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권일의 다이내믹 도넛] 작가는 노동자인가

한겨레 2023. 10. 5.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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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를 노동자라고 할 수 있을까요? 스스로 노동자라 생각하며 글을 쓰진 않거든요. 고용주가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노련한 작가들은 곳곳에 깔린 지뢰를 피하기도 하지만, 새내기들은 그야말로 속수무책 시스템의 먹이가 되고 만다.

작가는 노동자일까? 현행 법률이나 사회 통념상으론 노동자보다 자영업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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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권일의 다이내믹 도넛]

파업 중인 미국 작가들이 지난달 21일(현지시간) 캘리포니아주 버뱅크의 월트디즈니 본사 앞에서 피켓 시위를 하고 있다. 버뱅크/AP 연합뉴스

박권일 | 독립연구자·‘한국의 능력주의’ 저자

“작가를 노동자라고 할 수 있을까요? 스스로 노동자라 생각하며 글을 쓰진 않거든요. 고용주가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시작부터 한분이 정체성에 의문을 던졌다. 지난 9월 중순, 작가노조를 준비하는 이들이 처음 얼굴을 맞댔다. 이른바 ‘순문학’, 에스에프(SF), 르포, 대중문화 비평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는 현역 선수들이 두루 참석했다. 출판문화상 시상식장 같은 곳 아니면 평생 한자리에서 마주칠 일 없는 분들이다. 나는 사회과학과 저널리즘 사이 어딘가의 애매모호한 인간이지만, 일단 ‘인문사회 작가’로 분류됐다. 처음엔 살짝 서먹했지만 금세 공기가 뜨거워졌다. 작가들은 입에서 불을 뿜듯 ‘피해 사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초대를 받아 어느 자리에 갔는데, 내게 ‘저분(작가) 인사드려. A급이야’ ‘저분은 B급이지만 알아두면 좋아’라는 식으로 말씀하는 거예요. 당시에 뭣 모르고 인사했는데, 각성한 뒤 그것이 얼마나 모두에게 모멸감을 느끼게 하고 우리를 분열시키는지를 알게 됐어요.”

“2020년 출판사와 처음 계약할 즈음 문체부에서 표준계약서가 나왔다는 얘길 들었어요. 그런 게 올 줄 기대했는데, 전혀 다른 게 오더라고요. 처음엔 ‘내가 신입이라 그런가?’ 했죠. 4년차 들어 그것이 아님을 알았어요. 출판사는 싸우는 사람만 표준계약서와 비슷한 수준으로 맞춰준 거예요.”

“2005년부터 했고 지금이 2023년이니 20년이 돼 가는데 원고료는 변하지 않았어요. 심지어 떼이기도 해요. 칼럼 하나 쓰기 위해 열흘은 자료를 찾고 책을 읽고 머리를 싸매야 하는데, 너무 낮은 봉급으로 일하고 있다는 자괴감이 들어요.”

“문학 하는 사람들이 내성적이고 고립되어 있어서 모이는 게 어렵다고 하는데, 그런 것치고는 무슨 문인단체나 문학상이 너무 많지 않나요?”

20년차가 넘는 ‘고인물’에서 갓 데뷔한 ‘햇병아리’까지, 경력과 처지는 천차만별이었지만 겪는 부조리의 성격은 같았다. 모두가 ‘관행’이란 이름으로 플랫폼에 각개격파당하며 혹독하게 착취당하고 있었다. 노련한 작가들은 곳곳에 깔린 지뢰를 피하기도 하지만, 새내기들은 그야말로 속수무책 시스템의 먹이가 되고 만다.

누구는 이렇게 이죽거릴지 모른다. “그렇게 힘들면 그냥 회사에 취직해서 일해. 너한테 작가 하라고 누가 칼 들고 협박했냐?” 이른바 ‘누칼협’이다. 네가 선택했으니 어떤 손해나 고통도 감내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걸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이 말은 결국 약자의 항의를 틀어막는 기득권 옹호 논리라는 점에서 특히 악질적이다. 이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소리인지는 논리를 일관되게 밀어붙여 보면 알게 된다. “누가 계속 살라고 칼 들고 협박했냐? 사는 게 힘들면 그냥 죽어!”

‘누칼협’의 유서 깊은 자매품으로 ‘억울하면 출세(성공)해라’가 있다. 특히 문화예술·집필 노동은 예로부터 양극화로 악명 높았다. 극소수가 대부분의 파이를 차지하고 나머지는 최저생계 선 아래로 내몰리기 일쑤다. 한편으로는 ‘스타’가 되기만 하면 모든 걸 단번에 보상받고도 남기 때문에 “그때까지는 와신상담하며 부당한 처우도 참아야 한다”는 도착적인 심리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기도 하다. 다만 성공하면 큰 보상을 받는다는 사실이, 성공 못 한 이가 턱없이 낮은 보수나 부당한 멸시를 견뎌야 할 이유는 될 수 없다. 만약 그런 논리가 당연했다면 영화인노조나 예술인노조는 출범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앞서 정체성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작가는 노동자일까? 현행 법률이나 사회 통념상으론 노동자보다 자영업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대가 변했다. 플랫폼 배달노동자도 이제 여러 나라에서 법률상 노동자로 인정받고 있다. 작가 일은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자기표현적 성격이 강하지만, 그렇다고 노동이 아닌 것은 아니다. 최근 할리우드 작가조합이 넷플릭스·디즈니 등 초거대 미디어 제작업체 연합과의 싸움에서 이겼다는 소식이 들린다. 이들은 노동조합(trade union)이 아니라 ‘길드’(Writer’s Guild of America)라는 이름을 걸었다. 한국의 작가노조는 어떤 모습이 될까? 아직 안갯속을 헤매는 느낌이지만 이것 하나는 명료하다. 존엄을 걸고 부당함에 맞서는 ‘결사’(association)가 많아질수록 그 사회는 성큼 진보한다.

작가노조 준비위원회 참여신청(https://han.gl/ayAB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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