와 같은 세계유산급 유물에서 보듯 중국과 같고도 다르다.
일본 후쿠오카시립미술관의 ‘방곽희추경산수도(倣郭熙秋景山水圖)’(도판) 전시가 화제다. 조선일보는 지난 9월22일 한국 회화사 전문가들의 발언을 빌려 “몽유도원도(1447)에 필적하는 15세기 조선의 산수화 발견”이라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 전기 회화의 상식을 뒤엎어버리는 그림” “몽유도원도와 전혀 다른 양식의 15세기 조선 산수화가 일본에 있었다니 놀랍다”고 전했다.
이것은 놀랄 일이 아니라 ‘몽유도원도’를 다시 보게 하는 그림이다. ‘몽유도원도’ 안에 ‘방곽희산수도’가 여러 점 경영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곽희를 뛰어넘고 있다. 구도에서 전자는 안평대군의 꿈을 스토리 전개에 따라 편파와 중앙집중구도가 혼융된 파노라마로 그린 그림책이라면, 후자는 용틀임하는 고산준령을 중집구도 한 컷으로 잡아냈다. 준법에 가서는 특히 ‘몽유도원도’는 산과 바위를 곽희를 본뜬 운두준(구름 형상으로 바위를 필묵으로 묘사하는 기법)으로 그려낼 뿐 아니라 이것을 넘어 진하고 연한 필묵의 농담을 음양원리로 구사하여 바위 → 산맥 → 천지를 시작도 끝도 없이 경영해내고 있다. 이러한 독자적 필묵법인 ‘안견준’에는 세상의 모든 그림언어가 다 녹아 있다. 오세창의 <근역서화징>에 나오는, “안견은 고화(古畵)를 많이 보고 그 그림의 핵심 요체를 쏙 뽑아냈으니, 곽희를 모방하면 곽희가 되고, 이필을 모방하면 이필이 되고, 유융도 되고 마원도 되어서 모방한 대로 되지 않는 게 없었다”는 김안로의 <용천담적기> 증언 그대로다. 요컨대 ‘몽유도원도’에는 역대 거장들의 준법, 묘법, 시점이 혼일(混一)되어 천지만물이 생장하고 있다. 이것은 물아일체의 성리학적 세계질서를 시각화한 것이자 ‘천지의 이치는 오직 음양오행밖에 없다(天地之道一陰陽五行而已)’는 훈민정음 창제철학의 동시대 그림 버전에 다름 아니다.
일본 학자가 명나라 그림이 아니라 15세기 조선 그림으로 규명한 이번 작품도 평가의 방점은 ‘방곽희’가 아니라 곽희로 곽희를 넘어선 조선 그림에 있다. 여기엔 곽희의 ‘조춘도’와 역대 ‘소상팔경도’ ‘사시팔경도’의 구도와 생명력에다 용틀임으로 천지를 가르는 고산준령의 기운이 화면에 가득하다. 개창기 조선인들의 자연과 하나된 탈속한 기상이 조형언어로 잘 드러나 있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일본 학자가 이 그림의 작자를 작품에 찍힌 ‘문청(文淸)’이라는 낙인과 달리 특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국회화사를 다시 쓸” 조선 그림역사의 첫 단추인 만큼 한·일 공동의 후속 연구가 긴요하다.
이를 위해서 한국학계의 선결과제도 있다. 한국에도 전칭이나 작가 미상으로 규명을 기다리는 안견이나 안견파 그림이 적지 않다. 언제까지 한국학자들은 “15세기로 확정할 수 있는 산수화는 국내엔 없고, 일본 덴리대가 소장한 안견의 몽유도원도 한 점만 있다”고 할 것인가.
이런 과제를 풀지 않으면 ‘고려불화’ 사례처럼 우리가 우리를 부정하면서 눈앞에 안견이 지나가도 시지불견(視之不見)하게 되고, 남의 연구를 손 놓고 기다릴 수밖에 없게 된다. ‘방곽희산수도’의 작자가 누구인지는 ‘몽유도원도’가 알고 있다.
이동국 예술의전당 수석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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