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의 문헌 속 ‘밥상’] 송편이 얼어 죽었다
“송편이 냉동 칸에서 얼어 죽다. 송편이 냉장 칸에서 저체온증을 견디다 못해 사망하다.”
냉장고 문을 열어 주시라. 냉동 또는 냉장 칸을 살펴보시라. 여러분은 이미 사망한 송편 또는 사망 직전의 공포에 떨고 있는 송편과 마주하리라. 한 주 전만 해도 곳곳에서 송편은 무더기를 이뤘다. 데려와 처음부터 얼려 죽일 생각은 없었다. 다만 남들 따라한 다음이 문제였다. 의례를 빛내기에 애매하고, 진짜 내 고향을 환기하기에 애매하고, 입속의 황홀에 복무하기에 애매했다. 그러다 얼어 죽었다. 오해부터 풀자. 송편은 ‘추석 전용’이 아니다. 허균의 <도문대작>(1611)은 송편을 느티떡(槐葉餠)·진달래화전·배꽃화전과 나란한 봄날의 별미로 여겼다. 비슷한 시기의 여러 문헌은, 송편을 초파일 또는 유두일(음력 6월15일)의 별미로 손꼽는다. 점잖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선물용이었다. 물론 추석에도 즐겼다.
송편은 ‘멥쌀가루를 익반죽해 소를 넣어, 빚어, 시루에 솔잎을 켜켜로 놓고 찐 떡’이다. 요컨대 멥쌀을 바탕으로 소와 솔잎의 향으로 이채를 더한 기본기술 사계절 떡이다. 노동의 떡이기도 했다.
홍석모(1781~1857)의 <동국세시기>에 보이는 음력 2월 초하루 송편 풍속은 이렇다. “(전략) 큰 것은 손바닥만 하게, 작은 것은 달걀만 하게 해서 모두 반달 모양(半璧樣)으로 만드는데, 찐 콩으로 소를 해 시루 안에 켜켜이 솔잎을 깔고 찐다. (중략) 이것을 송편(松餠)이라고 한다. 송편을 노비들에게 나이 수대로 먹인다. (중략) 떡집에서는 팥·검은 콩·푸른 콩으로 소를 해 넣기도 하고 꿀을 버무려 만들기도 하고, 찐 대추·삶은 미나리를 넣어 만들기도 하는데 이달부터 그것을 시절음식(時食)으로 삼는다.” 같은 책의 ‘추석’ 항목엔 송편이 없다. 다만 음력 8월 즐기는 떡을 이렇게 기록했다. “술집에서는 햅쌀술을 빚어 팔고 떡집에서는 올벼송편(早稻松餠), 무·호박시루떡을 만든다. 또 찹쌀가루를 찐 다음 그것을 쳐 떡을 만들고 거기에 볶은 검은 콩가루나 노란 콩가루 혹은 참깨 가루를 묻혀 파는데, 이것을 인절미(引餠)라고 한다.” 더위 가시고, 밝은 달 아래, 떡 해 먹으며 쉬기 좋은 즈음의 떡으로 올벼송편, 맛을 좀 더 낸 시루떡, 화려한 인절미 등이 다 좋았다. 그렇게 지역마다, 내 입맛 따라 떡을 즐길 만한 명절이 또한 추석이었다.
그러다 신문과 방송이 이즈음의 떡이 오직 송편뿐인 듯 굴기 시작했다. 떡 중 중부 지역 송편 하나만 붙들었다. 국정교과서는 영호남·서남해·산간의 일상과 민속을 무시하고 ‘추석 송편’을 외우게 했다. 그러면서 추석을 수놓던 각색의 메떡·찰떡·절편·인절미·시루떡·부편·증편·경단이 시들어 갔다. 지역마다 집집이 달랐던 감자송편·메밀송편·도토리송편·무송편·칡송편·삘기송편·모싯잎송편·호박송편·주먹송편·죈두기송편·조개송편·오색송편이 함께 시들어 버렸다. 한국인이 뻔한 송편을 뻔하게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사이 송편이 얼어 죽었다. 1970년대를 지나 오늘에 이른 추석 송편의 현황이다. 조선 전·후기, 식민지 시기, 해방 앞뒤와는 또 다른 생활 추이다.
고영 음식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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