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가 ‘민의의 전당’인 이유[국회를 찾는 사람들]

이두리 기자 2023. 10. 5.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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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창간 77주년 기획
수학여행에 ‘노란 버스’만 이용하도록 한 법제처의 유권해석으로 피해를 입은 체험학습장 운영자들이 지난달 20일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성동훈 기자

국회는 민의의 전당이다. 저마다의 이야기를 지닌 사람들이 각자의 절박함을 안고 국회를 찾는다. 때로는 이들의 요구가 국회에 반영돼 법안, 예산, 국정감사(조사)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정쟁으로 시끄러운 틈에 묻혀 빛을 보지 못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21대 국회의 마지막 정기국회가 시작된 지난달엔 평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국회를 찾았다. 추석 연휴를 앞두고 일주일 동안 이들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이번엔 타투 합법화”

“국회가 우리에겐 큰 효용성을 보여주고 있어요.”(김도윤 타투유니온 사무장)

2021년 류호정 정의당 의원이 국회 본청 앞 잔디밭에서 타투 스티커로 수놓은 등을 드러내 보인 이후 국회가 타투 노동자들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몇 년 동안 문신·타투 합법화를 위해 싸워 온 타투 노동자들은 그 후 “국회를 시끄럽게 만든 효과”를 실감했다.

타투유니온은 이제 그 성과를 문신·타투 합법화로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난해 “문신이 의료행위에 포함된다는 해석이 직업선택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법원 무죄 판결을 받는 것을 목표로 했던 이들은 최근 국회에 희망을 걸고 있다. 이들이 지겹도록 국회를 찾는 이유다.

한 타투노동자가 지난달 18일 ‘문신업법’ 발의를 환영하는 기자회견을 하기 위해 국회 소통관을 찾아 기자회견문을 들어 보이고 있다. 이두리 기자

지난달 18일에는 타투유니온을 비롯해 두피문신·반영구화장·보건미용 등 문신 관련 7개 단체가 국회 소통관에 모여 합동 기자회견을 열었다. 처음으로 각 직역단체들의 이견을 조율해 반영한 문신업법 발의를 환영하기 위해서였다. 내년 5월 끝나는 21대 국회에서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몇 번이고 국회를 찾을 생각이다. 김 사무장은 “그냥 합법화 말고, 잘 바꾸는 게 어떤 건지에 대해서 끊임없이 얘기했으면 좋겠다. 그런 건 법원에서 할 수 없다”고 국회에 대한 기대를 드러냈다.

입법의 공백을 호소하는 피해 당사자들의 요구도 있었다. 지난달 20일 국회 소통관을 찾은 체험학습장 운영자들이었다. 정부와 국회는 현장체험학습 무더기 취소로 인한 전세버스 피해에 대한 규제 완화 대책으로 ‘노란버스법’을 내놓고 빠르게 상임위를 통과시켰지만, 또다른 피해자인 체험학습장 운영자들은 대책의 사각지대에 놓였다. 김기탁 동두천 ‘놀자숲’ 대표는 “버스는 예약 취소 후 중·고등학교 수학여행으로 대체가 됐는데, 체험학습장은 초등학교 체험학습 거의 전체가 취소되면서 존폐 위기에 처했다”고 대책을 촉구했다. “이런 황당한 이슈로 인해 논란이 불거지길 바라지 않는 마음에 (국회에) 자리하게 됐다”고 했다.

■“갑작스런 예산 삭감 바로잡혀야”

정기국회에서 본격적인 논의를 앞둔 내년 정부 예산안에 대한 목소리도 분출했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사회적기업 대표들은 지난달 18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포럼에서 정부의 사회적기업 예산 삭감에 대한 분노를 쏟아냈다. 자립준비청년에게 일자리·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사회적기업 ‘브라더스키퍼’의 김성민 대표는 “누구나 밟히면 움찔한다. 그런 움직임을 보여주기 위해 모인 것”이라며 “오늘 같은 대화의 장이 정책 결정 전에 무조건 있어야 했다”고 말했다.

윤석열 정부는 자립준비청년에 대한 지원을 강화를 추진하고 있다. 김 대표는 지난해 출범한 대통령 직속 자립준비청년과 함께서기 특별위원회 소속 위원이다. 그런데도 일괄적인 예산 삭감을 피하지 못했다. 그는 “특위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정부로부터) 칭찬을 많이 받았는데 뒤에서는 갑자기 예산을 삭감하는 이중적인 모습에 토론회 참여를 결심했다”고 말했다. 이날 포럼에선 향후 국회 논의에서 부당한 예산 삭감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요구가 거듭 나왔다.

