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줌 극우가 의회 분열시켜” 美도 한국처럼 극단 정치 판친다
미국 권력 서열 3위였던 공화당 소속 케빈 매카시 연방 하원의장이 당내 소수 초강경파에 의해 3일(현지 시각) 전격 해임됐다. 하원 의장에 대한 해임 결의안 통과는 234년 미 의회 역사상 처음이다. 미 하원은 이날 전체 회의를 열고 찬성 216표, 반대 210표로 하원의장 해임안을 가결시켰다. 이날 표결로 미 하원은 의장 부재 상태에 돌입하며 사실상 마비됐다.
초유의 하원의장 해임은 매카시가 민주당과 타협했다고 공격해온 소수의 공화당 강경파가 주도해 관철시켰다. 야당인 공화당 의석 수가 민주당을 소폭 앞서는 가운데(공화당 221석·민주당 212석) 공화당 내 강경파 8명이 캐스팅보트(결정권)를 쥐고, 해임을 막으려는 다수의 공화당 표를 무력화시킨 결과다. 민주당은 이날 해임안 가결을 당론으로 정하고 전원 찬성 표를 던졌다.
한 번의 표결로 전격 결정된 미 하원의장 해임 사태는 정치가 갈수록 양분화되는 가운데 소수 극단주의자들이 대화와 타협을 추구하는 다수를 뒤흔드는 미국 정치의 불안한 현실을 보여줬다고 미 정치 전문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다수결 및 승자 독식으로 상징되는 민주주의 체제가 캐스팅보트를 장악한 극단적 소수에 의해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를 보여주는 실례(實例)이기도 하다. 내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타협 없는 극단적 보수 정책을 내세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지지율도 높아져 대화와 타협을 기반으로 했던 미국의 민주주의 체제가 흔들리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날 하원의장 해임을 주도한 강경파 8명은 대부분 트럼프의 선거 구호인 ‘MAGA(Make America Great Again·미국을 더 위대하게)’를 신봉하는 친(親)트럼프 의원들이다.
동맹이나 해외 군사 지원에 회의적인 공화당 초강경파가 득세하면 한반도 정책을 비롯한 미국의 외교·안보 정책에도 영향을 줄 우려가 있다. 이들의 반대로 미 의회는 지난달 처리한 임시 예산안에 우크라이나 지원 예산을 전혀 반영하지 못했다.
미 하원은 이날 오후 전체 회의를 열고 공화당 초강경파 중 한 명인 맷 게이츠 의원이 단독 발의한 매카시 하원의장 해임 결의안에 대한 표결을 실시했다. 단 1명의 의원, 그리고 고작 7명의 동조자가 어떻게 정원 435명(현원 433명)인 미국 연방 하원을 혼란에 빠뜨릴 수 있는가. 그 답은 3일(현지 시각) 하원의장의 해임 결의안 표결에 앞서 하원 본회의장에서 1시간 동안 이뤄진 토론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토론에서 매카시의 측근이자 하원 운영위원장인 톰 콜 의원은 “소수 집단이 그들만이 이해하는 이유로 (의장을 축출해) 하원을 혼란에, 미국을 불확실성에 빠뜨리려고 한다”고 말했다. 이어 민주당 의원들을 “반대편의 친구들”로 부르며 “(의장을 해임해)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기 전에 오랫동안 열심히 생각해 보라”고 당부했다. 당내 초강경파와 대화하는 대신, 오히려 민주당을 설득하려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해임 결의안을 단독 발의한 게이츠 의원은 “혼란의 원천은 매카시 의장이다!”라며 오히려 언성을 높였다.
