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핑장서 숨진채 발견된 10대 남녀…시체가 말을 걸어왔다 [Books]

김유태 기자(ink@mk.co.kr) 2023. 10. 5.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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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해부하는 의사
리처드 셰퍼드 지음, 김명주 옮김, 김영사 펴냄
과거 2014년 흑인 총격사건 사망자의 부검 결과를 설명하는 모습. [사진 출처=AP 연합뉴스]
텐트 속엔 죽은 소녀가 잠에 빠진듯 누워 있었다. 소녀 옆에 놓인 숯이 담긴 쟁반, 성행위 징표는 없었다. 16세 소녀의 사인은 일산화탄소 중독. 소녀와 동행했던 17세 소년은 텐트 안에 없었다.

신작 ‘죽음을 해부하는 의사’의 저자는 저 소녀의 마지막 순간을 ‘해부’하기 시작한다. 영국 법의학자인 저자가 스무 건이 넘는 범죄와 살인현장의 시체에서 죽음과 삶을 사유한 책이다. 그는 쓴다. ‘주검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죽음은 삶의 인과(因果)로 연결된 무엇이다.’

다시, 소녀의 텐트로 가보자. 경찰차, 추적견, 과학수사팀, 기자들이 몰려 텐트 밖이 어지럽다. 사실 처음엔 경찰은 소년이 소녀를 살해한 뒤 도주했다고 의심했다. 타들어가는 숯에서 발생한 일산화탄소가 소녀의 후두부로 들어가면서 죽음이 완성됐을 것이다.

캠핑장 뒤 숲에서 소년이 추락사한 채 발견되자, 경찰은 ‘살인 후 자살’이란 가설을 세운다. 혼자 그곳까지 가서 떨어져 죽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소년과 소녀는 ‘애인’ 사이였다. 친구들에게 탐문한 결과 두 10대는 임신을 의심했다. 이제 소녀와 소년의 주검이 가설의 진의를 확인시켜줄 유일한 단서다.

죽음을 해부하는 의사
소녀의 자궁, 소년의 전립선을 저자는 세포 하나까지 꿰뚫어본다. 그는 시체를 들여다보며 범죄를 재구성하는 ‘의학 탐정’으로 불렸다. 부검 결과, 소녀 자궁엔 임신 징후가 없었고, 소년 요도에서 정자는 나오지 않았다. 즉, 임신은 없었고 그날 성행위도 없었다는 얘기다. 그런데 새로 나온 흥미로운 사실. 소년 몸에서 일산화탄소 수치가 29%로 나왔다.

포화도는 소녀보다 낮았지만 함께 일산화탄소에 노출됐다는 의미다. 따라서 어지러움에 고통스러운 소년이 절벽으로 가서 공기를 들이마셨고, 어떤 이유로 떨어져 죽었다는 신빙성 높은 가설이 세워진다. 저자는 두 10대의 죽음에서 매캐한 누명을 한꺼풀씩 벗겨낸다.

시선을 돌려 또 다른 범죄현장. 부검실 시체안치대 시트 안에 칼에 여러 번 찔린 40대 여성이 누워 있었다. 배우자의 불륜을 확신한 남편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다 새벽 6시 아내를 깨웠다.

소매 안에서 부엌칼을 꺼내 자신의 배에 댄 남편은 “당신 없이 살 순 없다”고 아내에게 애원했다. 아내가 그 순간에도 “내 탓 하지마!”라고 소리치자 남편은 아내의 배에 칼을 ‘1회’ 집어넣는다. 그리고 자신의 배도 찌른 뒤 기억을 잃었다. 깨어나보니 아내만 사망했다.

단 한 번 찔렀다고 항변하는 남편의 기억과 달리 아내 몸엔 목에 하나, 가슴에 셋, 다리에 둘, 팔은 일곱 군데가 찔려 있다. 저자는 죽음 앞에서 그들의 한때 서로를 아꼈을 ‘처음’을 생각한다. 이런 결혼생활의 끝을 남편과 아내는 상상이나 했을까. 저자는 험난한 중년의 결혼생활이 심심치 않게 살해 욕망으로 이어진다고 써내려간다.

영국 법의병리학자인 저자 리처드 셰퍼드 박사. 그는 영국의 ‘의학 탐정’으로 불린다. [리처드 셰퍼드 박사 홈페이지]
대체의학에 빠진 부모가 낳은 갓난아기의 죽음, 한쪽 노인이 배우자에 의존하다 죽는 사례까지 저자는 사유한다. 인생의 단계별로 전시된 죽음의 풍경이다.

저자에 따르면, 죽음에는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공식’이 있다. 세상엔 부모가 동시에 죽는 일은 드물지만 생각만큼 드물지는 않다. 윤리적 종교적 문제에서 자유로워진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성도착(페티시)에 의한 죽음도 흔해졌다. 20~30대 죽음 중 13.5%의 사인은 술 때문이다. 부검대 위의 시신들은 결국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책은 셰익스피어의 문장을 가져와 삶 속에서 누구나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는 죽음을 사유한다.

셰익스피어 작품 ‘뜻대로 하세요’ 2막 7장을 보면 “세상은 하나의 무대요, 남녀는 배우”다. 연극이 그렇듯이 무대 위 배우는 등장도 하고 퇴장도 한다. 유모 품에 안겨 삶을 시작해 달팽이처럼 마지못해 학교에 갔다가 용광로처럼 한숨을 내쉬며 애인을 찬미하고, 걸핏하면 싸우고 물거품 같은 명성도 좇다가 결국 슬리퍼를 질질 끄는 빼빼 마른 노인이 된다. 이게 인간의 삶이다.

‘죽음을 해부하는 의사’의 원서인 ‘The Seven Ages of DEATH’의 표지. [저자 리처드 셰퍼드 박사 홈페이지]
인간은 하지만 그 과정에서, 수많은 죽음을 마주한다. 말을 잃은 고인들의 시신 앞에 선 저자는 이처럼 죽음이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는 명징한 사실을 들려준다.

또 부산하고 소란스러운 날들 속에서도 늘 마지막 순간을 기억하자고 말한다. “나는 의자에서 책을 읽다가 죽고 싶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잠들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인생에서 가장 멋진 경험일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을 읽다보면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사색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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