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소풍과 휴가
꼭대기로 소풍 가요
우리가 딛고 걷는 바닥은 아무 데도 없거든요
저기 교묘하게 죽어 있는 바닥들이 보이잖아요
우리의 바닥들은 바닥을 치고 위로 더 올라가죠
이제 혁명의 노래도 위로 올려 보내요
이제 투쟁의 기다림도 위로 올려 보내요
이제 죽음의 상징 따위도 위로 올려 보내요
정교하지 못한 거짓말들도 위로 올려 보내요
위로 위로 올라가다보면 그곳에
어처구니없는 이유들이 기다리고 있겠지요
그 위에 아마도 펄럭이는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목소리들이 붙잡고 있는 깃발들이 있을 거예요
그 속에 바닥에서 올라온 것들이 숨어 있을 거예요
올라간 것들은 이제 내려오지 않을지도 몰라요
울음을 위로하는 시간만큼 견딘다면 또 모를까
의문투성이 위로가 필요할 때
아니면 바닥의 가장자리가 닳을 즈음 내려올지도
그러니 우리 이제 바닥을 치고 꼭대기로 소풍 가요
- 시, ‘소풍’, 유현아 시집 <슬픔은 겨우 손톱만큼의 조각>
추석연휴 동안 짬짬이 고구마를 캤다. 땅이 마를 만하면 비가 오고, 캐야겠다 싶으면 다시 젖기를 반복하던 이상한 날씨 때문에 다소 늦어진 추수였다. 우북하게 덮인 고구마순을 보며, 혹시나 조금 더 땅속에 두면 그사이 더 자랄지도 모르겠다는 기대는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큰 애는 동치미 무만큼 크고, 당근만 한 애가 많았다. 가운데 손가락만 한 두께에 젓가락 길이 정도로 늘씬한 애들이 태반, 한마디로 올 추수는 바닥이었다.
고구마를 캐는데 어디서 자꾸 삐약대는 소리가 들려와 찾아봤더니 잡초 무성한 호박넝쿨 아래 아기고양이들이 숨어 있었다. 옆집 펜스에서 날아온 한 장 천막 쪼가리가 그들의 집이었다. 가까이에 사람이 있으니 젖 먹일 어미가 접근하지 못해 배가 고파 우는 모양이었다. 두 놈은 담벼락 따라 어미를 찾아가고 어미는 주변을 어슬렁거리다 사라졌다.
임시공휴일까지 끼어들어 긴 연휴였다. 멀리 지나가는 버스를 보다 남들 쉬는 동안 일하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남들 쉬는 동안이 더 외롭고 힘든 사람들. 독립영화 <휴가·사진> 속 주인공 재복씨처럼, 밥줄 끊기고 천막 농성장에서 산 지 2000일 넘어가는 사람들. “바닥에서 올라”와 꼭대기에서 “펄럭이는 사람들”과 “바닥을 치고 위로 더 올라”간 사람들. 강남역 8번 출구 앞, 철탑에 올라가 있는 동료들에게 몇 년 동안 밧줄에 밥 실어 올려주던 재복씨처럼 억울해서 그만두지 못하는 사람들. 해고무효소송에서 끝내 패소하고 동료들에게 휴가를 신청하며, 다녀올게, 말하는 풀 죽은 얼굴들.
<휴가> 속 재복씨처럼 휴가 나와 밥부터 하고, 냉장고 뒤져 청소하고 장보고 가스레인지 닦고 어묵과 멸치도 볶는 누군가를 생각한다. 큰아이 대학입학 예치금과 작은아이가 점찍어둔 롱패딩 사주기 위해, 그 짧은 휴가 동안 친구 공장에 알바 다니고, 점심시간에 컵라면과 삼각김밥으로 때우던 알바청년 도시락도 싸가고, 고장난 보일러도 고쳐주는 따스한 손들을. 천막 농성장으로 향하며 아이들에게 아빠, 다녀올게, 고개 숙이는 목소리들을.
젖은 흙 범벅인 고구마를 물에 씻겨놓으니 분홍빛과 보랏빛이 반반 섞인 게 참 어여쁘다. 땅속 사정과 하늘이 받쳐주지 못해 자라다 말았구나 생각하니 대견하고 더 기특하다. 큰 애, 중간 애, 작은 애 세 종류로 구분해 채반에 건지다 보니 배가 고프다. 자라려고 뿌리수염을 길게 뻗은 작은 고구마를 베어 무니 참 달다. 고구마는 무슨 힘으로 바닥에서 저를 키워나갔을까. 바닥과 꼭대기가 하나의 밧줄로 이어진 사람들은 무슨 힘으로 “울음을 위로” 할까.
김해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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