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문제 없는 집은 없지만…
얼마 전 ‘이 불안한 집’이라는 연극이 명동예술극장 무대에 올랐다. 무려 300분(5시간) 공연이었다. 긴 시간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있을 수 있을지, 가는 길 내내 몇 번을 자문했는데 시간은 문제가 아니었다. 극은 그리스·로마 신화의 트로이전쟁을 배경으로 두고 있으나 신화에 머물지만은 않는다. 불행이 내리 반복되는 집안에 대한 이야기였다. 간략히 요약하면, 아가멤논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딸을 신에게 바친다. 아내는 아이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죽은 딸의 환영을 보며 괴로워하다 끝내 남편을 죽이며 복수한다. 남은 자식들은 제정신이 아닌 어머니에게 사랑을 기대하지만, 애정은 이미 차갑게 식어버렸다. 자식들은 처참한 불행이 자신들에게도 이어지고 있다고 여겨 이 불안을 끝내고자 어머니를 죽인다. 결국 빈집만이 남는다.
공연의 마지막 3막은 현대로 배경이 넘어온다. 현대에도 불안으로 제 목을 조르는 사람들 모습이 여전하다. 이야기 끝에선 불안의 상징이었던 살해당한 딸이 나와 애초에 이런 상황을 원하지 않았다며 울부짖는다. 결국 그들이 지금까지 본 환영과 저주는 본디 존재하지 않았으며, 각자의 마음에 있던 불안이 만들어 낸 비극이었다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요즘 뉴스를 보면 많은 사건이 집에서 일어나고 있다.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한 곳이 붕괴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일가족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기사도 자주 눈에 띈다. 왜 죄 없는 아이들이나 늙은 부모를 해치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실제로 존재하는 ‘이 불안한 집’들이다.
우리 삶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문제 없는 집은 오히려 드물다. 아침 저녁 방송 프로그램만 잠깐 봐도 어린 나이에 가정을 꾸린 집, 부부 관계에 문제가 있는 집, 키우기 어려운 아이를 둔 집 등 천태만상이다. 어느 가정이나 저마다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불안의 원천으로 삼아선 안 된다. 불안감에 딸을 제물로 바친 신화 속 주인공이 저지른 어리석은 행동을 실제 삶에선 반복할 순 없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신화를 만든 이들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일 것이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