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치안강국은 이미 무너졌다
사회면이 연일 사건·사고로 얼룩진다. 내용은 날이 갈수록 자극적이다. 마약에 취해 차량을 운전·주차하다가 지나가던 행인에 피해를 가한 사건부터 도심 한복판에서 벌인 칼부림으로 무고한 시민의 목숨을 앗아간 사건까지 모두 나열하기도 힘들다. 음주운전은 이제 애교 수준으로 보일 정도다. 마약류 사범이나 묻지마 흉기 난동은 다른 나라 얘기인 줄만 알았다. 오죽하면 외신도 “치안강국 한국에서 흉악 범죄가 잇따르고 있다”고 할 정도다.
그랬다. 한국은 세계에서도 손꼽는 ‘치안강국’이었다. 해외여행을 즐기는 우리 국민도 세계 어느 나라를 다녀봐도 한국만큼 안전한 나라는 없다고 자평했다. 정보기술(IT) 강국답게 도심 곳곳에 위치한 폐쇄회로(CC)TV가 안전을 담보하고, 112 전화 한 통이면 수 분 내로 경찰들이 현장으로 도착한다.
시민 의식도 빼놓을 수 없다. 커피숍이나 음식점에서 노트북, 스마트폰과 같은 고가(高價) 전자기기를 두고 자리를 비울 수 있는 국가도 손에 꼽을 것이다. 해외여행을 다니다 보면 백팩이나 캐리어에 자물쇠를 채우고 다니는 여행객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치안은 무너진 지 오래다. 한국은 국가·도시 비교 통계 사이트 넘베오(Numbeo)가 매년 내놓는 세계 치안 순위에서 지난 2016년 1위를 차지했다. 이전에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다. 그러다 2017년 17위로 급락했고, 2019년에는 34위로 곤두박질쳤다. 올해 상반기 기준으로도 17위에 그치고 있다. 범죄 지표는 낮은 순위로 17번째다. 바로 밑에는 중국이 위치한다. 불과 0.5 차이다.
‘마약 청정국’ 지위도 잃었다. UN은 인구 10만명 당 연간 마약사범이 20명 이하면 마약 청정국으로 보는데, 한국은 이미 2015년 이 기준을 넘었다. 수치는 해마다 증가해 지난해 32명에 달했다.
치안을 책임지는 최전선이 무너진 여파다. 지난 7월 말 기준 경찰청 근무 인원 평균연령이 50세 이상인 지구대·파출소는 전국 2043곳 중 21.1%(431곳)다. 서울은 30%가량이며 지방에서는 50%를 웃도는 지역도 있다. 50대 경찰이 체력 부족으로 눈앞에서 범인을 놓친 사례도 있다고 한다. 경찰 내부에서 치안 최전선을 담당하는 인력들의 고령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이 마약이나 음주운전, 도박과 같은 범죄에도 연루되는 기강 해이 문제도 지적된다.
경찰 영향력이 확대한 것과는 정반대다. 경찰은 지난 문재인 정부가 내세운 이른바 검찰 개혁으로 권한과 역할을 대폭 늘렸다. 검경 수사권 조정과 검수완박 입법으로 검사로부터 지휘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수사하고 종결할 수 있게 됐다. 내년 1월 1일이면 국가정보원으로부터 대공 수사권도 넘겨받는다.
뒤늦은 치안 우려에 경찰은 지난 8월 초 서울 도심 한복판에 경찰 장갑차를 배치하고, 소총과 권총으로 무장한 경찰 특공대원을 내세웠다. ‘보여주기’식이라는 비판이 나오자, 내근 인력 2900명을 기동순찰대로 배치하겠다는 조직재편 방안도 내놓았다. 이마저도 현장에서 얼마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는 사이 시민들은 총기 사고까지 우려해야 할 처지다. 공항에서 실탄을 소지한 채 해외로 출국하려는 이들이 적발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올 들어 8월까지 인천국제공항에서 실탄류 적발 사례는 208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15건)보다 80.9% 늘었다. 적발 인원 대부분이 외국인이라고 해서 안심할 문제가 아니다.
3D(3차원) 프린터로 총기까지 만들 수 있는 시대다. 설계 도면만 있다면 총까지 제작할 수 있다는 의미다. 설계 도면은 온라인에서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지난해 7월 일본에서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유세 중 불법 사제 총기에 피격당해 숨지는 사건에 사용된 총기 일부도 3D 프린터를 활용했다.
지난 3일(현지 시각) 태국 방콕 한 쇼핑몰에서 14세 소년이 총기를 난사해 최소 2명이 숨지고 5명이 다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앞서 지난해 태국에서는 마약에 취한 전직 경찰관이 총기를 난사해 38명 이상이 숨졌다. 국내 사회면에서 접하고 싶지 않은 소식들이지만, 머지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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