사회서비스원 돌봄노동자들도 지난달 19일 소통관을 찾아 정부의 사회서비스원 예산 삭감과 민영화 시도를 규탄했다. 이들에게 국회는 약자들의 목소리를 정부에 관철시킬 희망의 지렛대였다. 전지현 민주노총 전국돌봄서비스노동조합 사무처장은 “(사회서비스원 예산 삭감 이후) 보건복지부에서 노동자들을 안 만나주는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시위하는 것뿐인데, 국회의원들은 직접 보건복지부와 만나 예산 논의를 할 수 있지 않나”라며 “밖에서 전단지를 돌리고 피켓팅을 하는 방식만으로는 안 되니까 국회의원과 만나 방법을 찾고자 한다”고 말했다.

■아동·미얀마인 “우리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국회는 기후 위기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을 촉구하는 미래 세대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 초·중·고등학생 4명은 지난달 19일 학교를 결석하고 소통관에서 기후위기 대응 아동권리보장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날 처음 국회에 방문한 제주 노스런던컬리지스쿨 13학년 김건이군은 “입법부에서 기후위기와 관련된 법들이 논의되고 있지만 아동의 의견이 반영될 수 있는 공간은 많지 않기에 우리의 목소리를 직접 전달하기 위해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정아윤양(왼쪽)과 박강은양이 지난달 19일 기후위기 대응 아동권리보장 촉구 기자회견에서 푯말을 들어 보이고 있다. 이두리 기자

당장의 급박한 정치 이슈와는 거리가 먼 이들의 기자회견을 취재하는 기자는 1명뿐이었다. 김군은 “예상보다 더 무관심한 모습에 당황했다”면서도 “카메라에 담기고 기록이 되니까 의미가 없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2021년 군부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미얀마의 민주화를 위한 절박한 목소리도 있었다. 지난달 21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미얀마 봄의 혁명, 어디까지 왔나’ 토론회에 참석한 미얀마인 웨노에씨는 “(쿠데타 후) 초창기에는 국회에서 결의안을 채택하고 지원금을 모금하는 등 인도적인 행동이 있었는데 이제는 관심이 떨어졌다는 걸 느낀다”고 말했다. 이날은 국회 본회의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체포동의안 표결이 이뤄지면서 토론회를 공동 주최한 4명의 의원 중 3명이 불참했다. 외교부는 지난 5월 미얀마 군부를 대표하는 주한 미얀마 대사를 국산 무기 홍보 행사에 초청했다. 2009년 한국에 유학 온 웨노에씨는 “이런 상황에서 한국 정부에 뭘 바랄 수 있겠냐”며 “이제는 미얀마 민주화를 위해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한국 시민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마음뿐”이라고 호소했다.

■오송 참사 유가족 “국회 올 수밖에”

오송지하차도 참사 유가족과 생존자들은 지난달 20일 참사 후 처음 국회를 찾아 국정감사와 국정조사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이경구 유가족협의회 대표는 “청주시와 충북도 등 지방자치단체가 유가족과 소통하지 않으니 국회로 올라올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지난 8월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에 충북도지사 대상 현안질의가 파행되는 것을 보고 국정감사에서는 꼭 도지사와 시장을 불러 해명을 들어야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이 대표는 “국민 생명과 관련된 사안이 정치 논리에 휘말려 논의조차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책임자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했다. 국회에서 ‘지나간 일’로 치부되는 오송 참사가 당사자들에게는 현재진행형이었다.

■노란봉투법, 10년 만에 국회에 희망을 걸다

금속노조 조합원들이 지난달 20일 오후 국회 앞에서 ‘노조법 2·3조 개정안(노란봉투법) 본회의 통과 촉구 및 거부권 저지’ 투쟁문화제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국회가 ‘이재명 체포동의안’을 둘러싸고 들썩인 지난달 21일 노동자들은 국회 밖에서 “노란봉투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2·3조 개정안) 통과”를 외쳤다. 파업 노동자에 대한 기업의 무분별한 손해배상·가압류를 막는 노란봉투법은 여당의 반대 속에 야당들의 상임위 의결, 본회의 직회부 강행으로 본회의 표결이란 마지막 관문만 남기고 있다. 2003년 손배·가압류의 부당함을 호소한 배달호 열사 분신 후 20년, 2014년 쌍용자동차의 47억원 손해배상 청구 후 9년 만이다. 김용남 전국여성노동조합 정책국장은 “시민단체·노조가 법안을 계속 만들어왔는데, 국회 상임위 문턱을 넘은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이 대표의 체포동의안이 가결된 후 이날 본회의가 산회하면서 노란봉투법은 표결에 부쳐지지 못했다. 노동자들은 본회의 표결을 압박하기 위해 언제고 다시 국회를 찾을 예정이다.

이두리 기자 red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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