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30.남양주 실학박물관
지금이야말로 실학이 필요한 시대가 아닐까? 첨단과학시대를 살고 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점을 보고 가짜 뉴스에 휘둘린다. 지식은 늘어나도 무엇이 진짜이고 가짜인지를 구별하는 지혜는 부족하다. 고급 정보와 부는 소수가 독점하고 빈부의 격차는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왜 이런 일이 여전히 벌어지는 것일까? 왜란과 호란을 겪었지만 백성들의 삶과는 무관한 예송논쟁에 몰두하던 17세기 조선의 답답한 정치가 연상된다. 이러한 풍토를 개탄하며 백성들의 살림을 늘리고 부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한 정책을 제시하는 학자들이 줄줄이 나타난다. 반계 유형원과 성호 이익,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 같은 학자들이 추구한 학문을 ‘실학’이라 부른다. 남양주 두물머리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가 곁에 자리한 경기문화재단 실학박물관(관장 김필국)은 실학을 주제로 한 국내 유일의 박물관이다.
■ 시대를 앞서간 실학자들의 숨결을 만나다
2층 상설전시실에서 조선의 위대한 실학자들의 뜨거운 숨결을 만난다. 담헌 홍대용, 혜강 최한기 등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생애와 업적을 살펴보며 시대를 앞서간 학자들의 고민을 떠올려본다. 잠곡 김육, 포저 조익, 연암 박지원과 환재 박규수, 혜강 최한기 같은 실학자들의 유물은 이를 소중히 간직했던 가문에서 기증한 것들이기에 더욱 각별하게 다가온다.
역시 그림이 먼저 눈길을 끈다. ‘송하한유도’는 얼핏 보면 동양화의 한 폭 같다. 사실 소나무 밑에 서 있는 사람은 대동법을 확대하는데 온 정성을 쏟은 김육이다. 인물보다 소나무를 더 크게 그린 이 독특한 구도의 초상화는 중국 화가의 작품이다. 그의 손자도 대동법 시행에 앞장섰는데 독특한 눈썹을 가진 김석주의 초상화는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다.
특별한 초상화가 또 있다. ‘양주팔괴’로 불리는 청나라의 화가 나빙이 그린 초정 박제가의 초상화 역시 강렬하다. 키는 작지만 뚜렷한 이목구비를 갖춘 박제가의 당당한 풍모를 잘 표현한 이 초상화가 실사구시를 주창한 추사 김정희와 관련이 깊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박제가의 초상화는 김정희를 통해 청나라의 선진문물이 조선을 거쳐 일본으로 전달됐다는 사실을 밝힌 일본 학자 후지즈카 치카시를 통해 국내에 알려진다.
19세기의 실학자 최한기의 유물도 빼놓을 수 없다. 최한기는 지구의를 만들고 세계지도와 ‘지구전후도’를 그렸으며, 세계의 자연·인문지리에 관한 책 ‘지구전요’를 저술한 만능학자였다. 1861년 제작한 ‘대동여지도’는 언제 보아도 감동적이다.
‘대동여지도’만큼 주목해야할 지도가 또 있다. 그것은 대동여지도보다 100년 전인 1755~1757년 무렵에 제작된 ‘동국대전도’다. 그렇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백리척을 적용해 정밀한 지도를 제작한 정상기‧정항령 부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조선에 전래된 세계지도는 어떤 것이 있을까? 페르비스트가 1674년에 제작한 ‘곤여전도’를 보면서 서양의 힘은 하늘의 별자리를 관측하고 바다를 개척한데서 비롯됐던 사실을 보여준다.
송이영이 천체를 측정하기 위해 1669년 만든 ‘혼천의’도 주목되는 유물이다.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는 개화파를 길어낸 인물로만 알려졌으나 별자리의 위치를 통해 시간과 계절을 측정하는 ‘평혼의’와 천문관측기구 ‘간평의’를 제작한 과학자였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이번 전시에서 실학박물관 학예연구사들이 가장 주목한 유물은 무엇일까? 바로 실학자 유금이 1787년 만든 아라비아식 천문시계, ‘아스트로라브’이다. 유금의 조카는 ‘발해고’를 지은 역사가 유득공이다.
■ 실감콘텐츠 체험전 ‘조선의 하늘과 땅’
실학박물관 제3전시실에서 흥미로운 전시가 펼쳐진다. 9월12일부터 진행되고 있는 실감콘텐츠 체험전 ‘조선의 하늘과 땅’은 전통시대의 과학문화재를 첨단의 기술과 전시기법을 동원해 ‘실감나게’ 감상할 수 있다.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의 공립박물관·미술관 실감콘텐츠 제작 및 활용 사업에 선정돼 마련된 이번 체험전은 실학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국보 ‘천상열차분야지도’와 ‘곤여만국전도’, ‘혼천시계’와 ‘혼개통헌의’ 같은 과학 문화재를 실감 나는 영상으로 감상하다 보면 미지의 세계와 정확한 시간에 대한 우리 조상들의 관심과 지혜에 새삼 놀라게 된다.