공화당이 고성과 야유를 주고받으며 분열을 드러내는 동안 민주당 의원들은 일절 토론에 참여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그 결과 한 시간 동안 다수의 ‘현실파 공화당’ 대(對) 소수의 ‘강경파 공화당’이 서로를 맹폭하는 이례적 상황이 펼쳐졌다. 평소 자신에게 충성하는 게이츠 편을 들어온 트럼프조차 이날은 소셜미디어 ‘트루스 소셜’에 “왜 공화당원들은 자기들끼리 싸우나. 왜 우리나라를 파괴하는 극좌파 민주당원들과 싸우지 않나”란 글을 남겼다.
표결이 시작되자 민주당 의원들은 당론으로 택한 ‘해임 찬성’에 몰표를 던져 234년 사상 최초의 하원의장 축출에 일조했다. 매카시가 최근 조 바이든 대통령 탄핵안을 주도했다는 등의 이유로 민주당은 표결에 앞서 해임 찬성을 당론으로 채택했다. 공화당 의원 중 210명은 ‘반대’, 8명이 ‘찬성’하며 해임안은 6표 차로 가결됐다. 7명은 기권했다. 뉴욕타임스(NYT)는 “한줌 밖에 안 되는 극우 공화당원들이 당을 분열시키고 매카시를 쫒아냈다”며 “의회의 심각한 양극화를 보여준다”고 했다.
미 언론들은 국정 운영을 위한 최소한의 타협도 허용하지 않을 만큼 양극화된 정치 구도에서 하원의장 해임 사태의 원인을 찾고 있다. NBC뉴스는 “지난 5월 (조 바이든 대통령과) 정부 부채 한도 합의를 한 것이 매카시 종말의 서곡이었다”면서 게이츠가 이를 매카시의 “원죄”라고 부른다고 전했다. 그에 이어 매카시가 미 연방 정부의 셧다운(연방 지출 중단)을 피하기 위해 지난달 30일 민주당과 연대해 임시 예산안을 처리한 것이 공화당 초강경파에게는 ‘선을 넘는 일’이었다는 분석이다. NYT는 “극도로 분열된 현재 미국의 정치판에서 타협과 대화는 이제 미덕이 아니라 반란처럼 여겨진다”고 전했다.
이날 하원의장 해임을 주도한 8명의 공화당 강경파는 대부분 2005년 발족한 보수 강경파 모임 ‘프리덤 코커스(Freedom Caucus·자유회)’ 회원들이다. 비즈니스 인사이더는 “매카시가 지난 1월 의장선거 때 이미 몰락의 씨를 뿌렸다”고 했다. 당시에도 프리덤 코커스의 반대로 매카시는 15차에 걸친 투표 끝에 겨우 하원의장이 됐다. 그 과정에서 매카시는 초강경파에 여러 양보를 했는데, 그중 하나가 하원의원 한 명이 의장 해임 결의안을 단독 발의할 수 있도록 하는 규정 변경이었다. 낸시 펠로시 전 하원의장 시절 민주당은 ‘당론 혹은 의원총회 총론’으로만 의장 해임 결의안을 발의할 수 있도록 제한했다. 이를 ‘1인 발의’로 바꿈으로써 언제든 하원의장을 표결로 날릴 수 있는 ‘기폭 장치’를 심어두었고, 강경파들의 의도대로 이 장치가 이번에 작동한 셈이 됐다.
임시 하원의장은 매카시의 사전 지정에 따라 우선 그의 최측근인 패트릭 맥헨리 의원이 맡았다. 그러나 공화당 다수가 하원의장 해임에 반대했던 만큼, 공화당에서 누구를 차기 의장 후보로 지명할지는 불분명하다.
트로이 넬스, 그렉 스튜비 공화당 하원의원은 이날 트럼프를 차기 하원의장 후보로 지명하겠다고 밝혔다. 의원조차 아닌 트럼프가 하원의장 선거에 나서는 것은 보수인 폭스뉴스조차 “있기 어려운 일”이라고 평가했다. 그만큼 미 정치권에서 예상치 못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징후이기도 하다. 전례는 없지만 미 헌법상 의원이 아니어도 하원의장에 오를 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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