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업적 다 지워졌다… ‘기적의 비만약’ 탄생시킨 여성 과학자의 분노

박건형 테크부장 2023. 10. 5.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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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건형의 홀리테크] ‘다크 레이디’ 모이소브의 명예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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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김의균

2021년 봄 캐나다 게어드너 국제상은 당시 가장 큰 관심을 모으고 있던 신약 후보 물질을 개발하는 데 기여한 세 과학자에게 수여됐습니다. 생물의학 분야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이 상의 영예를 차지한 것은 미 매사추세츠 종합병원의 조엘 해버너 박사, 토론토대 대니얼 드러커 교수, 덴마크 코펜하겐대 옌스 홀스트 교수였습니다. 전 세계가 이들의 수상을 축하하는 와중에 분노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미 록펠러대의 여성 화학자 스베틀라나 모이소브(Svetlana Mojsov) 교수였습니다. 모이소브는 이후 잊힌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고 있습니다. 모이소브의 싸움에는 과학계의 오랜 관행과 편견,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가치 있는 약물을 둘러싼 특허와 명예가 모두 등장합니다.

◇인슐린 유발 호르몬 합성의 주역

유고슬라비아(현 세르비아) 베오그라드에서 태어난 모이소브는 베오그라드대에서 화학 학사 학위를 받은 뒤 1972년 록펠러대 대학원에 진학했습니다. 그는 노벨상 수상자이자 단백질 합성의 권위자 브루스 메리필드의 연구실에 몸담았습니다. 이 연구실은 주로 아미노산이 짧게 연결된 생체 구성 물질 펩타이드를 합성했는데, 모이소브는 특히 췌장에서 분비되는 글루카곤 합성에 집중했습니다. 당시 과학계에서는 글루카곤이 제2형 당뇨병 치료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고 있었습니다.

1980년대 모이소브는 매사추세츠 종합병원의 펩타이드 합성 시설 책임자가 됐습니다. 이 시설에서 모이소브는 2021년 게어드너상 수상자 해브너, 드러커와 함께 일했습니다. 세 사람은 오랜 노력 끝에 장에서 생성돼 인슐린 분비를 유발하는 호르몬 ‘글루카곤 유사 펩타이드(GLP-1)’를 실험실에서 합성해냅니다. 당시 이 논문의 제1 저자가 바로 모이소브였습니다. 심지어 해브너는 공저자 5명 가운데 가장 마지막 저자였습니다. 이후 GLP-1 관련 논문에도 모이소브는 꾸준히 이름을 올리며 연구를 주도했습니다. 홀스트 교수는 덴마크에서 독자적인 연구로 비슷한 시기에 GLP-1을 만들었습니다.

◇세계적 발명으로 이어져

이후 GLP-1은 수많은 과학자와 제약사의 연구 과제가 됐지만 빛을 보기까지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GLP-1을 주사하면 췌장에 도달하기 전에 사라지면서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고, 1990년 GLP-1을 오랜 기간 유지할 수 있는 물질이 발견된 뒤에야 상용화가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덴마크 노보노디스크는 GLP-1 약물인 리라글루타이드를 만든 뒤 ‘빅토자’라는 이름으로 2010년 미 식품의약국(FDA) 승인을 받았습니다. 이후 노보노디스크는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리라글루타이드를 개선한 물질 세마글루타이드를 만들어냈고, 삭센다·오젬픽이라는 획기적인 당뇨병 치료제를 출시합니다.

그런데 세마글루타이드가 전 세계적 명성을 갖게 된 것은 부작용 때문입니다. 사용자에게서 체중 감소 효과가 나타난 거죠. 노보노디스크는 아예 세마글루타이드를 비만 치료제로 개발하기로 하고 임상을 진행합니다. 일주일에 한 번 맞기만 하면 체중이 빠지는 ‘기적의 비만 치료제’ 위고비가 탄생한 순간이었습니다. 인슐린을 유도하는 GLP-1이 포만감을 높이고 배고픔을 줄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픽=김의균

◇철저히 잊힌 이름

GLP-1 탄생에 참여했던 해브너와 드러커는 학계를 대표하는 거물이 됐고 여러 상을 거머쥐었습니다. 해브너는 GLP-1의 원천 특허 4건을 노보노디스크에 판매해 로열티도 받았습니다. 언론이 이들의 성공을 조망하는 사이 모이소브는 철저히 잊혔습니다. 사이언스는 모이소브가 다른 과학자들과 다른 길을 간 것을 원인으로 꼽습니다. 모이소브는 매사추세츠 종합병원에서 일하던 중 결혼과 출산을 거치며 록펠러대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해브너·드러커처럼 자신의 연구실을 차리거나 대규모 연구 지원금을 받지도 않았습니다. 매사추세츠 종합병원을 떠난 뒤에 벌어진 해브너의 GLP-1 특허출원, 노보노디스크의 특허권 매입도 알지 못했습니다.

모이소브는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해브너에게 소송을 제기해 특허 권리를 인정받았지만 이미 늦은 시점이었습니다. 사이언스는 “해브너와 드러커 등 동료들이 모이소브를 언급하지 않은 것이 문제를 키웠다”고 했습니다. 과학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최초의 발견·발명’에 가장 큰 기여를 하고도 철저히 잊힌 존재가 된 겁니다.

◇‘다크 레이디’의 길 갈까

모이소브는 명예 회복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습니다. 그의 한 친구는 지난달 뉴욕타임스가 GLP-1의 역사를 서술한 기사에서 모이소브의 이름이 빠지자 정정을 요청했습니다. 1월 국제 학술지 네이처의 GLP-1 특집 기사도 모이소브가 누락됐는데 항의를 받은 네이처는 기사를 수정하기로 했습니다. 과학계에서는 모이소브가 게어드너상에 특히 흥분한 것을 두고 노벨상 때문으로 보고 있습니다. 전 세계 수많은 사람의 당뇨병을 치료하고, 비만 치료의 역사를 바꾼 GLP-1은 가까운 시일 내에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이 유력합니다. 그런데 노벨상은 한 해 한 분야에 최대 3명까지만 공동 수상자를 선정합니다. 모이소브는 노벨상을 받을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모이소브의 사례가 주목받는 것은 그가 여성이라는 점도 큽니다. 현대 과학의 역사에서 잊히거나 역할이 축소된 수많은 여성 과학자의 모습이 모이소브에게 비춰지고 있는 것이죠. 유전자(DNA) 구조 규명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지만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에 가린 로절린드 프랭클린, 직접 만든 전파망원경으로 별의 죽음의 증거 ‘펄서’를 찾고도 지도 교수에게 노벨상을 빼앗기다시피 한 조셀린 벨 버넬처럼 수많은 여성 과학자가 인류 발전에 기여하고도 무시당했습니다. 이들을 일컫는 ‘다크 레이디’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입니다. 모이소브는 과연 어떤 결말을 보게 될까요. 세상을 바꾼 발명에서 정당한 지분을 인정받고 싶은 건 당연한 일인 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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