특히 360도 원형의 대형 LED스크린에서 파노라마처럼 상영되는 ‘1787: 스페이스 오디세이’ 영상은 환상적이다. 마치 우주여행을 하는 것 같은 신나는 경험을 선사한다. 계수나무 아래서 토끼가 방아를 찧는 전설의 달부터 우주를 향한 꿈과 희망을 담은 한국 최초의 우주발사체 ‘나로호’에 이르기까지 과학 발전의 발자취를 영상으로 만날 수 있다. ‘측우기’와 ‘앙부일구’처럼 독창적인 발명품을 제작한 힘이 세종의 열린 태도였음을 감탄하게 된다. ‘조선의 때 이른 절정’을 구가한 세종시대는 물론 문화를 꽃피운 영정조시대의 실학도 만날 수 있다. 실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혼개통헌의’를 비롯한 실학시대 과학문화재는 이 시대의 실험정신을 보여준다.
체험 콘텐츠 ‘AR-혼천시계’는 국보 혼천시계를 증강현실로 만나게 한다. ‘내 손안의 곤여만국전도’는 디지털 퍼즐게임을 즐기면서 조선시대 세계지도와 세계 인식을 배우는 미디어테이블이다. ‘AR-혼천시계’는 박물관에 전시된 혼천시계의 형태와 세부 구조를 참고해 3D 데이터로 제작한 것이다.
관람객들은 전시장에 설치된 태블릿으로 유물 위에 증강된 혼천시계를 감상할 수 있다. 전자게임에 익숙하지 않은 성인들도 재미있는 경험을 선사한다. 혼천시계의 구조와 작동원리가 궁금하다. 쥐부터 돼지까지 열두 동물의 ‘십이간지’ 캐릭터, 혼천의 주변에 펼쳐지는 우주를 연출하는 효과도 대단하다.
특히 ‘내 손안의 곤여만국전도’는 곤여만국전도를 3가지 체험 활동으로 재구성한다. 곤여만국전도에 숨겨진 사실을 알아보는 ‘곤여만국전도 알아보기’, 곤여만국전도에 그려진 대륙과 동물 퍼즐을 맞춰보는 ‘곤여만국전도 퍼즐’, 곤여만국전도를 지구본에 입혀 입체감 있게 만든 ‘빙글빙글 곤여만국전도’가 있다. 입체 지구모형을 돌려보면서 움직이는 동물과 배를 감상하고 현재의 지도와 고지도를 비교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과학기술과 관련 문화재가 생각보다 훨씬 풍부하고 다양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 실학의 관심사는 사람과 우주로 뻗어 있다
그동안 진행한 특별전과 기획전을 살펴보면 실학박물관의 관심사와 지향점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 ‘달력, 시간의 자취’, ‘유배지의 제자들, 다산학단’, ‘실학청연(實學淸緣), 벗과 사제의 인연을 그리다’, ‘반계수록, 공정한 나라를 기획하다’, ‘18~19세기 국화 열풍과 실학자의 국화 애호’, ‘재상 채제공, 실학과 함께하다’ 등 다양한 인물과 폭 넓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전시와 연계한 학술회의도 주목된다. 2012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 선정기념 학술대회 ‘다산 사상과 서학(西學)’과 2013년 성호 이익 서세 250주년 기념 특별전 ‘새로 보는 하늘 땅, 세계–성호 이익의 실학’ 같은 규모가 큰 학술대외가 잇달아 열렸다. 또 실학박물관과 파주시가 공동주최한 학술대회 ‘율곡학과 경기실학’이나 가평군과 공동으로 주최한 ‘대동법 시행으로 조선을 살린, 잠곡 김육과 가평’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도내의 시‧군과도 협력해 실학정신을 지역으로 확산하고 있다.
현재 진행되는 교육 프로그램은 어떤 것이 있을까?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을 대상으로 ‘밭으로 간 실학자’는 옷감을 생산하는 목화를 키우면서 실학의 실용적 가치를 몸으로 배우는 농사 체험프로그램이다. ‘생생! 실학여행’과 ‘실학자와 유물 하나’는 쉽고 재미있게 아이들이 실학적 자세를 터득할 수 있도록 구성한 것이 특징이다. 관람객들도 참여할 수 있는 주말 상설 프로그램 ‘실~하게 놀자~!’는 홍대용의 혼천의, 박지원의 수레, 정약용의 거중기를 직접 체험해 볼 수 있어 인기가 높다. 가을은 사색하기에 좋은 계절이다. 실학박물관을 찾아 시대를 앞서 고민했던 반계나 성호, 다산 같은 실학자들을 만나 세상을 살아갈 지혜와 용기를 배우자. 권산(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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